일상이 한 명의 개인만 지칭한다면 화려함과 끔찍함이 공존하기는 어렵지만, 일상이 여러 명의 사람을 지칭한다면 화려함과 끔찍함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이더라도 누군가에게 화려했던 날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했던 날이 될 수 있다. 개인의 경험과 공간의 경험, 시간의 경험은 모두 각각 다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현실이라는 측면에서 화려하면서도 끔찍하다는 공통된 지점을 관통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현상이 우리는 벌어지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에 현실을 살면서도 이 둘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화려함’과 ‘끔찍함’이 공존할 수 있을까.
*주의* 소음에 민감하신 분들에게는 불쾌한 사운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링구아 이그노타(Lingua Ignota)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질문이다. 우리가 흔히 느끼는 화려함이라면 절대 끔찍함과 공존할 수 없고 반대로 우리가 흔히 느끼는 끔찍함이라면 화려함과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단어는 어쨌든 대척점에 있는 단어이고, 일상에서의 같이 사용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조금만 바꿔서 생각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일상이 한 명의 개인만 지칭한다면 화려함과 끔찍함이 공존하기는 어렵지만, 일상이 여러 명의 사람을 지칭한다면 화려함과 끔찍함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이더라도 누군가에게 화려했던 날이 누군가에게는 끔찍했던 날이 될 수 있다. 개인의 경험과 공간의 경험, 시간의 경험은 모두 각각 다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현실이라는 측면에서 화려하면서도 끔찍하다는 공통된 지점을 관통한다. 그럼에도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현상이 우리는 벌어지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기에 현실을 살면서도 이 둘은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링구아 이그노타는 위와 같은 부분을 발견한다. 그리고 곧바로 음악적으로 표현하는데, 바로크 팝(Baroque Pop) 토대 아래 노이즈(Noise) 기법을 이용하여 사운드를 확장나가는 방식이다. 평론가들은 그의 음악적인 언어를 데스 인더스트리얼 또는 다크 엠비언트류의 음악으로 포함시키고 있으면서도, 확실히 위의 장르를 하는 아티스트와는 다른 노선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감상해보면 알겠지만 그의 사운드는 극단적이다. 마치 화려함과 끔찍함이 공존하듯이 말이다.
그의 사운드에서 화려함을 장식하는 부분은 다름 아닌 바로크 팝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음악시간때 배웠던 ‘바로크 시대’라는 단어에 사용했던 그 바로크가 맞다. 이 음악의 특징은 주로 오르간이나 클래식(고전)음악에서 사용된 악기들을 적극이용하고 주로 현악기를 많이 편입시킨 팝 음악을 지칭한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록과 클래식이 합춰지면서 생성된 장르이기 때문에 록 음악의 형식을 자주 차용한다. 하지만 링구아 이그노타는 이런 흔한 바로크 팝을 흉내내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에 차용하지 않았던 오페라적인 보컬과 오르간을 적극적으로 편성한다. 이 느낌은 마치 거친 노이즈와 합쳐줘 거친 비가 내리는 성당과 어울리는 묘사이다.
끔찍함을 장식하는 부분은 노이즈라고 할 수 있다. 이 노이즈는 백색소음에 가까운데 로-파이(lo-fi)에서 사용되는 ‘찌직’거리는 부드러운 노이즈에 비해 날이 서있고, 더 시끄러운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의 음악이 일본에서 이런 사운드만 적극적으로 탐구하여 정말 노이즈만 녹음한 허쉬 노이즈(Harsh Noise)라는 장르에 포함이 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는다. 음악적으로 노이즈를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고, 극적인 연출을 위해 잘 배치된 노이즈에 가깝다. 그럼에도 이 노이즈가 끔찍함인 이유는 노이즈라는 사운드의 원초적인 야만성 때문이다. 모든 걸 집어 삼키고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목소리, 백사운드, 보컬, 악기까지 모두 삼킨다.
또 다른 평론가들은 이러한 장르적인 복합성을 인정하여 네오클래시컬 다크웨이브(Neoclassical Darkwave)라는 복잡하고 미묘한 장르를 붙여주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그가 선보인 화려하고 끔찍한 사운드는 《아그누스 데이》에서 더욱 세련되게 우리와 마주하게 된다. 아그누스 데이 또 아뉴스 데이라는 제목은 미사곡(Ordinarium)의 한 부분이기도 하며 다양한 음악가들이 차용했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 단어의 뜻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말인데, 이 역시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느님에게 바쳐지는 제물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이를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되는 행위지만 어린양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의 마감을 뜻한다. 이 단어만큼 화려하면서 끔찍한 단어가 없다.
오프닝 트랙인 <IN TONGUES>에서는 경건한 오르간 소리와 함께 소년의 급박한 네레이션이 들려온다. 소년은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데 방언을 하기도 하고, 성경의 한 구절을 읽기도 한다. 이 읽혀진 구절은 실제 성경에 적힌 단어와 반대로 읽혀진다. 소년의 목소리 뒤에서는 갑자기 환호 또는 비명이 들리면서 소년의 말을 장식한다. 노래의 끝으로 향하면 노이즈가 소년의 목소리를 점차 덮는다. 그리고 오르간 소리도 모두 덮이고, 이제 노이즈 사운드만이 들려온다. 이 트랙은 링구아 이그노타가 추구한 요소들이 담백하게 포함된 곡이다. 오르간을 통한 고전 음악의 감성과 노이즈의 극단성을 표현한 좌우대칭이 맞는 곡이기 때문이다. 이 곡에서 화려함과 끔직함은 중첩되면서 나타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는 혀(TONGUES)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세분화 시키면 ‘혀 안’과 ‘혀 밖’이라는 장소로 나눠지며 노이즈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요소로 기능한다.
혀 밖에서는 소년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을 대변한다. 말씀과는 달리 말씀과는 또 다른 현실을 반영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느낌을 갖는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숨도 쉬고 주변에 누군가가 있다. 이 느낌은 노이즈를 타고 혀 안으로 들어간다.
이런 사운드를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끓어오르다가 사라져버리는 이야기’. 링구아 이그노타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양극적으로 분석했고, 아무리 극단적이라고 해도 화려한 것도 현실에서 볼 수 있고, 끔찍한 것도 현실에서 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게 따로따로 발생되지 않고, 한꺼번에 일어난다는 점을 급격한 노이즈 사운드와 불길한 오르간 사운드로 표현한다. 이 두 사운드는 상호보완적이면서 한쪽에 결국 먹힌다는 점이 불행에 잠식되어가는 끔찍함에 잠식되어가는 현실과 너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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