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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빛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 ARTLECTURE

빛과 빛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도 팔라디니(Do Paladini)의 When the Sun Paints -

/People & Artist/
by Ayla J.
빛과 빛 사이, 사물과 사물 사이
-도 팔라디니(Do Paladini)의 When the Sun Pain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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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팔라디니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세계의 표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장치가 감지한 세계의 빛을 다시 구성한다. 빌렘 플루서가 말한 ‘기술적 이미지’의 방식, 즉 장치가 포착한 빛의 계산된 흔적을 통해 세계의 또 다른 구조를 드러낸다. 그 세계는 어쩌면 힐다의 기억처럼 조각 조각 스며들며, 조용하게 잔상을 남긴다.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보통 ‘무언가’를 찍는다. 특정한 대상, 선명한 장면, 하나의 순간. 하지만 도 팔라디니의 사진은 그 대상들 사이를 찍는다. 사물과 사물 사이, 빛과 빛 사이에 놓여 있는 또 다른 층.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그 틈의 미세한 빛들. 그녀는 피사체가 아니라 피사체들 사이의 공간을 기록한다.



도 팔라디니(Do Paladini), GALLERY AP-9(구 아트갤러리 전주) 전시작 중, 전주, 2025, Photo: Ayla J.



도 팔라디니는 스위스 인터라켄 출신의 비주얼 아티스트다. 그녀는 카메라를 사용하지만 전통적인 개념의 사진가라기보다는, 빛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색과 구조를 탐구하는 아티스트에 가깝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은 사진이면서 동시에 회화처럼 보인다.

볼프강 틸먼스가 대상을 찍기보다 세계의 ‘흐름과 구조’를 포착했던 것처럼, 팔라디니의 사진 역시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 빛이 드러나는 과정 그 자체를 기록하는 비물체적 사진에 가깝다.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본다고 말했다. 보는 방식은 단일하지 않고, 우리가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끊임없이 서로를 변화시킨다. 팔라디니의 사진은 바로 그 관계의 층에서 작동한다.

지난달 충정로 모두예술극장에서 본 연극 「라스트 호프」는 시각을 잃어가는 이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었다. 시각장애인 배우 힐다 스닙페는 세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기억은 색과 감촉과 잔광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이고, 풍경과 얼굴들은 하늘의 섬광처럼 짧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빛의 흔적처럼 남는다고 했다.

팔라디니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세계의 표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 장치가 감지한 세계의 빛을 다시 구성한다. 빌렘 플루서가 말한 ‘기술적 이미지’의 방식, 즉 장치가 포착한 빛의 계산된 흔적을 통해 세계의 또 다른 구조를 드러낸다. 그 세계는 어쩌면 힐다의 기억처럼 조각 조각 스며들며, 조용하게 잔상을 남긴다.

팔라디니의 작품은 단아하고 조용하다. 화려한 색채로 압도하거나, 강렬한 메시지로 관람자를 흔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오래 들여다보면 빛의 미세한 떨림, 종이가 머금은 톤의 변화, 단순해 보이는 구조 안에서 살아나는 미세한 층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조용한 진동이 반짝인다. 

특히 종이의 물성이 인상적이었는데, 하네뮬레의 깊은 결은 빛이 종이의 표면 위에 머무르지 않고 안쪽으로 스며들어 여러 층을 이루게 한다. 이미지는 한 번 잠겨 들어갔다가 다시 솟아오른다. 종이는 단순한 지지체가 아니라 빛이 만들어낸 색이 머무르는 공간이 된다.



도 팔라디니(Do Paladini), GALLERY AP-9(구 아트갤러리 전주) 전시작 중, 전주, 2025, Photo: Ayla J.


도 팔라디니(Do Paladini), GALLERY AP-9(구 아트갤러리 전주) 전시작 중, 전주, 2025, Photo: Ayla J.



팔라디니의 사진 앞에 서면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응시를 다시 되돌려 보내는 느린 호흡이다. 이미지는 시선을 끌어당기기보다, 가만히 머금었다가 아주 미세한 떨림을 내보낸다. 원형의 빛들은 서로 겹치고 흩어지며, 한 지점에 집중되지 않고 표면 안쪽으로 침잠한다. 밝게 터지는 조명이나 선명한 색의 외침은 없다. 대신 낮은 명도와 얇은 채도의 층이 반복되며, 빛이 종이의 결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은은하게 돌아나오는 움직임이 생긴다.



도 팔라디니(Do Paladini), GALLERY AP-9(구 아트갤러리 전주) 전시작 중, 전주, 2025, Photo: Ayla J.



이러한 방식은 강렬한 서사나 메시지보다 빛이 구조를 이루는 방식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색의 흐름은 순식간에 번쩍하는 효과가 아니라, 시간이 조금 지나야 비로소 보이는 ‘지각의 지연’을 만든다. 관람자는 처음에는 단순한 원형의 중첩처럼 보이는 장면 속에서, 점차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층(잔상, 굴절, 침잠, 회복)을 읽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사진은 말 그대로 “빛이 만든 흔적”이지만, 동시에 “빛이 멈추어 있던 자리”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팔라디니의 작품은 눈이 한 번에 붙잡는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선을 잠시 멈추게 하고, 그 멈춤 속에서 천천히 구조를 드러낸다. 그 점에서 그녀의 사진은 말을 아끼다가 필요한 한 문장을 조용히 내어놓는 사람처럼, 안쪽에서 조용히 빛과 색을 머금고 있다가 툭, 하고 형상을 내놓기 시작한다.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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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Ayla J. 

예술을 통해 삶을 용서하고, 예술을 통해 삶을 사랑하고, 예술을 통해 삶 속에서 노는 법을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