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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 ARTLECTURE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황혼의 문턱에서, 여명을 바라보다-

/People & Artist/
by 박정수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황혼의 문턱에서, 여명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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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녜스 바르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 황혼의 문턱에서, 여명을 바라보다


지난 3월 29일, 아녜스 바르다 감독님의 타계 소식이 들려왔다.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인사메시지를 보내셨고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정식개봉 하였으며, 또한 올해 신작을 베를린에서 프리미어 하셨기에 누벨바그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대모의 죽음은 너무도 갑작스럽고 당혹스럽게만 여겨졌다. 물론 본인께선 최근 작품들인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이나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통해 죽음을 마주하려는 담담한 태도를 보이시곤 했다.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관조하고 클로즈업 하시며 근접한 죽음을 관조하였고, 움켜쥐면 손가락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는 결국에는 속절없이 흘러갈 우리의 삶에 대한 허망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시기도 했다. 그걸 감상자들도 알고는 있었지만 최후까지 너무도 활발하게, 그리고 젊게 살아오신 시네아스트이자 아티스트셨기에 우리는 바르다 여사님이 영영 우리 곁에 있을 거란 착각 속에 살았나보다. 이제는 살아있는 거장의 모습을 영영 마주할 수 없을 테지만, 동시대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실험적이고, 또한 여성 영화인의 입지를 굳힌 거의 최초의 사례라는 측면에서, 그녀는 작품을 통해 여전히 우리의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르다 여사님이 사망 불과 한 달 전에 프리미어 했던 미지의 신작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다. 향년 90세, 생의 끄트머리에서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90년의 역사를 어떻게 녹여냈을까, 그리고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었고,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녔었을까. 


연극이 상영되는 널따란 대극장이 오늘은 영화 상영을 위한 영화관으로, 그리고 아녜스의 수다를 듣기 위한 강연장으로 뒤바뀌었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이 80살의 자신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전의 삶을 되돌아보는 작업이었다면, 90살에 이르러서 제작되는 본 작품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고 황혼의 문턱에서 자신의 찬란했던 봄과 여름, 정오와 오후를 회고하는 극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창작과정을 세 가지의 단어로 요약한다. 첫 번째는 '영감'이요, 두 번째는 이를 옮겨내는 '창작', 세 번째는 이를 통해 감상자들과 소통하는 '공유'이다. 본 극의 주요한 연출 중 하나인 리버스 숏, 내지는 오버 숄더 숏을 우리는 바르다의 예술에 있어 세 번째 단계인 공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일련의 콜라쥬이자,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이후에 시작된 삶과 현실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행할 수 있는 재활용을 최후까지도 실현하는 작품이기에, 극을 이루는 시공간은 시작점인 대극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많이 존재하고, 그 어떤 숏들보다 현실 및 현재의 그녀임이 확실한 대극장에서의 숏들에서 영화의 구도는 아녜스 바르다라는 청자와, 그녀의 말을 듣는 엄청난 수의 화자들이 친밀한 구도를 이루는 오버 숄더 숏이 도드라진다. 대극장을 벗어난 공간에서 그녀가 인터뷰를 행하는 장면에서도 영화 바깥의 청자인 우리들과 대화하는 친밀한 구도가 도드라진다. 바르다에게 발화는 독백일 수 없다. 화자에게는 청자가 존재해야하고, 청자는 그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정보전달이 아니다. 자신이 본 시야를 이야기하고, 누군가의 시야를 대신 전달하며, 듣고 있는 우리들의 시야를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을 표명하는 소통이다. 이제 그러한 소통이 구현되는 창작으로 향해가 보자. 아녜스는 바르다의 창작과정을 회고한다. 처음으로 포착되는 <얀코 삼촌>에서도, 그 이후 포착되는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서도, 그리고 <행복>과 <라이온의 사랑>에서 포착되는 공통된 바는 휘황찬란한 원색이다. 그녀는 언제나 색채를 강조했다고 회고한다. 그러한 색채는 삼촌을 만난 기쁨과 행복 등에 상응하며, 우리들의 감정을 노래한다. 즉 그녀의 창작은 우리의 삶과 감정을 옮겨 담는다. 그리고 미술 전공에서 사진작가로, 이후 영화감독으로 전향한 그녀이기에 영화의 많은 미장센들은 이 같은 미술과 사진의 영향력이 깊이 녹아있다. 허나 이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과시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지닌 다양한 면모, 다층적인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즉 그녀의 창작은 삶을 노래한다. 그래서 그녀의 픽션도 결코 삶과 유리되지 않는다. 그녀의 픽션을 수식하는 개념들로 네오리얼리즘과의 유사성, 그리고 즉흥성을 대두하며 현실성을 강조한다. 허나 본 극에서는 그녀는 가장 대표적인 픽션이라 할 수 있을 <방랑자>의 연출로 현실의 그녀를 담아내고, 또한 그 공간으로 직접 향한다. 즉 그녀의 창작은 분리되지 않은 삶의 구현이다.


녹여지는 바들이 감정과 삶이라면, 그것을 담아내는 창작 과정은 콜라쥬와 리사이클링을 강조할 수 있다. 우선 전자로서 우리는 콜라쥬가 처음으로 태동한 것이 미술에서 큐비즘 및 초현실주의로서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아방가르드적인 기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초기작도 일련의 콜라쥬들이라 할 수 있다. 픽션에 다름 아닌 숏들과, 실재 현실이라 할 수 있을 다큐멘터리적인 숏들의 교차를 통한 콜라쥬로서, 그녀는 단일한 환영을 창조하지 않는다. 여러 경계가 허물어진 세계,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서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도큐멘추어>에서 우리는 현실과 환영을 오롯이 분리해낼 수 있을까, 또한 그녀의 픽션들에서 우리는 실재의 숏과 허구로서의 숏을 명확하게 구분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콜라쥬는 영화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아서 영화의 시각예술화, 시각예술의 영화화와 같은 적극적인 매체 간의 경계를 허무는 적극적인 실험을 선보이며, 매체의 콜라쥬로 나아간다. 그리고 리사이클링이라는 측면은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이후에 바르다가 구체적으로 정립시킨 작업동향에 다름 아니지만, 그 이전에도 일련의 재창조는 이뤄지고 있었다. 고전들을 동시대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 일련의 '재활용', 다만 그 대상이 21세기에는 그녀 자신에게로 향한다. 바르다가 20세기 그녀의 픽션 포스터들을 괜히 쓸쓸하고 우울하게 비춰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 20세기의 작업들은 21세기와 소통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낡은 것으로 보이는지 모른다. 그래서 21세기에 영화감독을 넘어서 비주얼 아티스트로도 활동한 바르다는 이 같은 필름들로 건물 형태의 구조물을 지어내는 마찬가지의 재활용을 선보인다. 무엇보다 본 작품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다양한 작품과 삶을 조합시키는 콜라주이자, 자신의 작품들에 새로운 활력, 가치를 부여하는 리사이클링이 최후까지도 시도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녀의 예술세계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그녀가 공유하고자 하는 바, 창작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탐구해야한다. 그녀는 삶을 노래한다. 그녀의 창작과정은 곧 삶의 구현, 재현에 다름 아니며, 때로는 창조에 이른다. 20세기와 21세기의 그녀는 언제나 변화 없이 사람에 대한 궁금증, 호기심으로 끊이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이나 소수자,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끊이지 않았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향한 시선이 표피에 그쳤다면, 그 시선을 보다 깊숙한 내면으로 향하는 탐구로 시선을 깊숙이 향해가는 작업이요,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는 당대 여성들이 겪었고, 또한 육체적인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시련들에 대한 총체에 다름 아니었다. <블랙 팬서>는 그녀가 미국으로 향해도 언제나 관심은 정당한 권리를 투쟁하는 이들에게 향한다는 바가 강조되며, <방랑자>나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이데올로기 바깥에 놓이거나 이들이 생존권을 보장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니다. 한편으로 이 작품들은 보다 거시적으로 메시지가 확장되는 탐구들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미시적인 바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바가 아니다. <행복>은 프랑스의 가정의 형태와 보편적인 행복이라는 거시적인 탐구임과 동시에, 당대의 드라마 스타였던 장 클로드 드루오와 그의 가족형태에 대한 미시적인 탐구이기도 했다. 또한 <아녜스 v에 의한 제인b>와 같은 작품도 거시적인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지만, 40세로 접어드는 제인 버킨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즉 그녀의 시선은 이념 및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을 포착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낼 수 없는 개성적인 개개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것이다.


개인의 삶을 포착하며 이를 거시적인 문제제기로 확장해내는 그녀의 작품들은 정치적인 색채가 뚜렷하다. 그녀는 누벨바그 내에서도 진보적인 정치색을 결코 숨기지 않았던 좌안파의 일원이다. 그래서 본 작품에서도 작금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전쟁의 현장이 포착된 숏들과 난민의 현장이 드러난 인서트 숏들이 사용되곤 한다. 한편 이러한 정치색은 특정 이념의 옹호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본 삶과 세계가 나아가야 할 개인적인 해석으로 느껴진다. 그녀의 시위, 거리행진은 개인적인 형태로 이뤄진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정치성은 곧 아녜스 바르다 자신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아녜스 바르다의 영감은 타인이기 이전에, 타인에게 호기심을 갖는 자신에게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에 <낭트의 자코>가 가장 대표적이다. 객관적인 타인으로서 자크 드미가 아니라, 아녜스 바르다가 사랑한 자크 드미, 즉 타인을 포착하는 다큐멘터리에서 그녀의 존재와 감정은 은폐되지 않는다. 한때 <다게레오 타입>과 같은 대단히 객관적인 시선을 지향하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를 은닉하려도 했지만, 그녀의 중기, 후기 작품들은 감독의 존재를 은닉하지 않는다. 그녀의 작품들은 영감을 받는 그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으로, 우리는 그녀의 예술에서 진정성을 꼽을 수 있다. 그래서 롱테이크로 포착되는 모든 것에서 결코 무의미한 것, 불필요한 것은 없다고 그녀는 말한다. 숏의 모든 것들에는 그녀의 감정이 닿아있다. 또한 언제나 다양한 삶의 형태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그녀이기에, 우리의 삶을 규정할 수 있는 다양한 세계, 공간도 곧 영감의 대상이었다. 그녀의 영화는 곧 여행의 연속이다. 



그리고 40세의 제인 버킨, 80·90세의 자신, 100세의 생일을 맞은 영화 등 바르다의 영감의 대상 중 하나는 시간이었다. 우리가 다가오는 시간에 갖는 감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지금과 과거의 나를 잃지 않을까 하고, 또한 예측할 수 없기에 느끼는 두려움과, 다른 하나는 새롭고 흥미진진한 것을 마주하는 호기심, 바르다의 감정은 후자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르다의 작품에서는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긍정적인 태도로 가득한 진취성이 도드라진다. 흑백에서 컬러로,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하지만 그녀의 일대기와 작품세계를 집대성하는 본 극의 일대기가 결코 선형적이지 않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90세의 바르다에 대한 이야기와 초상으로 시작되었다가, 80세의 그녀들의 모습이 등장하는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여기저기의 아녜스 바르다>, 그리고 그 이전 시대의 초상이 드러나는 영상이나 매체들이 콜라주 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선형적이지 않다. 이를 통해 지금 여기의 한 개인을 이루는 복잡하고 뒤엉킨 총체로서의 시간, 당대에 존재한 육신의 시간과, 당대를 회고하는 육신의 시간 등을 다양하게 포착해낸다. 이러한 복잡한 시간과 더불어 그녀를 포착하는 다양한 매체들, 회화와 사진, 필름과 디지털 등 결코 단일하지 않은 한 개인의 총체를 포착하기 위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무엇보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삶과 예술의 영역과 경계를 허물어내며, 삶과 유리되지 않는 자신의 미학을 드러냄에 있다. 본 작품은 실재 현실의 시간, 공간과 공명하는 예술들, 자신의 작품 속에 자유자재로 침투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백미는 현실에서 시작했다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의 모래바람 속에서 사라져가는 영화의 결말로서, 이는 지난 3월 타계한 그녀의 최후와 일치한다. 그녀에게서 미술, 사진, 영화로 대변되는 모든 예술들은 곧 삶 그 자체였기에, 언제나 이에 삶을 녹여내는데 충실했던 노장은 그렇게 예술 속에서 아스라이 사라져가며 우리에게 실재의 작별을 고한다. 


바르다는 분명 전작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도 분명 닥쳐오는 죽음을 담대히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고, 80세로 접어들던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에서도 죽음은 그녀에게서 부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외면하고 있지만, 그녀 스스로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녀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이유는, 죽음을 담대히 받아들이려는 그녀의 태도는 외면하고, 언제나 충실히 삶의 여정을 떠나는 경쾌한 그녀의 단면만을 주목했기 때문이랴. 하지만 우리는 이제 모래바람에 의해 사라져가는 그녀의 육신을 인정해야 하리라. 하지만 너무 슬퍼할 필요 없으니, 육신의 상실에도 여전히 그녀는 우리 곁에 작품으로 남아있다. 이에 우리는 본 극의 두 가지 주요한 시퀀스에 주목해 볼 법 하다. 첫 번째로 오프닝에 크레딧을 올리는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 이전시대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법이었겠지만, 작금에 크레딧은 결말과 끝에 상응한다. 끝에서 시작하여 새로움을 낳는 그녀 최후의 영화는 온전히 닫히지 않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두 번째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에서 하트모양의 감자가 썩어감과 동시에 싹이 돋아나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퀀스에 주목할 법하다. 감자는 죽어가지만 싹을 틔워내며, 결국에는 새로운 생명의 맹아를 맺힌다. 그녀의 죽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새로운 것을 틔워내기 위한 죽음, 그리고 완전히 닫혀있지 않은 죽음,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남겨진 작품들의 질문에 답하고, 역으로 작품에 질문을 내거며, 감상 이후 삶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생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공유하길 원하는 그녀의 창작을 마주하러 가는 여정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그녀와 여전히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품을 마주한다면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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