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GHLIGHT
이슬람 문화의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이 '여백이 없'습니다. 아랍인들은 사막과 같이 넓고 광활한 공간에서 생활하기에 빈 공간에 대한 경외감과 동시에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쉴 틈 없이 빽빽하게 공간을 메우는 장식을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라고 하는데 회화에 있어서도 이런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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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회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기로 해 놓고,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를 고민하느라 이제야 올리게 되었답니다. 이슬람은 너무도 먼 느낌이에요. 이슬람 역사에 대해 대부분 낯선 상황이니 역사가 낳는 문화에 대해선 더 깜깜이지요.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이슬람 역사에 대해 정리할게요. 어렵지 않아요.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라 오세요.
7세기경, 지금의 이란 땅에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있었어요. 지금의 터키(현재 이스탄불과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동로마(비잔틴 제국)가 있었지요. 사산조 페르시아와 동로마는 격하게 대립 중이었어요. 이 두 거인 사이에 뼈대는 실하지만 살집은 없는, 고집 센 꼬마가 살짝 끼어 있었습니다. 아라비아 반도지요. 역사는 반드시 지도를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지도를 띄워 드릴게요.

푸른 땅 덩이, 사산조 페르시아와 누런 황금 땅 덩이, 비잔틴 제국이 서로 어깨를 겨루고 '끄응' 힘을 주고 있지요. 땀이 뚝뚝 떨어지는 그 어깨 아래, 넓은 사막이 주인공이었던 아라비아 반도가 있습니다. 어쩌면 오랜 세월의 힘 겨루기로 떨어진 땀이 현재의 석유가 되었을까요? 하지만 당시엔 사막의 먼지로 눈을 뜨기도 어려운 열악한 환경이었지요. 7세기경, 사산조 페르시아는 부의 불평등이 심해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두드러졌어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지층이 불안했지요. 불안한 사회는 수많은 신을 섬기는 신전과 계층 간의 이동을 막는 사회법이 힘을 갖게 되잖아요.
이런 갈등 속에서 크고 작은 부족단위의 아라비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멀리 동쪽으로 무역을 했어요. 그런데 동양으로부터의 무역을 이루는 비단길(사막길)이 두 세력의 극한 대립으로 안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낙타를 끌고 아라비아 반도로 우회하게 되었지요. 메카라는 상업의 중심지가 생기게 된 원인입니다.

이때, 무함마드에 의해 '이슬람'이 창시됩니다. 메카(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있어요.)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음성을 듣고 창시한 이슬람은 평등과 자유를 외쳤어요. 기존 권력은 그의 소리가 몹시 귀에 거슬렸어요. 드디어 연합해 무함마드를 죽이려 합니다. 그는 622년, 한밤 중에 메디나로 몸을 피합니다. 이를 '헤지라'라고 하고 이슬람의 원년이에요. 한 밤, 몸을 피하는데 초승달이 떠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지금도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는 대부분 초승달과 별이 있답니다. 일단, 그는 메디나에서 10년 동안 포교를 해요.
흔히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한 손엔 칼을, 한 손엔 꾸란을."이라는 말로 이슬람이 무력적인 힘으로 종교를 강압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요. 이들은 열려 있었고, 평등을 외쳤고,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돌볼 수 있도록 정책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이슬람을 믿으면 세금 혜택을 주었지요. 무함마드는 이슬람 무장세력을 데리고 다시 메카로 돌아옵니다. 무함마드의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 급속히 퍼져 나갔지요. 이후 30년을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라고 합니다. 정통 칼리프 시대에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어요. 시아파는 칼리프의 자격을 무함마드 직계만을 인정하는 이슬람이고 수니파는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칼리프가 될 수 있다는 이슬람이에요. 지금은 역사 시간이 아니니 간단히 훑고 지나갈게요.. 어쨌든 이슬람의 확장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을 초래하지요.
정통 칼리프 시대가 가고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에 이르러 이슬람 건축양식이 확립됩니다. 지금의 첨탑, 벽감, 분수대, 마끄수라(왕족들이 사용하는 개인 예배실), 돔, 본당 회중석 등이 이슬람 사원의 특징으로 자리잡지요. 학자들에 따르면 이슬람 이전 시기에 아랍인들에게 '예술'이라고 할 만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해요. 이슬람에 의해 사산조 페르시아가 망하고 난 후, 비잔틴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들 자신의 예술이 발달하게 되지요. 지난번에 얘기드렸듯이 회화는 발달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인간과 동물, 즉 살아있는 것들의 재현은 신(神)의 특권이며 이러한 생명을 그린다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여깁니다. 생물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신의 영역이고, 신만이 창조하며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영역을 넘보는 자는 마땅히 지옥불에 던진다고 했으니까요. 이슬람 회화는 무슬림이 아닌 화가들에 의해 간간이 이어져 옵니다.
"신은 작은 미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으며 신의 품속에서 모든 것은 의미가 있다."
우상숭배를 절대적으로 금하고 복종을 요구했던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슬람을 믿는 자)들은 알라의 초월적이고 무한한 본성을 상징하는 아라베스크(arabesque)를 발전 시킵니다. 추상적이고 조형적인 언어로 내세를 기원하고 현세를 위로했지요. 발달한 아라베스크는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는데 슈만은 피아노 소곡, 작품번호 18번을 '아라베스크'라고 이름 지었고, 한 발로 서서 한 손은 앞으로, 한 손은 뒤로 뻗는 발레의 자세(오른쪽)를 아라베스크라고 부른답니다.

우마이야 왕조에 이어 아바스 왕조(750~1258)가 들어섭니다. 이 시기가 이슬람 문명이 가장 화려하게 발달했던 시기예요. 이슬람 건축과 서체, 장식미술, 카펫 등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특히나 서체는 그 자체로 가치있는 예술로 부상해 이를 바탕으로 캘리그래피가 발전합니다. 한자에 여섯 가지 서체가 있듯, 10세기 경 아라비아 문자는 힘차고 강건한 느낌을 주는 쿠파 서체가 중심을 이뤄 공문서에 쓰이게 됩니다. 11세기에 이르러 부드럽고 우아하며 곡선의 아름다움을 강점으로 하는 나스히 서체가 크게 유행하지요. 이후 탈릭체나 나스탈릭체와 같이, 각 서체의 강점들을 모아 새로운 조형미를 담아냅니다.
글자가 갖는 아름다움, 환상적이지요. 글자가 포함하는 뜻만이 아니라 형태 자체에서 신을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이 시기에 아라비아 문자는 예술로서 거듭납니다. 예술에 대한 건 아니지만, 부연하자면 이 아바스 왕조 시기에 셀주크 튀르크의 침략을 받아 종교적 최고 권위는 '칼리프'라 칭하여 아바스 왕족이 유지하고, 군사적 정치적인 권력은 '술탄'이 갖게 됩니다. 아바스 왕조 멸망 후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세계를 평정할 때, 술탄은 정치와 종교를 모두 상징하고 대변하는 명칭이 됩니다. 그리고 이 술탄은 장자승계가 아니라 자식들 중 가장 강한 아들이 무혈투쟁을 벌여 쟁취하게 됩니다.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살해하지요. 딴 데로 샜네요.

회화는 아랍인들에 의한 이슬람 시기(632~1258)보다 13세기 이후 아랍인이 아닌 새로운 정복자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확장시킨 역사에서 시작합니다.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린 셀주크 튀르크, 13세기의 몽골 후예가 세운 일 한국, 티무르 제국, 사파비 왕조, 그리고 오스만 제국, 델리 술탄 왕조, 인도의 무굴제국으로 거대한 이슬람 문화가 퍼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회화를 들여다볼까요? 그럼 무수히 이어져 내려오는 시간 동안, 이슬람의 화가들은 창조에 대한 열정이 없었을까요? 아니면 화법이나 기교가 부족했을까요? 그럴 리가요. 그토록 금기되었던 회화임에도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그린다'는 건 본성일지도 모르겠어요. 흠모하는 대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해지자 이슬람 화가들은 자구책을 강구합니다. 이렇게요. "난 그냥 그리는 게 아니야. 이유가 있다고." 하고 말이죠. 그림의 용도를 만들고 그 용도 안에서 최소한의 개성을 드러냅니다.
서양미술과 이슬람 미술의 차이를 가장 쉽고 단적으로 나타내는 건 그림의 독립성 여부입니다. 서양미술이 캔버스 회화라면 이슬람 미술은 책 안에 있는 회화입니다. 삽화처럼 끼어져 있습니다. 당연히 화가 미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처음은 역사서나 과학, 의학서적에 그림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시작합니다. 중세 초기의 그리스 문명을 받아들여 보존시킨 이슬람은 활발한 상업활동과 교류를 통해 동양의 과학과 의학도 소화시킵니다. 이 둘을 접목시켜 자신들의 연금술, 수학적 깊이를 만들어 나가지요. 십자군 전쟁 때만 해도 서양의 의학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다친 병사들의 팔, 다리를 자르는 것이 예사였지요. 하지만 이슬람 병사들은 의사들의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을 수 있었고 그들은 이것을 삽화로 남깁니다.
라시드 앗 딘 <집사> 중 화가 미상 "성을 포위한 몽골 군대" , 1315년 / 출처: <나의 첫 이슬람 수업> 이희수
알 수피 <항성에 대한 책> 중 화가 미상 "안드로메다 자리" 1009 / 출처" <나의 첫 이슬람 수업> 이희수
일 한국(1220~1335년 경)을 거쳐, 인주 왕조(1303~1357)와 무자 파드 왕조(1335~1393)를 거치며 이슬람이 강성했을 때 쉬라즈 화풍이 등장합니다. 관용은 힘이 있을 때 나옵니다. 강했던 그들은 화가들의 붓에 약간의 자유를 허락합니다. 쉬라즈 화풍은 유치원 어린이들 같습니다. 상쾌, 유쾌, 경쾌, 발랄, 그리고 화폭이 통통 튑니다.
나사르 알라 <칼릴리와 딤나> 중 화가 미상 "사란 디브의 목수와 불륜을 저지르는 그의 아내", 1333년 / 출처: <나의 첫 이슬람 수업> 이희수
꽃이 엄청 크지요. 불륜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천진, 발랄합니다. 어두운 그늘은 찾을 수 없습니다. 삶의 환희에 젖은 두 사람과 이를 지켜보는 느긋한 관자(觀子)가 있을 뿐입니다. 설마, 남편은 아니겠지요? 이어 등장한 무자 파드 양식은 쉬라즈 화풍에 비해 자의식이 강합니다. 얼굴은 크게, 흰색 위에 빨간 고깔이 있는 터번을 꼭 그립니다. 풀이나 꽃이 가득하고 바탕을 꽉 채웁니다.
이슬람 문화의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이 '여백이 없'습니다. 아랍인들은 사막과 같이 넓고 광활한 공간에서 생활하기에 빈 공간에 대한 경외감과 동시에 공포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쉴 틈 없이 빽빽하게 공간을 메우는 장식을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라고 하는데 회화에 있어서도 이런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고, 이 모든 것에 제각각 마이크를 주다 보니 화면 안이 웅변 하는 연사들로 가득 찹니다. 원근감이나 입체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평선은 그려야 할 소재에 밀려, 자꾸 자꾸 위로 올라갑니다.
니자미 <캄사> 중 화가 미상 "마즈눈을 방문한 그의 아버지" 14세기 후반 / 출처: <나의 첫 이슬람 수업> 이희수
13세기, 화려한 예술이 꽃피우기 직전, 이슬람은 몽골의 침입을 받습니다. 유리와 도기 등의 공예예술이 세계 최고에 이르렀던 이슬람은 약탈과 파괴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의 위대함은 거친 침략자들의 눈조차 맑게 한 것일까요?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찬란하고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후원하고 성숙시키기 시작합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 사상과 예술이 접목됩니다. 이슬람 문화는 더욱 넓고 깊어집니다. 뒤이은 잘라이르 왕조(1336~1432)는 쉬라즈 화풍과 무라파드 양식을 합해서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확대됩니다. 이 시기의 바그다드는 전 세계 학문과 도서의 대부분이 집결한 지식의 메카가 됩니다. 철학, 수학, 화학이 발전합니다. 강성한 시기에 창조하고 싶은 욕구와 종교의 금기 사이에서 줄다리기해야만 했던 이슬람 화가 중 화가의 개인 서명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주나이드'가 나타납니다.
크와주 케르마니 <시선집> 중 주나이드 작 <주나이드. 후마윤 공주의 성 앞에선 후 마이 왕자>, 1396
작은 책자 안에 꼼꼼하고 섬세한 그림이에요. 공주는 달덩이 같은 동그랗고 통통한 중국 여인입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게 여실히 드러나지요. 역시 중국의 공주는 후덕함을 미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미인에 대한 시대의 관점이 몹시 다르지요? 저도 15세기에 태어났다면 아주 미인 소리를 들었을 거예요. 헤~~ 혹시... 시대를 거스르고 싶으신가요?
아래 그림을 보시겠어요? 회화를 금했던 이슬람의 그림이 '용도'라는 자구책을 만들었다고 했지요? 왼쪽 그림은 결혼식 풍경입니다. 각 부분을 펼치듯 보여주며 당시의 상황을 하나하나 이야기해 줍니다. 조선의 화가들이 궁귈의 행사를 그려 기록으로 남긴 것과 같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바탕은 밝고 천진한 쉬라즈 화풍, 배경은 꽃 많은 무자파드 양식입니다. 일곱 공주를 찾아가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용도) 낭만적인 그림입니다. 지금의 남자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그림이군요. 사랑하는 사람에겐 꼭 선물을 주라는데요.^^ ㅎ 이슬람 화가들은 그림의 쓰임을 드러냄으로 종교의 채찍을 피해 갔습니다.

하나 더 볼까요? 몰래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에 좋은 시간은 언제일까요? 역시 밤이겠지요?^^ 희미하게 달 떴습니다. 어디 있냐고요? 왼쪽 위쪽을 보세요.
갑자기 신윤복의 <월하정인>이 겹쳐지네요.
(왼) 크와주 케르나미 <시선집> 중 주나이드 <정원에서 후미 윤 공주를 만나는 후 마이 페르시아 왕자>
(오) 신윤복 <월하정인>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튀르크(당시의 계통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 현재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너집니다. 비잔틴 제국에서 계승하고 보존했던 그리스 문화를 온전히 이슬람에서 수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 플라티누스의 사상을 발전시켜 알라에 대한 믿음이 철학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이제 알라는 절대적, 유일한 지위를 얻습니다. 비잔틴을 무너뜨린 오스만은 지중해와 중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술탄의 발아래 무릎을 꿇지 않는 이는 없습니다. 제국이 성큼성큼 내달리자 문화는 날개를 답니다. 우아하고 커다란 날갯짓으로 이슬람은 도약합니다.
이슬람 회화는 익숙하지 않지만 '페르시아 세밀화'는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화폭을 구성하는 것이 특징이지요. 평면적, 투시적이고 그늘진 곳이 없습니다. 정선이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듯 그렸던 <금강산 전도>를 떠 올려 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게다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그림에 도입합니다. 화가는 화면의 어디든 모르는 곳, 모르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인물들 또한 동시다발로 자신의 심정을 말하지요.
이제 중국의 지배에 들어간 티무르 왕조(1469~1506)가 헤라트로 옮깁니다. 드디어 우리나라로 치면 '정선'급의 '바흐자드'가 나옵니다. 바흐자드 이전의 화가들은 그를 모방하고 완성하기 위해, 바흐자드 이후의 화가들은 그를 넘어서기 위해 평생 그의 그림을 우러르고 그의 이름을 사모하다 죽습니다.
(왼) 사디 <부스탄> 중 바흐자드 "유스푸의 유혹", 15세기
(오) 나자미 <오부작> 중 바흐자드 "까와르나끄 성의 건설", 1494~5년, 출처: <나의 첫 이슬람 수업> 이희수
줄라이하는 유부녀입니다. 그녀는 젊은 유수푸를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를 유혹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초대합니다. 그리곤 그녀는 방을 지날 때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지요. 일곱 번째 방에서, 드디어 덮칩니다. 유수푸는 신실한 자였어요. "하나님, 저는 죄를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때, 갑자기 모든 방문이 열리며 유수푸가 벗어납니다. 위쪽에 도망가는 유수푸가 보이지요? 기하학적 모티프로 방과 계단을 구성하였고 방마다 다른 문양들이 이슬람의 아름다운 건축을 보여줍니다. 나중 줄라이하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부끄러워 갑자기 늙어 버립니다. 하지만 신께 용서를 받게 되어 다시 고운 여인의 모습이 돌아오지요. 결론은 줄라이하의 남편이 죽고 결혼하는 걸로 끝납니다. 아랍인들의 긍정적 세계관일까요? ^^
비흐자드의 위대함은 그간의 이슬람 회화가 조형적, 회화적 요소를 무시하고 기록화 위주로 이어져 왔다면 색, 형, 원근, 명암, 주제의 다양성을 확보하면서도 신에 대한 경배를 드러낸 것입니다. <알렉산더와 일곱 왕자>라는 작품에는 그 작품에 그려진 인물들이 당시의 대신들(일종의 정치인)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실제 사람의 얼굴을 역사의 기록 속으로 끌어 와 새로운 초상을 만든 것이지요. 바흐자드가 아니면 감히 꿈꿀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티무르 왕조가 망한 뒤 토착 이란계 사파비 왕조가 들어섭니다. 사파비 왕조 때, '세밀화의 원조'라는 명성에 걸맞은 페르시아 최고의 화려하고 고품질의 책이 만들어집니다. 사파비 왕조는 비흐자드를 아낀 술탄이 비흐자드를 동굴에 감춰서까지 회화를 이어갔으니까요. 이제 한번 타파된 금기는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비흐자드의 붓을 보고 자란 천재들은 기존의 질서를 흔들며 또 다른 천재로 뒤를 잇습니다. 샤 타흐마스프 1세 때, 이슬람의 카라바조 '술탄 무함마드'가 등장합니다. 그는 상당히 괴짜였다고 해요. 그가 그린 작품입니다. 인물들의 표정은 정형화되어 있고 다소 딱딱하지만, 생생하고 독보적인 색감은 기존과는 다른 느낌을 전달합니다. 신과 사회가 주는 압력을 버티며 낯설지만 아름다운 것을 향한 그의 시선이 오래고 힘겨운 시간을 지나 지금 제네바에서 쉬고 있습니다.
(왼) 니자미 <함사> 중 술탄 무함마드 작 "예언자 무함마드의 승천", 1540년
(오) 피르도우시 <샤흐나마> 중 술탄 무함마드 작 "가유마르스의 궁전", 1525~1535년
왼쪽의 그림은 인간의 얼굴을 한 말, '부라크'를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고 있는 예언자를 그리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불꽃으로 나타내었군요. 하늘에서 천사들이 마중하고, 대천사 가브리엘은 서둘러 그를 영접합니다. 예언자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서였을까요? 이 그림은 페르시아 세밀화의 마지막 스러지는 불꽃이 되었습니다. 신의 눈으로 본 것을 인간의 손이 그렸던 화려하고 풍요로웠던 세상은 술탄의 지원이 끊기자 염료를 담은 통은 굳었고 붓은 털이 빠졌습니다. 밀려드는 서구의 유화는 세밀화의 전통에 익숙했던 화가들의 손을 혼란스럽게 했고, 곧 그들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이슬람 화가들은 자의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술탄의 영에 따라, 또는 시대의 주문에 따라 그들의 미적 재능과 기교를 헌사했습니다. 하지만 그 통제 속에서 개개인의 독자적 형식을 추구함으로 저항했습니다. 자신의 주제를 갖고 싶었던 그들은 알라의 축복을 담은 화려하고도 세밀한 꽃과 영원을 지향하는 무늬와 그 틈새 속에 표현을 향한 자유의지를 우리에게 남겨 놓았습니다.
2006년 '오르한 파묵'은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작품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합니다. 수상 이유로는 "고향 거리의 우울한 영혼을 탐구하는 가운데 문명의 충돌과 혼합과 새로운 상징을 발견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심장인 이스탄불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스탄불은 인류 문명이 펼쳐지고 접힐 때마다 신이 움켜 쥔 도시입니다. 이성과 신앙이 연거푸 합을 겨루었고, 근대의 허파로 이식하기 전, 중세 천년은 이 요새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거렸습니다. 1453년, 오리엔트의 대포가 비잔틴의 지루했던 숨통을 끊자 이스탄불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내 이름은 빨강>은 그들의 이야기, 낯설고 신비로왔던 이슬람의 회화사를 담고 있습니다.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글.안노라_역사를 그림으로 푸는 안노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