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저서 “리추얼의 종말”에서는 리추얼Ritual에 대해 ‘상징적인 집 안에 들이기 기술’로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상징적인 집이란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환경 속에서도 온전하게 자신 혹은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의식(儀式)적 울타리로 볼 수 있으며, 이 안에 스스로를 들인다는 것은 사라진 울타리의 시대에서 최소한의 구심점을 만들어주는 행위와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챔버1965의 개관전에서는 전통적인 공동체의 형태인 넓은 의미에서의 ‘집’이 아닌 최소한의 단위인 방chamber으로부터 리추얼의 형식을 찾아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리추얼이라는 단어는 ‘어떠한 생활 속 습관’이나 ‘기계적 루틴’과 거의 구별되지 않으며,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가지는 휴식적인 행위, 즉 힐링과 거의 비슷한 정도의 의미로써 사용된다. 하지만 리추얼의 본질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오직 효율적이고 새로운 ‘생산을 위해’ 보조 역할을 하는 충전거치대가 아닌, 행위 자체로 목적이 되고 공동체적 놀이와 축제에 가까운 비효율적 허례허식의 형식에 오히려 더 근접하다. 오직 내용만이 중시되는 오늘날에 오히려 형식이 중요시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리추얼이라는 형식적 행위는 ‘소통이 필요없는 일시적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만약 서로 간의 차이나 다양성이 줄어들게 된다면 점점 말과 행위 또한 조금씩 줄어들게 될 것이고, 이는 바꿔 말해 말과 행위를 형식적으로나마 일치시키면 자아의 돌출을 잠시 재워 두고 자연스레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게 한다.
리추얼은 분산된 다양성과 차이를 일시적으로 합치시키고 서로를 울타리 속에서 확인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빚어내는 과도한 자아들의 포화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이는 무조건 행복해야 하는 동시대의 긍정성 최면이 역설적으로 자기중심·나르시시즘·우울증,소진이라는 괴물을 생산해 내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상징’이란 반복의 특수한 형태에서 오는 것인데, 어떤 사건이든 한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이것이 두 번 반복되면 상징이 된다. 상징은 반복의 특수한 형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국 현대 불교사의 고승 성철(性徹, 1912~1993) 스님을 친견하러 가는 사람들에게는 삼천배를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 때의 삼천배는 스님에게 바치는 것이 아닌 절을 반복하는 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행위였다. 일종의 미션을 수행(遂行)하는 과정에서 오롯이 의례(ritual)에 귀속되어 비대해지고 병든 자기라는 큰 짐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두 번 이상 반복하는 순간 이것은 전혀 새롭지는 않지만 ‘상징’적인 행위가 되고, 이를 통하여 깊이 침잠된 스스로를 끄집어 내고 유목적인 우연성이라는 불안으로부터 해방하여 비로소 거주가 가능하게 된다. 따라서 마을의 고목, 축제, 신당과 같은 요소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인간이 온전히 거주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듯 세계라는 집과의 연결감이 느껴지는 장소에서는 누구도 소진되지 않는다.
한편 여전히 가부장적 체제 유지를 위한 출산(생산)강제사회는 성과·생산 욕망에 의한 자기계발이라는 명분의 ‘자기착취’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이에 저항하면 게으른 자로 낙인찍는다. 일례로 BTS는 최근에 무려 데뷔 9년 만에 처음으로 활동을 잠정중단하며 이 성장희망에 의한 서사가 얼마나 성과주체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끝내 파괴하는지에 대한 본보기로 떠올랐다. 그렇게 오늘날의 데이터·정보·스크린은 가산적(더·더·더)인 본질로 인해 반복·비생산·비효율은 추방되고 갱신·교체·유동을 좇으며 ‘좋아요’만을 서로 간의 유일한 의례로 삼는다. 쇼핑센터와 랜드마크가 당산나무를 대체하고, 밸런타인데이·화이트데이·로즈데이와 같은 판촉 행사가 공동체의 축일을 잠식한다. 그리고 팬데믹은 그나마 남아 있던 리추얼조차 소멸시킨다. 이런 출산강제사회의 형태는 도시 속에서도 엄연히 물리적으로 눈에 띈다. 낡은 집은 헐고 새 아파트는 끊임없이 의무적으로 낳는다. 양혜규 작가의 ‘사동 30번지’는 생산강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도 아무것도 바꾸거나 생산하지 않는 채 오롯이 그 모습을 고고하게 유지하며 기억에 남는 방법을 통해 상징성을 획득했다. 챔버1965는 이러한 상징성을, 어쩌면 이제는 너무나도 촌스럽고 진부해진 ‘상징성’이라는 그 말을 빌어 리추얼의 장소를 만들고 이 곳에서 작가 각자의 방법으로 리추얼을 수행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리추얼의 본질은 허례허식과 놀이, 축제 등의 목적 없는 공동체의식에 차라리 더 가까운 것으로, 이는 당장의 생존에 하등 도움되지 않더라도 엄연히 합의된 울타리라는 보호장치가 필요한 예술의 속성과도 매우 닮아 있다. 이러한 상징적인 집 안에 들어와 있다고 했을 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생산강제 체제의 가장 최전선에 서 있으면서도 때로는 이로부터 가장 초연해질 수도 있어야 하는 게 창작자라고 가정하고 잠시 멈춰서 보자. 창작자 스스로 그저 생산하는 신체로써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는지. 매번 새롭게 낳기만 하는 인간중심주의의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 지금 곁에 있는 것들과 어떻게 함께 해야 하고 어떻게 잘 보내 주어야 하는지. 이러한 ‘잘 맺기’를 모두와 함께 실천할 수 있을지. / 글: 이민호(밈모리)
참여작가: 이재헌, 오제성, 이산오, 김미수, 나선, 밈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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