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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온 고통, 남겨진 흉터 | ARTLECTURE

버텨온 고통, 남겨진 흉터

- 展, 시오타 치하루 / 가나아트센터, 2022.7.15.~8.21 - 에피메테우스의 서른다섯 번째 질문-

/Art & Preview/
by youwallsang
버텨온 고통, 남겨진 흉터
- 展, 시오타 치하루 / 가나아트센터, 2022.7.15.~8.21 - 에피메테우스의 서른다섯 번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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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그런 인연이 있다. 얼굴 없이 인*에서만 알고 지내던 사이. 어느 날 문득, 서로의 안부를 더듬다 뾰족하게 꽂힌 한 지점을 본다.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에 마주한 우리가 만약 서로를 알아보았다면, 웃으며 인사를 나눴거나,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음꽃도 피워 올리지 않았을까. 그곳에 없지만 한 무더기의 작품으로 함께 있던 작가에 대해, 작가의 마음에 대해 혀끝 아리도록 수다를 떨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은 다 잊자.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것들에 대해, 그때는 알았지만 지금은 달라진 것들에 대해, 그때도 몰랐고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지도 모를 것들에 대해서.

2020

일부러 찾아본 것은 아니었다. ‘우발적 마주침이었다. 붉고 붉은 실들이 가냘픈 의자를 옭아매고 있던 장면. 핏발 서린 눈처럼 쏟아지던 붉은 실들에 덜컥- 마음이 걸렸다. 온몸이, 온 세상이 선뜩한 그 눈과 마주쳐 몸을 낮춰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다였다. 전시는커녕 스치듯 본 짧은 화면이 전부였다. 달려가기엔 이미 너무 늦었고,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단 한 줄만 건드려도 세상이 폭발할 것 같던 긴장감. 그날 이후 내내 곤두선 붉은 실들이 묵직하게 가라앉아 주변을 검붉게 물들이며 천천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날 보러 와요

 




2022

게으름에 떠밀려 전시 마지막 날에야 겨우 헐레벌떡 뛰어 들어가 마주한 세상은 거친 숨소리도 잠재울 만큼 고요했다. 숨이 멎도록 촘촘하게 엮인 하얀 실들의 세상. 바늘땀의 수고로움을 알기에(전직 바느질 선생이었던 나) 고개가 꺾이도록 한참을 바라봤다. 2년 전의 선뜩했던 붉은 기운은 눈을 감았고, 씻고 또 씻어 하얗게 바래진 눈먼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잇고 메꿔서 세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힘, 고치에 들어간 듯 안온한 세상, 위험으로부터 무한히 멀어질 것만 같은 흰 실의 탄력. 숨고자 한다면 기꺼이 숨겨줄 것만 같은 무해한 친절. 끈적한 더위로 곱지 않았던 날씨임에도 짜증 없이 순했던 나들이로 그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작가에게 영감을 줬던 또 다른 작가는 노벨상의 영광을 안았고, 늦된 필자는 총명치 못한 머리를 헤아리며 처음부터 다시 되새김질해야 했다. 시간이 건네준 감상의 이면이 엿보였던 탓일까, 노벨상이라는 부가된 서사의 무게 탓일까. 누군가의 등장으로 다시 불려온 기억을 늦은 만큼 천천히 톺아보았다. 생각과 생각 사이로 허술하게 비워진 구멍들이 적지 않았다.

 




2024

깔끔하게 잘려나간 듯 벼려진 날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허공을 향해 내지른 비명처럼 하얗게 얼어붙은 실 자국. 잇고 꿰매져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살갗이, 숨 한 번 잘못 쉬면 갈기갈기 찢겨 너덜너덜해질 얇은 거죽이, 무수한 직선에 매달려 당겨지고 있었다. 몸과 세상의 경계, 그 사이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팽팽한 긴장이 소리를 죽이며 몸을 낮췄다. 실들이 메꾼 세상은 바늘만큼 따갑고 아리다. 어떤 실천보다 더 확고하게, 오로지 버티면서 살아내는 모든 이들의 살갗이 거기에 함께 꿰어져 당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한 강<> 입김

각기 다른 고통의 자국들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삶의 무늬를 만든다. 고통의 바늘땀이 촘촘할수록 무늬는 단단하고 반듯한 흉터로 남는다. 고통은 버티는 것이고, 흉터는 남겨지는 것. 아프니까, 아파서, ..... 아이러니.

 




하얀 배 위로 흰옷들이 서성인다. 바닥에서 바람이라도 불어오는지, 죄다 하늘로 들려 올라가 솟구치며 떠돈다. 옷은 사람의 형상을 닮아서 누가 입어주지 않아도 번듯한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다. 바람도 없는데 모든 것이 나부끼는 기분이 드는 것처럼, 사람도 없는데 옷들이 사람처럼 서성인다. 갓난아이의 배냇저고리도, 망자의 수의도 새하얗다. 미처 말을 배울 새도 없이 가버린 아기는 언어가 없다. 익숙했던 목소리, 그 소리의 방향으로 고갯짓마저 한 번 못 하고 가버린 여린 생명은 언어가 없어서 이야기도 없다. 그런 죽음을 옷 속에 품고,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그녀’), 살을 쪼개는 고통으로, 이야기가 되지 못한 빈 종이들을 새처럼 날려 보낸다. 하늘과 땅을 잇고, 사람과 세상을 봉합하는 실 자국 아래로 고통의 바늘땀이 하얀 배를 지탱한다. 바람이 통하는 무수한 실 가닥 사이, 이름 지어지지 못한 사연과 해결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매달려 사방을 빼곡하게 채운다.

 




어느 흐린 날의 공기층처럼 세상은 뻑뻑하고 단단하게 고정되었지만, 여전히 이야기의 실을 잣고 있는 예술가가 있기에 새로운 무늬는 끊김 없이 직조되고 시간이 만든 흉터의 수만큼 삶은 계속된다. 버텨온 고통만이 단단한 흉터로 남는다. 진정 피가 흐르고 맥동이 솟구치던 상처가, ...이 하얗게 드러나 꼿꼿하고 단단하게 굳은살로 다져지는 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건네는 귀한 선물이다. 고통을 말하고, 흉터를 내보이는 작가들이 있는 한, 그 고통에 나의 고통을 더하고 그 흉터에 나의 입을 맞추는 한, 검은 숯도 하얗게 씻어낼 용기는 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한때는 까만 밤을 하얗게 불태우던 능력자(!)들이 아니었는가.

오래도록 바라보고 생각을 길게 잇고 되돌아 다른 길을 찾고 잠깐은 멈춰서 일부러 잊기도 하며 곰곰하게 생각을 다질 때, 나 모르게 나와 함께 했던 사람들의 온기가 시간을 건너와 나에게 닿는다. 다시 불려온 감상이 새로운 벗과 나의 골머리에 한 뼘의 깊이를 더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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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youwall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