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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때 지배적인 담론에서는 트러블을 일으키면 트러블에 빠지게 되므로 아무도 트러블을 일으켜선 안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
*<톰보이>의 연출
(1편에 이어) 다음으로 <톰보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아마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작품이었던 반면, <톰보이>는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시아마의 작품들은 분명 리얼리즘과 맞닿아 있다. 하지만 과거의 재구성이나 일련의 이상적 세계를 구축하며 예술을 통해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작품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었던 반면, 본 작품 같은 경우 일말의 이상성도 허용하지 않는 태도로 현실을 비춘다. 핸드헬드와 롱테이크를 기반으로 영화는 리얼리즘을 구축하며 특정하게 규정지을 수 없는 입체적인 존재의 삶을 그저 묵묵히 따라간다. 그 삶은 부모가 붙여준 이름으로서 ‘로레’이자, 자신이 붙인 이름인 ‘미카엘’로 살아가는 한 존재의 것이다. 일단 그 존재를 로레라 부르고자 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본 존재는 로레라는 이름을 지니고 진실한 젠더를 추구하고 싶어 하듯 보이므로 말이다. 영화는 로레에게 밀접한 클로즈업으로 카메라를 근접해나가며 친밀한 태도를 보여주고,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다. 이분법적인 섹스와 거기에 일치하는 젠더로 구축된 세계에 균열을 내는 복합적인 퀴어이자, 무한한 젠더에 상응하는 본 존재는 이 같은 카메라를 통해 결코 이질적으로 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이질성, 낯섦은 롱숏을 통해 비친, 이사 간 로레가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공간에서 나타나며, 더욱이 그 공간은 기성의 보편율이 지배적이다. 이 같은 연출로부터 시작되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로레는 아빠와 함께 드라이브하며 저 하늘의 먼발치에서 따스하게 내려오는 햇볕을 흠뻑 만끽한다. 하지만 이를 내리쬐는 태양이 이내 곧 나뭇잎들에 의해 가려져 그늘로 뒤바뀐다. 이에 아이도 눈을 감으며, 타이틀이 뜨기 직전까지의 찰나에는 소리까지 차단되며 진공상태에 빠진 듯하다. 퀴어로서의 아이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음지에, 아니면 자신만의 세계에 차단되어야만 하는 존재인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오프닝 시퀀스는 후반부와 수미상관을 이루는데, 여전히 태양 아래 머물 수 없는 로레의 위치가 나타난다. 섹스에 규정되지 않은 채로 젠더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원치 않는 원피스를 입고 폭력적으로 재현되어 양지에 놓이고 타협하는 그 삶이 말이다.
*아이들의 세계
이 같은 초반부에 주목할 만한 영화의 또 다른 연출은 저녁 식사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로레는 동생 잔과 앉아서 아이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그들의 부모는 서서 어른들만의 이야기를 나눈다. 양자의 세계는 시각적으론 각각의 숏으로 분절되고 구분된 채로 전개된다. 시각적으로 이들은 하나의 차원 하에 담기지 않는다. 하지만 청각은 분리된 시각에 침범해온다. 자매들은 아이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들음과 동시에, 어른들이 비교적 작은 소리로 나누는 그 속삭임을 함께 듣는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영향으로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한편 어른들은 아이들의 세계를 잘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관심이 많아 보이지만, 어른들은 그들의 세계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로레가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은 후반에 이르러서야 어른들에게 밝혀진다. 이 같은 어른의 세계 속에서 아이들이 영향받는 요소들은 무엇일까. 성인인 부모님에게서 성별에 따라 각자의 역할은 나뉘고 있다. 어머니는 지금 만삭의 임산부로 출산을 앞두고 있다. 그 상태는 섹스(생물학적 성별)로서의 여성성이 강조된 상황이다. 그녀는 내부에서 머무는 자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남편이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보고를 받는다. 다른 한편 아버지는 바깥에서 활동하는 자다. 그는 로레와 함께 도로에서 운전하는 자며 오후에도 집에 머무는 어머니와 달리, 바깥에 머물며 집에선 밤에만 볼 수 있는 존재다. 물론 통념적인 성적 보수성이 그토록 강조되지는 않는다. 로레가 아버지를 모방하는 요소들을 보면 말이다. 이 같은 어른들의 영향을 받는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자유분방함과 어른들의 구분법이 동시에 포착된다. 긴 머리를 가진 잔과 짧은 머리를 가진 로레, 하지만 두 자매가 노니는 행동 속에서 성별의 고정된 역할이나 차이를 포착하기 어렵다. 또한 이제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피부색이 편견이나 혐오, 구별의 대상으로는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요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융화된다.
*남근기와 잠복기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 또한 불어의 남성적/여성적 문법하에 견고히 분리되는 것은 바로 남과 여다. 로레가 새로이 이사 가서 만난 친구들은 남근기와 잠복기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제는 바깥의 친구들과 외부인에 대한 관심이 표출된다. 그래서 로레는 자매인 잔보다는 친구 리사를 택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근기의 징후가 남아있는데, 로레는 남근기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부모를 욕망하고 닮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보통 자신에게 있어 남근의 유무를 통해 최초의 욕망을 선택하고, 그 연적의 행동을 닮아가는 것에 있다. 한편 본 극의 특이한 점은 남근이 존재하지 않는 로레가, 마찬가지로 남근이 부재한 어머니를 욕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남근기의 특성은 남자아이들은 거세의 공포를, 여자아이들은 상실의 허망함에 남근을 갖고 싶다는 욕망으로 규정된다. 클레이로 남근을 만드는 로레의 태도는 이 같은 허망함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잠복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정신분석학을 정초하고 성립한 프로이트 및 라캉은 남근기의 특성을 생물학적인 것으로 봤지만, 시아마는 잠복기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회적 시선에 의한 것으로 탐구하며, 구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사회에서 남성으로 인정받고자 로레는 허망함을 극복하고자 한다. 또한 아이들이 남근에 의해서 성별을 구획하지 않고, 다른 공통점이나 차이점, 또한 자유로이 욕망하는 대상들에 의해 자신의 성을 구분하는 모습을 강조하며, 섹스보다는 자신이 젠더(사회적인 성)를 어떻게 여기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관점을 역설한다. 로레의 조숙함은 사실 정의하기엔 복합적이다. 로레는 자신과 함께 드라이브하고, 엄지손가락을 빠는 버릇을 공통으로 공유하며, 남근이 아닌 상체가 동일한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에 로레는 아버지의 행동을 닮아가는 것일 수 있지만, 그 성숙함은 사회적 지위로서 장녀라는 위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 같은 조숙함을 기반으로, 아이는 만삭의 어머니를 위해서 헌신한다.
즉 소녀가 어머니를 욕망하고 아버지를 모방하며, 온당 엘렉트라도 오이디푸스도 아닌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데, 영화는 이 같은 태도로 이분법적인 성기를 통해서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섹스 및 젠더에 대한 믿음에 균열을 일으킨다. 보이시한 목소리를 갖고 상체에 2차 성징의 징후가 드러나지 않음에 유사한 상체를 가진 아버지를 닮아가고, 자유로이 어머니를 욕망하는 과정에서, 로레는 고정된 젠더 남성의 특질을 모방한다. 짧은 머리와 복식, 그리고 거친 침 뱉기와 같은 행동이나 남성적인 운동으로서 축구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진실게임을 하며 어른들이 사용할 법한 문장을 발화하는 장면들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를 모방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하지만 성적인 관심이나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 등에 호기심을 보이며, 구강·항문·남근 등에 집착하는 유년기의 특징이 집약된 아이들의 천진함은 여전하다. 이 같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구분과 비구분은 모호하다. 남과 여를 구분해야한다는 요구가 분명 존재하지만, 리사는 남자아이들의 공동체에 머물고 싶으며, 또한 리사가 미카엘에게 화장해주는 모습은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바를 깨뜨리는 대목이다. 즉 아이들의 세계에서 포착되는 혼재성, 잡종성은 온전한 순수함이라는 것이 오히려 어른들에 의해 구축된 신화라는 것을, 오히려 아이들의 순수한 시선이란 다르고 이질적인 것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아이들은 공동체를 형성해간다. 공동체는 함께 오줌을 싸야 한다는 등 일련의 성별에 대한 의식과 명확함을 어른들로부터 모방하듯 보이고, 진실게임을 통해서 욕망에 대한 진솔함을 보이는 것처럼 '성적으로 규정된 존재'로서 명확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편견을 답습하듯 보인다. 어른들의 순수함이란 모호한 것들의 아리송한 요소들을 모두 소거하는 과정에서 비롯하는가. 이에 로레는 미카엘로서 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클레이로 만든 남근을 팬티 속에 숨기게 되는데 이때 성별로서는 명확해지지만, 로레이자 미카엘이라는 존재의 특징은 흐려지는 것이 아닌가.
*닫혀있는 젠더의 폭력
또한 로레가 미카엘로서 열망한 욕망, 젠더 등은 대단히 자연스럽지만, 한편 어머니에 의해 폭력적으로 재현된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는 삶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아이가 싸웠다는 것보다, 여성의 젠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에 더 충격을 느끼는 태도는 아이에게 더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영화의 결말부에 어머니로부터 아기는 태어난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표정, 얼굴로는 성별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 모호함, 그래서 아기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다. 하지만 이 같은 아이가 남근의 유무에 의해서 그 인생이 익히 예고되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분명 섹스는 불가항력적인 요소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가 선택하는 젠더에 의해서 섹스를 지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취한다. 로레의 복식이나 머리 모양은 남성성을 모방하는 것인지, 다만 자신이 열망하는 것인지 분명 모호하다. 하지만 이를 전자라고 한다면 머리를 잘라서 짧은 머리 모양으로 남성성을 획득하는 것, 그 머리를 이어 붙여서 콧수염을 형성하는 것, 남성 못지않게 강인한 근육을 지닐 수 있다는 것 등은 젠더의 수행에 의해서 극복되는 섹스에 다름 아니다. 클레이로 만들어진 가상의 남근 또한 젠더에 의해 섹스가 얼마든지 지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시아마는 지금까지 섹스에 의해서 오직 두 가지로만 부여된 젠더의 역사 대신에, 젠더에 의해 규정되고 변화할 수 있는 섹스라는 자유로운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정체성은 과연 단일해야만 하는가. 잔에게 로레는, 그 이름임과 동시에 미카엘일 수도 있으며, 언니임과 동시에 오빠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다채로운 색채를 어른들의 세계와 그것을 규정하려 하는 세계는 단일함만을 강조한다. 남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있거나 없어야만 한다는 닫혀있는 강박관념이 대두된다. 그리고 학교란 로레가 미카엘이자 젠더 남성임이 좌절되는, 존재를 폭압적으로 규정하고 소속시키는 굴레다. <레이디 버드>의 선조와도 같은 본 작품에서 자신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주체적 존재는 타율에 의해 좌절되고만 있다.
*자유로운 나의 젠더
로레는 결코 평면적인 특정 요소만을 바라는 존재가 아니다. 남자아이들과 함께 뛰논 축구장은 아이에게 해방과 동시에 진짜 남근을 요구하는 또 다른 억압의 공간이다. 그곳도 섹스에 의해 고정된 젠더를 요구한다. 하지만 리사와 함께 놓인 그 좁다란 방은 다르다. 축구 경기를 하던 로레는 이제 화장 또한 수행할 수 있다. 리사가 로레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일련의 모호했던 여지나 결말에 이르러 화해의 가능성이 열린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리사는 명확히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는 미카엘이 아니라, 축구를 하면서도 자신과 화장할 수 있는 그 자유분방한 존재를 열망했던 것은 아닌가. 이들의 요소는 바로 춤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춤이란 즉흥적이고 규정되지 않은, 진실하게 표현되는 본성 속에서 규정된 자신의 존재가 망각되는 행위라고 논한 바 있다. 이 비규정적인 춤의 속성과 자유분방하게 젠더로 향하는 로레의 춤사위는 충분히 일맥상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같이 자유분방하게 지금 여기에서 즉흥적으로 젠더를 형성하는 이들에게 과연 설 자리는 있는가? 이사 다니는 행위는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짐임과 동시에, 퀴어로서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 타자로서 대지를 떠돌아야만 하는 운명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남근을 소유하지 말라는 요구와 규정된 여성성을 강요하는 엄마에 의해 로레는 숲으로 숨어든다. 문명은 많은 것들을 자연의 이름으로 금기시하는 반면, 역설적으로 자연의 자애로움을 잃는다. 문명에 의해 비자연적인 존재로 낙인찍힌 로레를 받아주는 곳은 모순적이게도 자연이다. 그곳에서만이 원피스를 벗을 수 있다. 부모님은 다만 로레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뿐이지, 그 이름이 가질 수 있는 주체성과 젠더, 정체성 등은 오직 자기 자신 고유의 것이다. 영화의 결말, 로레는 리사에게 자신을 로레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그렇게 소개함에도 불구하고 로레는 빙긋이 미소 짓는다. 그리고 리사는 미카엘이 아니라 로레인 것을 알고도 찾아왔다. 리사에게 로레라는 이름을 긍정하면서도 자유로운 젠더를 지닐 수 있는, 그 변화무쌍한 실존의 가능성을 엿본 것일까. 온당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아이, 폭압적으로 남근의 유무를 확인하고 증명하려던 이들에 의해 울음을 터뜨리던 그 아이가 미소 지은 이유란, 오직 이 같은 해방과 자유의 구원에서만이 가능했을 것이리라. 그리고 그래야만 하리라.
“문화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계급투쟁을 내면화하게 되면 옛날의 아담처럼 자신의 언어, 육신, 취향 그리고 자신의 뿌리와 가족, 동년배, 심지어는 모국어처럼 어쩔 수 없이 묶여 있었지만 이제는 다른 어떤 터부보다도 절대적인 경계에 의해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이 모든 것들을 부끄러워하고, 그것에 대해 공포감에 사로잡히고 심지어는 증오하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
*시아마의 작품세계에서 <걸후드>의 위치
마지막으로 <걸후드>다. 시아마의 모든 작품을 살펴보면 그녀의 근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워터 릴리스> 및 <톰보이> 사이의 유사성이 목도되긴 하지만, 그런데도 연출적 기조가 많이 뒤바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초반의 두 작품이 대단히 건조한 리얼리즘을 추구했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현실을 극복하는 심미적인 이상성이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초기의 작품들과 근작 간의 교량이 되어주는 작품이 바로 <걸후드>라 할 수 있다. 본 작품의 도입부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연출적 대조, 현실과 이상성의 대비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이어지는, 이데올로기를 수정하고 다시 집필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가 목도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시작은 2.35:1의 널따란 화면비에서 슬로우 모션과 역동적인 카메라 무빙, 클로즈업을 통해서 그간 남성적인 운동으로 여겨졌던 럭비를 여성들이 강인하게 수행하는 그 운동감을 감각적으로 담아낸다. 남성들의 시선이나 개입이 포착되지 않은 본 장면에서 여성들은 오직 그들만의 유희를 즐긴다. 패자는 없다, 경기를 훌륭하게 수행한 그녀들 모두가 승자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그녀들은 즐겁다. 그녀들은 명랑하게 수다를 떨며 귀가한다. 하지만 이윽고 그녀들을 바라보는 남성 무리의 시선이 포착된다. 그들은 어둠 속에 파묻혀있어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이후 영화를 구성하던 온화하고 부드럽던 스테디캠은 현실적이고도 거친 핸드헬드로 변모하며, 그 투박한 양식하에서 여성들은 입을 다문다. 또 운동감이 상실된 고정된 카메라로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집안을 포착하곤 한다. 이러한 리얼리즘의 양식이 <워터 릴리스>와 <톰보이>에서 지배적이었다면, 도입부의 탐미적인 양식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예고하는 것이랴. 그리고 이러한 이상성을 붕괴시키는 원리로써 지브릴로 위시되는 폭압적인 남성들의 요구 및 지시, 그리고 가족과 성별 및 민족적 정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개인의 위치를 진단한다. 전작까지 시아마는 이를 냉엄하게 진단하는 수준에서 그쳤다면, 본 작품부터는 그것들이 개선되고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몸소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 내의 흑인 공동체
본 작품은 시아마의 작품 중 가장 정치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줄곧 탐구하던 여성성과 더불어, 프랑스 사회 내에서 게토화된 흑인 공동체를 다루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내의 이상성을 추구하는 몇몇 작품에서는 이민자, 유색인종 집단들이 라틴계 백인들과 융화된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쁘띠 아만다>가 이에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하네케의 <히든>이나 <해피엔드>처럼 현실성을 추구하는 작품들만 살펴보더라도, 주류 백인들과 유색인종들의 거주지가 서로 나누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작품에서도 그러한 현실을 비춰낸다. 학교 내에서는 흑인 학생들끼리 군집을 이룬다. 백인 학생은 그들로부터 적으로 여겨지거나 착취의 대상이다. 바깥에서는 오히려 그 위치가 뒤바뀌어, 백인들로부터 흑인 무리는 의심당하는 실정이다. 학교 내에서 선생은 마리엠의 뜻인 일반고 진학을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선생의 발화만을 청각적으로 담아내지, 시각적으로는 비추지 않는다. 시각적인 부재와 형식적인 발화, 그것이 곧 흑인 학생들을 둘러싼 교육 제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물론 마리엠은 성적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직업학교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는 온당 개인의 노력이나 성취만으로 이뤄진 결과물이 아니다. 시아마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 마리엠의 가정이나, 워킹맘이자 미혼모인 젊은 여성들을 비춰내며, 남성들의 방종과 제도적 지원이 부재한 흑인 공동체의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마리엠은 학업에 열중하는 것 대신, 어머니와 함께 노동이 동원되거나, 동생들을 돌본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며, 몇몇 소녀들은 일찍 어머니가 되는 모습도 포착되지만, 정작 남성들은 이에 무관심하다. 지브릴은 고압적인 태도로 마리엠에게 가족을 위한 희생을 요구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족을 위해서 어떤 희생을 짊어지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가족에게서 벗어난다 해도 뒤바뀌는 것은 거의 없다. 가족을 택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게토화된 흑인 공동체뿐이요, 더 나아간다 한들 백인 남성들이 뒤섞인 남성 권력에 귀속될 뿐이기 때문이다.
*일탈과 저항
이러한 현실 속에서 시아마는 개개인의 일탈을 통해서 본 상황을 타개해내고자 한다. 한편 영화 속에선 현실 바깥으로 향하는 일탈과 현실 내에서 행하는 저항을 구분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본 작품은 흡사 뮤직비디오, 커버 영상을 연상케 하는 탐미적이고 감각적인 시퀀스들이 포착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주로 비현실에 상응한다. 마리엠은 친구들과 함께 호텔 방에 머물며 핸드폰도 꺼버린 상태에서 일탈을 행한다. 이렇게 현실로부터 온당 단절된 공간에서 시아마의 감각적인 시퀀스가 펼쳐진다. 본능적인 노래와 춤을 표현하며 그녀들이 염원하는 자유가 포착되지만, 이는 환각적인 현실로 나아가게끔 만들어주는 담배와 술이 동원되고, 또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의 색채에 상응하는 푸른 조명을 통해서 비친다. 무엇보다 영화의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연출은 페이드아웃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숏들이 펼쳐진 이후, 영화는 페이드아웃이 사용되고 현실적인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녀들의 일탈은 현실 속에서, 그리고 현실로 이어지지 못하는 하나의 가상인 것이다. 각각의 시퀀스를 거칠게 단절시키는 페이드아웃은 지속 불가능한 그녀들의 꿈을 암시한다. 하지만 마리엠은 서서히 현실 속에서 저항을 시도한다. 페이드아웃으로 이어지는 현실에도 언제나 동경과 이상의 파랑은 자리해있다. 그녀도 파란 옷들만을 입곤 한다. 그녀들이 미니골프장에서 통념적인 규칙을 줄곧 깨트리고도, 성공적으로 골프를 치는 것이 바로 저항정신의 상징이리라. 또 마리엠은 원치 않은 노동에 대한 거절 의사를 강하게 표명하고, 더불어 그녀들은 현실로부터 단절된 호텔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인 광장에서 춤을 춘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은 하나의 연대이다. 그리고 이는 과거의 공동체와 결별한다.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가족이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교감하여 유대를 맺는 자매애, 그리고 서로의 뜻을 헤아리고 존중하는 마리엠이 속한 무리에서 이러한 시아마의 정신이 포착된다. 현실로부터 저항하는 이 같은 대안으로부터 개개인의 자유가 비로소 가능하다.
*이데올로기 너머의 이데올로기, 그럼에도…
다만 제도화되지 않은 이 같은 공동체는 결속력이나 힘이 없다. 다시금 지배적인 공동체로 그녀들은 돌아간다. 이에 마리엠이 속한 공동체는 지속해서 흐트러짐을 겪고, 하나의 꿈으로 전락한다. 마리엠의 친구가 소피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레이디라는 본인이 선택한 가명을 사용하는 것도 이와 관련될 것이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거부하고 자신이 선택한 이름을 사용하며 일탈을 시도하나, 이러한 자유는 오직 찰나로만 실현될 수 있기에,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이름으로 회귀해야 하랴. 이렇게 영화는 개인이 집단을 넘어설 수 없는 딜레마가 포착한다. 지브릴이 마리엠을 인정한 것은 흑인 공동체 내에서 승인을 받은 그녀의 공이지, 결코 개인의 성취가 아니다. 마리엠이 개인의 뜻을 바라자 지브릴은 그녀를 매섭게 겁박한다. 그 개인의 뜻은 여성이 남성의 봉긋한 둔부를 바라보고 매만지며 욕망을 주도하는 능동성이었다. 하지만 '계집애'라 멸시되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 내에서 그녀들은 늘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러한 공동체 내에서 아무리 저항을 꿈꾼다고 한들, 거기에 속하게 되는 이상 물들게 된다. 마리엠은 스스로 지브릴처럼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느 순간 동생에게 그와 똑같은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게 된다. 그리고 동생은 언니가 입은 옷을 바라며, 또 언니가 속한 무리의 부적절한 행동을 따라 한다. 즉 공동체에 속하며 이에 동화되는 것은 필연일지 모른다. 시아마가 진단한 게토화는 이러한 공동체의 특성에 의해, 계승될 것이 예고된다. 이에 마리엠은 가족과 게토를 떠나는 선택을 보여주지만, 그런데도 백인 남성과 뒤섞인 공동체와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마리엠의 선택은 개인적인 몸의 흔적들을 지워내고, 자신의 육체를 그들에게 매매한 것이었다. 구조 내에서 과연 개인은 가능한 것인가? 결국, 영화의 딜레마는 공동체나 타인에게 소속되어 나를 박탈당한 안락한 삶을 바라느냐, 아니면 홀로 놓여 고통스러운 자유를 추구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전의 작품들이 주로 전자의 상태에 놓이곤 하며 현실과 현재를 비췄다면, 시아마는 후자를 택하는 마리엠의 태도를 긍정하며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래야만 반성 된 미래, 과오 없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랴.
*정리
이렇게 본 글을 통해 셀린 시아마가 연출한 네 작품을 모두 살펴보았다. 2007년 데뷔한 이래로 그녀가 보여주고 있는 관심은 비교적 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과 청년에 대한 관심, 성장에 관한 관심, 여성성에 대한 관심, 떠돌아야만 하는 저항에 관한 관심, 그려지는 것에 대한 관심, 우리가 입어야 하는 상징적인 옷에 관한 관심이 말이다. 그리고 시아마의 이 같은 탐구의 끝은 궁극적으로 '나'를 향해 귀결되었다. 영화 속 그녀들은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 고통받는다. <워터 릴리스>에서는 타인의 눈길을 갈구하다가, <톰보이>에서는 자신의 젠더를 폭력적으로 찢어발기는 타인에 의해서 '나'들은 고통받았다. 그리고 <걸후드>에서는 이러한 타인들이 집약된 사회와 공동체에 의해 좌절되는 내가 포착되었으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역사 속에서 여성인 내가 처한 비극이 고발되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을 지키고자 한다. <워터 릴리스>와 <톰보이>에서는 그런데도 존재하는 현재의 내가 강조되었다. 시아마의 초기 스타일이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 작품이었다. 그리고 <걸후드>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나를 보여준다. 초기의 리얼리즘 사이사이에 흡사 꿈과 황홀경을 연상케 하는 탐미적인 시퀀스들이 침투한다. 이는 여성인 내가 추구하는 주체성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구상한 결과물이랴. 그곳에는 여성들을 구획하던 폭력적인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기와 질투도 존재하지 않으며, 개인은 오직 개인의 뜻을 노래하지만 서로의 삶을 존중함에 따라, 자연스레 연대와 결속도 뒤따라온다. 이렇게 최근의 시아마는 미래를, 특히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수정된 어제로부터 비롯할 내일을 예지하며, 결코 현실과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 감독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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