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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래 현대미술 동향에서 작가들이 타자, 통제 대상, 권력 구조 안에 놓인 여성의 몸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특히 다수의 여성예술가-지나 판(1939-1990), 발리 엑스포르트(b.1940), 마리나 아브라모비치(b.1946), 오를랑 테크노바디(b.1947)-들이 작가 자신의 몸을 직접적으로 제시하며 작품화하는데, 이들은 자신의 육체를 훼손·변형하는 특징을 보인다.
1960·70년대는 페미니즘 역사에서 제2물결의 시기였다. 베티 프리던이 1963년에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를 출간하고, 그가 창설한 ‘전미여성조직(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은 최초의 전국규모 여성운동이 된다. 여성의 기본권에 집중한 제1물결과는 달리, 제2물결 운동에서는 가정폭력, 성폭력, 인종차별, 피임문제가 주요 쟁점이 되었다. 정치적인 입장의 개인화로 페미니즘은 하나의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예술가 자신의 육체와 사적이고 일상적인 행동은 여성 미술의 주제이자 매체 자체가 된다. 여성예술가의 작품에서는 작가의 퍼포먼스 행위와 비디오 매체의 수용으로 육체가 직접적으로 작품화 되었다. 여성해방의 논의가 활발했던 만큼 여성예술가가 이제까지의 여성억압의 사회 분위기를 풍자하거나 전복하는 작품들이 제시되는데, 캐롤리 슈니먼, 쿠보타 시게코 등 여성예술가들의 자신의 신체를 이용한 퍼포먼스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퍼포먼스 작업들은 당시 여성 해방적 분위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작가의 주체성 강조와 동시에 여성적 발화의 장이 된다.
여성작가가 자신의 몸을 문제 제기의 장으로 삼는 작품은 성에 따라 나뉘는 분노 표출 방식의 차이와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공격성은 자신이나 문제 자체로 향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 그 행위를 목격하는 이가 있는 경우, 그 공격성은 수동성을 띤다. 타인이나 바깥을 향해야할 공격성이 작가 자신을 거쳐 행위의 관람자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관람자 또한 자해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굴절된 공격에 내적으로 상처를 입게 된다. 이때의 공격성은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작가가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한 작품은 사회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여성의 몸이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당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해 작가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작가가 여성인 자신의 몸으로, 또는 대상으로 행하는 예술에서 작가의 몸은 주체이자 객체로서의 여성의 몸을 제시하며 분노의 표출에 직접적인 행동을 한다. 예를 들어 마사 로슬러는 <부엌의 기호학 Semiotics of the Kitchen>(1975)에서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인물 같이 등장해 알파벳 순서대로 조리 기구들의 이름을 읊어나간다.(그림 1) 여기서 특이한 점은 누군가를 공격하려는 듯이 기구들을 휘두른다는 점이다. 주부로서 친숙한 여성의 이미지로 분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서있지만 이전의 주부에게 기대되는 이미지와는 상반된 행동을 하는 로슬러의 행동에서 전복이 일어나는데, 가정에 헌신하고 주방의 노예로 살았던 주부의 분노, 그리고 그가 보이지 않는 구시대적 가치들과 싸우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림1 Martha Rosler, Still from Semiotics of the Kitchen, black and white, 6min, 1975
이 시기 제작된 여성적 공격성이 드러난 작품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자신을 위험 속에 방임하는 자기방임과 자신의 육체를 직접적으로 해하는 상처내기이다. 이 두 가지 방식은 각기 다른 방식의 자해행동으로 동일 선상에 있다. 두 행동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당혹감과 불안감을 유발하며 수동공격적인 측면을 가진다는 데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여기서 구분되는 것은 해를 끼치는 직접적인 주체이다. 자기방임의 특징을 띠는 작품에서는 관람자가 작가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가하거나 작가가 처한 상황에서 그를 보호할 수 있지만, 상처내기에서는 작가 자신이 자해행동을 하는 경우를 뜻하며 관람자의 경우에는 작가의 행위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 된다. 이 두 가지 방식에서 여성의 분노와 공격성이 드러나는 방식을 확인하고자한다.
1. 자기방임
자기방임은 존재할 수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행동을 의미한다. 작가 자신이 신체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기에 관람자의 참여가 특징으로 두드러진다. 위험에 대한 노출에서 작가는 수동적인 태도로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모라 스튜디오에서 실행한 <리듬 0 Rythm 0>(1975)과 같은 형식이다. 포크, 향수 한 병, 설탕, 도끼, 종, 깃털, 체인, 바늘, 망치, 톱 그리고 총 등 72가지의 물건이 놓인 탁자 앞에서 아브라모비치는 6시간 동안 가만히 서있었는데, 행위 중 관객이 자신의 신체에 어떠한 행동을 해도 저지하지 않았다.(그림 2) 군중들은 아브라모비치를 보호하려는 쪽과 그저 유희거리로 여기는 쪽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3시간 만에 아브라모비치의 옷이 벗겨지고 후에 장전된 총이 작가의 목에 겨눠진다. 작가는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고 장시간의 퍼포먼스를 끝낸다. 비슷한 예로 오노 요코의 <컷 피스 Cut Piece>(1974 도쿄, 1975 뉴욕)를 들 수 있는데, 이 때 관중들은 가위로 작가의 옷을 잘라서 가져갈 수 있었다.(그림 3) 아브라모비치와 오노의 퍼포먼스는 굴욕적이고 위험한 상황-몸이 노출되거나 상해를 입을 수 있는-에 자신을 노출하고 반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림2 Marina Abramović, Rhythm 0, 1975
그림3 Yoko Ono, Cut Piece, 1975
관객의 개입이 작가에 대한 공격이 아닌 구원의 의미를 지니는 작품도 존재한다. 아브라모비치가 별모양의 불길 속에서 의식을 잃을 때까지 누워있었던 <리듬 5 Rhythm 5>(1974)와 산업용 고속 선풍기의 강한 바람에 얼굴을 마주하고 기절했던 <리듬 4 Rhythm 4>(1974)에서는 작가를 구해내는 관람자의 개입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그림 4, 5) 각각의 퍼포먼스에서 기절한 아브라모비치를 위험에서 구해낸 이들은 작품을 관람하던 이들이었다. 대중은 이를 순수한 퍼포먼스로 넘길 수 없었고 퍼포머와 관객의 사이에 놓인 연극의 전통을 존중할 수 없었다. 아브라모비치는 “관객들이 작가가 필요로 하는 관심을 주기 직전까지 얼마나 자신을 내버려두는지”에 대해 대중들을 시험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방임의 형식을 갖춘 작품 속에서 관람자의 필요성이 확인된다. 작가는 자신을 방임하고 있지만 관객들을 대동하고 있으며 관객은 작가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지만 작가가 처한 위험에서 구해낼 수 있는 이중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리듬 0>에서도 두 부류의 관객 중 하나는 아브라모비치를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작가가 계획하고 만들어낸 상황이지만 폭력적이거나 위험한 사태를 지켜두고 볼 수 없는 이들이 이러한 부류를 맡게 될 것이다.
그림4 Marina Abramović, Rhythm 5, 1974
그림5 Marina Abramović, Rhythm 4, 1974
이러한 형식의 작품에서 작가의 신체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관람자의 손에 달려있으며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권한 또한 관객에게 있다.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위험한 물건들을 제시함으로서 작가는 자신의 신체적 위험에 대한 가능성을 촉발시키며 이는 자해의 개념과 연결된다. 작가가 자해의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고 능동적 공격과 방조 또는 구원의 책임을 관중에게 돌림으로서 작가의 몸은 배경, 객체, 대상이 된다. 1970년대 초반 예술가들이 몸을 물질로 다루었던 경향과도 관계있지만, 여성예술가들의 경우 페미니즘의 기류 속에서 여성의 몸을 다시 한 번 관객의 통제 속에 놓는 행위를 통해 사회 구조 속의 여성 억압을 환기하는 의미를 지닌다.
발리 엑스포르트는 <성기 공포 Genital Panic>(1969)에서 자기방임적인 모습을 보이면서도 관람객들에게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가랑이를 오려낸 바지를 입고 기관총을 둘러맨 채 뮌헨의 성인 영화관에 들어가 진짜 여자의 성기가 여기에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선언한다.(그림 6) 후에 엑스포르트는 루스 애스키와의 인터뷰에서 “…관능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았다…나는 겁이 났고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한 줄에서 다음 줄로 이동하는 사이 각 줄에 있던 사람들이 말없이 일어서서 극장을 떠났다. 영화의 맥락 밖에서, 그들이 특별히 에로틱한 상징에 관계하는 방식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엑스포르트는 사타구니를 드러냈지만 기관총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관객을 대한다. 그의 과거 작업인 <두드리고 만지는 영화 Tap and Touch Cinema>(1968)에서 가슴을 영화관처럼 꾸미고 관객을 맞이했던 태도와는 상이한 모습이다.(그림 7) <성기 공포>에서의 기관총이 <두드리고 만지는 영화>에서의 영화관 커튼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엑스포르트는 여성, 즉 대상으로서의 나체를 드러냈지만 관객의 접근은 들고 있던 기관총의 위협적인 특성으로 저지하고 있다.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선언은 자기방임적인 태도를 보여주지만 기관총으로 관람객을 위협하는 역할도 한다. 무장을 한 상태였지만 겁이 났다는 그의 회고에서 <리듬 0>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컷 피스>의 오노 요코 같은 자기방임적 퍼포먼스 중 여성작가의 심리를 확인 가능하다. 통제 불가한 대중 앞에서 자신의 몸이 타인의 통제 대상이 된다는 것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림 6. Valie EXPORT, Genital panic, 1969
그림 7. Valie EXPORT, Tap and Touch Cinema, 1968
위 작가들은 대상으로서 여성의 몸과 그 위치를 자기방임적인 태도를 다시금 환기하며 여성의 육체가 몸을 소유한 여성의 것이 아님을 확인시킨다. 여성의 몸의 주인은 관람객으로 대표되는 타인이며 타인이 몸을 이끄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변형되는 자신의 몸을 관망한다. 조용한 방식으로 여성의 대상성, 객체성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에서 여성적 분노와 공격성은 굉장히 수동적이며 작가는 관람객 중 일부에게서 작가의 몸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관람객에게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상처내기
작가가 능동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에 상해를 내는 방식인 상처내기는 자기방임적인 형식의 작품보다 계획적이며 작가의 의지, 방향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지나 판은 <자화상(들) Autoportrait(s)>(1973) 1부 퍼포먼스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채 누운 자세로 공중에 매달려 여러 개의 촛불 위에서 30분 동안 있었다.(그림 8) 2부 퍼포먼스에서 관객을 등지고 면도칼로 손톱 주변의 살갗과 입술을 베어내는 행위를 한다.(그림 9) 2부에서 관객에게 보이는 것은 벽면에 걸린 손톱을 칠하는 여성들의 사진과 무언가를 하는듯한 판의 뒷모습이다. 벽면에 걸린 사진처럼 손에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 같지만, 확실하지 않다.
관객이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뜨거운 불 위에서 30분을 버티고, 관객들을 등지고 서서 살을 저미는 행동은 관객과의 소통을 완전히 거부하는 행동이다. 관객들은 불 위의 판을 끌어내릴 수 없었으며 손톱을 칠하는 사진은 손톱 주변을 베어낸 판의 행동과 유사하여 이 사진으로 인해 판이 어떠한 행동 중인지 잘못 유추하기 쉽다. 판은 이미지를 제시하여 행동을 왜곡하며 입술을 긋는 행위로 대화의 부재, 소통의 거절을 나타낸다. 여기서 상처내기 작업의 작가의 계획성과 방향성이 두드러진다.
지나 판은 1968년부터 1978년까지 자신의 육체를 예술작업의 중심에 놓고 자해의 형식을 취하는데, 그는 “상처들은 (이) 육체, (이) 삶을 나타내는 실질적인 기호였다…그것을 전면에 세우지 않고서는, 베일과 조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육체의 이미지를 재구성하기란 불가능했다…육체는 (인간)에게서 더 이상 축소시킬 수 없는 핵이며, 가장 연약한 부분이다. 육체는 모든 사회 체계에서, 역사의 어떤 순간에도 항상 그렇게 존재해왔다. 그리고 그 상처는 육체에 대한 기억이다. 그것은 육체의 연약함, 고통, 따라서 (현실적) 존재를 기념한다…”라는 인터뷰를 한 바 있다. 판의 상처내기는 육체의 연약함과 현존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림 8. Gina Pane, the First segment of Autoportrait(s), 1973
그림 9. Gina Pane, the Second segment of Autoportrait(s), 1973
발리 엑스포르트의 <...리모트...리모트... ...remote...remote...>(1973)는 판의 <자화상(들)>과 비슷한 면을 공유한다. <...리모트...리모트...>는 약 10분 정도의 짧은 영상으로, 부모의 학대로 경찰에 인계된 두 아이의 사진이 걸린 벽면 앞에 엑스포르트가 우유가 든 그릇을 들고 앉아있다. 영상에서는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반복되고, 카메라는 작가의 눈, 그리고 사진 속 아이들의 눈을 번갈아가며 찍는다. 곧 엑스포르트는 손에 든 커터칼로 손톱 주위의 살을 긁어내기 시작한다.(그림 10) 피가 나는 손과, 우유로 번지는 핏물을 클로즈업으로 강조하는 카메라, 그리고 연신 무언가 부딪히는 배경음악에서 관람자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그림 11) 고통을 느낌이 분명함에도 손톱 주위의 살을 물어뜯으며 무표정으로 임하던 작가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동안 가려져있던 배경의 사진에서 아이들의 꽉 잡은 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에는 “혈흔 Blutspuren”이라는 텍스트가 첨부되어있다.
“인간의 행동은 과거 사건의 영향을 받으며 그 경험들이 먼 훗날에까지 남아있기도 한다. 따라서 객관적인 시각과 나란히 진행되면서 불안과 죄의 기도, 즉 살갗을 찢는 변형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인 의사(擬似) 시간이 존재한다. 피부의 상처에서 인간의 자기묘사에 관한 드라마가 행해진다. 나는 그것을 가시화함으로써 현재 속의 과거와 과거 속의 현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위 텍스트에서 <...리모트...리모트...>가 아이들의 사진과 관계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자해행위를 통해 학대를 당한 아이들의 불안한 미래를 가시화한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피부에 상처를 내는 작가의 경우, 자기묘사적 측면을 보여주며 자해행위가 그가 겪은 과거 사건에 의한 결과라는 암시와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가는 학대라는 사건에 대한 분노와 그에 따른 공격성을 스스로 상처를 내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관람자를 불안하게 만드는 여러 요소-소리와 클로즈업 기법-는 작가의 자해행위를 목격하는 이들을 긴장 상태로 몰아넣지만 비디오라는 매체의 특성 때문에 관람자의 개입 여지는 없다. 관람자는 작가가 계획한 수동적 공격성을 띠는 영상을 관람하고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유에 손을 담갔다가 빼는 행위는 치유의 의미도 담고 있지만 클로즈업 기법으로 보이는 피와 우유색의 대비로 자해행동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엑스포르트는 아동학대사건에 대해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행위라는 측면으로 공감하고 있으며 여기서 자해는 불안한 심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사용된다.
그림 10. Valie EXPORT, Still from ...Remote...Remote..., color, 10min, 1973
그림 11. Valie EXPORT, Still from ...Remote...Remote..., color, 10min, 1973
엑스포르트의 <육체 기호 행위 Body Sign Action>(1970)는 허벅지에 스타킹의 가터벨트 모양의 문신을 새긴 퍼포먼스 작업이다.(그림 12) 엑스포르트는 이 작업에 대해 “가터는 억압된 성의 심볼과 과거의 노예제를 의미한다. 조건적 행동을 요구받는 계층의 표시로 작용하는 가터는 여성성에 대한 주체적 결정과 여타의 결정을 촉구하는 기억이 된다…몸은 주체적 결정을 위해 분투하는 전쟁터가 된다.”고 소개했다.
그림 12. Valie EXPORT, Body Sign Action, 1970
문신은 영구적 신체 변형이며, ‘자연’ 상태의 피부를 바늘로 찔러 잉크를 주입하는 행위는 고통을 유발한다. 가터는 스타킹을 고정하는 장치이며 흔히 섹슈얼한 이미지로 소비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신체, 특히 여성의 몸은 사회·정치·문화의 장이다. 정윤희는 문신을 “기존 질서가 아닌 ’다른‘ 질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자 일종의 저항을 의미”한다고 했다. 발리 엑스포르트는 여성예술가로서 자신의 피부에 육체적·성적 속박의 도구인 스타킹을 고정하는 버클을 새겨넣는데, 이는 폭력성과 (남성의)욕망을 가시화했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속박의 모티프를 퍼포먼스의 형식으로 그려넣으며 관람자들에게 억압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육체를 강조한다. 여기서의 공격성은 굴절된 모습으로 문신의 자학적인 성격에서 드러난다.
상처내기를 통한 작업에서 작가들은 계획된 상해를 가하고, 자기방임과는 달리 관람객들은 작가의 행위를 관망하는 위치가 된다. 작가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대상화·물질화하며 상해를 가할 수 있는 권한도 작가에게만 존재한다. 엑스포르트와 판은 살을 찢어 흐르는 피를 실시간으로 보이며 여성의 육체를 한 명의 개인으로 확인시킨다. 이들은 자기가 자신을 해하며 주체성을 가진 개인임을 확인시키고, 관람자가 받을 두려움과 충격으로 문제 인식과 해결을 촉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화상(들)>과 <육체 기호 행위> 같이 작품의 형식이 실시간으로 관람객들 앞에서 진행되는 퍼포먼스일 때에 자해행위가 주는 긴장감은 여성의 육체를 둘러싸고 있던 기존의 인식에 대한 고발적인 메시지에 대한 효과를 두드러지게 한다.
여성예술가의 몸은 그가 ‘여성’이며 ‘예술가’라는, ‘대상’이며 ‘발화’한다는 상충되는 의미를 가진 장소이다. 발화하는 주체적인 입장이지만 대상으로서 여겨져 온 여성의 몸으로 이들은 분노에 수동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제까지 여성에게 기대해온 가치가 그랬듯 가만히 앉아서 자신을 방치하거나 소극적 분노로 자해의 형식을 띤다. 이러한 여성적 분노와 공격성은 예술가의 몸을 둘러싼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한 작업들에서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정치적·사회적 특수성으로 그 공격의 형식이 외부를 향하고 있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강한 고발과 전복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성예술가는 언제까지나 여성의 몸을 갖추었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관람자들의 경우, 상처내기의 형식을 가진 작품에서 이들은 신체 훼손과 폭력을 행한다는 작업의 방식과 그 이미지를 목격함으로 이미지가 가진 그로테스크함에 거부감을 느끼고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술가의 자기방임적인 작품에서는 관람자가 작가를 해하거나, 보호하는 위치로 설정되기도 한다. 관람자는 작가의 행위를 관망하거나 때로는 작품에 개입하며 예술가가 계획한 실험,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일부 관람자들은 자기방임적인 형식의 작품에서 여성예술가의 나체를 드러내려는 짓궂은 시도를 한다. 그들에게는 아직까지 여성의 육체는 성적 대상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비단 그것이 예술가의 퍼포먼스라고 해도 말이다. 여성예술가의 몸이 정치적·사회적 고발의 의미를 가지는 순간이 바로 이러한 굴욕을 감수할 때이다. 여성예술가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취급된다.
예술가의 몸은 예술가의 것이기 이전에 인간 모두가 가지고 있는 육체임이 우선되어야 한다. 여성예술가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몸’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그들이 표현하는 바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닌, 전 인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여성예술가들이 여성인 자신의 몸을 작품화함에 있어 더욱 강력한 고발의 의미를 가지지만, 이들이 말하는 사회의 억압과 외적인 기준, 타인에 의한 폭력 등은 비단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아야한다. 그들 작업의 맥락을 페미니즘적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들을 ‘여성예술가’라는 프레임에 한정해서 해석하는 시선은 짓궂은 관객들의 장난과 같은 층위를 공유하고 있을 뿐이며 그들의 작업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를 축소시키는 소극적인 태도이다. 여성예술가가 직접 자신의 몸을 사용하여 예술작품으로 발화하며 공격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될 때에, 그리고 그들의 몸이 단순히 전시 대상이 아닌, 의식을 잃거나 피를 흘릴 때에 그들 또한 남성과 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여성예술가가 인간의 몸, 현 사회를 투영하는 창으로서 제시하는 문제를 여성만의 것이 아닌, 전체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여성의 몸은 정치적 함의를 완전히 벗어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며, 여성적 분노와 공격성의 특징인 수동성은 여성이 갖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상 오래도록 특징으로서 남으리라 생각한다. 관람자들은 여성예술가의 육체가 제시될 때에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몸보다는 예술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떠한 형식을 띠고 있는지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가 예술가의 몸으로 말하는 가치는 남성예술가의 것과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우리는 여성예술가가 무엇에 분노하는지, 실제로 어느 곳을 향한 공격인지 가늠하는 데에 좀 더 집중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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