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몸은 서로 다르다.
다른 몸으로 미술관에 왔다.
다양한 몸이 모이는 미술관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만날 수 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5월 16일부터 7월 20일까지 열리는 전시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를 여는 말이다. 미술관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는 취지를 담은 이번 전시는 ‘몸(Body)’을 키워드로 하여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함께하기’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
최근 많은 미술관에서 쉬운 글쓰기, 음성 해설 등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가 차별 없이 전시를 관람하고 즐길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전시의 작품뿐만 아니라 더 많은 이들의 전시 관람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을 위주로 글을 풀어가고자 한다.
《기울인 몸들》 전시실 내부 점자 블록
작품 음성 해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점자 블록이다. 이동 동선을 따라 놓인 점자 블록은 총 4개의 종류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동과 정지, 작품의 위치 및 음성 해설 위치를 표시한다. 점자 블록과 음성 해설은 작품을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으로 감상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음성 해설은 작품의 색깔 및 재료 특성에 의한 번짐과 모양새까지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작품을 귀로 감상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 것이 느껴진다.

터치가 가능한 구나 작가의 작품
이동 동선, 귀로 감상하는 작품뿐만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지면서 감상이 가능한 구나 작가의 작품 또한 좀 더 많은 관람자의 감상 폭을 넓히는 역할을 하였다. 〈레드브라운캐비닛 안 상아뼈콜드스킨 제스쳐〉를 포함한 세 개의 작품은 여러 조각을 모아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만지는 위치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낄 수 있다. 구나 작가의 작품은 서로 다른 재료가 합쳐져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듯, 다양한 사람이 만남으로써 더 크고 다채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리처드 도허티 〈농인공간: 문 틀〉
수어를 사용하는 건축가 리처드 도허티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농인들을 위한 새로운 디자인의 미술관을 제시한다. 전시실 입구마다 틀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핑크색으로 칠한 〈농인공간: 문 틀〉은 손과 몸짓뿐만 아니라 표정까지 모든 제스처를 통해 대화하는 농인들이 대화 중 쉽게 놓치는 주변 장애물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건축 디자인 작품이다. 이는 단지 색깔 하나만 바꾸어도 누군가는 더 큰 편리함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접근성 강화의 실제 적용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김은설 〈흐려지는 소리, 남겨진 소리〉
김은설 작가의 〈흐려지는 소리, 남겨진 소리〉는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반투명 벽을 관람객이 직접 손을 대어 감상함으로써 들리지 않는 소리가 몸에 어떤 감각과 흔적을 남기는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작품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화면 이미지, 그리고 가까이 귀를 대어도 또렷이 들리지 않는 소리는 보청기를 사용하는 작가가 감각하는 소리이며, 손으로 느껴지는 진동은 소리를 귀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방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최태윤, 연 나탈리 미크 〈일하지 않는 움직임 / 이주하는 몸들〉
이번 전시는 다양한 몸을 주제로 한 전시인 만큼 신체적인 몸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몸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전개된다. 최태윤, 연 나탈리 미크의 〈일하지 않는 움직임 / 이주하는 몸들〉은 타국에서 생활하는 이주민을 ‘일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짚어 이주민 또한 돌봄과 쉼이 필요함을 몸짓을 통해 표현한다. 가정집과 스튜디오에서 유사하게 이루어지는 몸짓과 ‘일하지 않는 이주민’의 몸짓을 기호 및 설명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은 마음 붙일 곳 없는 타국에서 마음의 안정, 육체의 쉼을 찾는 이주민들의 심정을 공감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두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특이한 점은 필자가 전시 공간에 머무른 시간 동안 대부분의 관람자가 미술관의 불편함을 경험한 적이 없을 것으로 보이는 비장애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누군가에겐 너무도 쉬운 미술관의 방문이 누군가에겐 큰마음을 먹어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그런 취약함을 함께 마주할 때 진짜 ‘모두’를 위한 공간이 시작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전시라고도 해석된다. 함께 하기, 모두를 위한 예술에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는 지금. ‘특별’한 것이 아닌 ‘평범’한 것이 되기까지, 기울어져 있던 수평을 맞춰나가는 시도가 계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