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미술과 몸; 중세인의 머리(상)
지난 칼럼들에서 고대의 미술과 몸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이번 칼럼부터는 고대를 지나 중세의 미술에서의 몸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서양 역사에 있어서 몸에 대한 부정적 사유가 결정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중세 시대부터이다. 유럽에서 중세 시대는 대략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5세기부터 르네상스 시대를 포함한 15세기까지로 알려져 있다. 본 칼럼에서는 몸에 관한 사유의 변혁이 무르익은 13세기 이후의 미술에서의 몸에 관하여 이야기하려 한다.
중세의 몸에 관한 사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기독교’이다. 중세는 몸에 관한 많은 문헌이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해 중세인이 몸을 어떻게 사유하였는지 비교적 알기가 수월하다.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 문헌을 종합해보면, 중세 시대에는 몸에 관하여 긍정적 사유와 부정적 사유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몸에 관한 부정적 사유의 대표적 한 예를 언급하면,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Gregorius Ⅶ, 1020?~1085)은 몸을 “고약한 영혼의 의복”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몸은 부정적인 존재라고 판단했던 중세인들의 귀감이 되었던 수도사들은 성스러움을 추구하기 위하여 육체적 고행을 하였고, 금욕과 순결은 가장 가치 있는 덕목으로 삼았다.
이와는 반대인 긍정적 사유를 펼친 성 보나벤투라(Sanctus Bonaventura, 1221~1274)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몸은) 서 있는 자세가 신을 향하는 영혼의 방향에 일치하기 때문에 우수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몸의 상부에 있는 머리의 상징적 가치는 고대와 비교하여 수직 상승하였다. 다시 말해, 인간의 머리는 몸에서 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에 몸의 가장 중요한 부위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머리를 중시하는 사유는 중세 이전에도 이미 존재하였는데, 성경의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남편의 머리이지만,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다.”라고 하였으며, 세비야의 대주교였던 이시도르(Isidorus Hispalensis, 560~636)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몸의 첫 번째 부분은 머리이며 머리는 caput(머리, 두상돌기)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모든 감각과 신경이 머리에서 기원하고 있으며 모든 힘의 원천도 머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머리에 관한 이시도르식 사유는 13세기 이후까지 영향을 미쳤고, 그러한 사실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1300년에 서술된 백과사전의 한 삽화가 증명해준다(사진 1).

<사진 1. 남성 뇌의 내부 다이어그램>, 1300, 잉글랜드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14th-century_painters_-_Diagram_of_the_brain_-_WGA15761.jpg
이 삽화(사진 1)는 중세 남성의 머리 속 내부 구조를 해부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뇌 속에서 어떠한 절차로 인간이 사고(思考)가 일어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이 삽화에 따르면, 뇌에는 각각의 기능을 수행하는 원형으로 된 5개의 방이 있으며, 몸의 모든 감각과 정보를 받아들여서 처리하는 일이 뇌의 소관임을 암시하고 있다. 삽화 왼편의 첫 번째 원형의 방은 라틴어로 ‘센수스 콤무니스(sensus communis)’로 ‘공통 감각’이라는 뜻이며, 몸의 여러 감각의 정보가 함께 모이는 곳이다. 그 옆에 있는 두 번째 방은 ‘이마기나티오(ymaginatio)’라고 불리며, 추상적 정보를 구체적 사고로 변환하는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상상 또는 이미지화한다는 것이다. 이마기나티오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밑쪽의 방은 ‘코기타티바(cogitativa)’로 이미지를 숙고하거나 개념으로 변환하는 작용을 하고, 위쪽의 ‘에스티마티바(estimativa)’는 이미지와 개념을 평가하는 일을 담당한다. 가장 오른편에 있는 방은 ‘메모라티바(memorativa)’로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이다.
이 삽화의 내용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다소 황당하지만, 중세인들이 뇌의 기능과 사고의 절차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아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이 삽화를 통해 중세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억을 관장하는 ‘뇌세포’ 비슷한 것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지식으로 뇌세포는 1000억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이 엄청난 숫자의 뇌세포들이 하는 일은 지금의 우리도 모두 알 수는 없다) 5개의 원형을 방을 교류하는 신경 물질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중추적 역할을 하는 뇌세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할 수는 없다. 중세인들이 기억을 저장하는 저장소가 뇌 안에 따로 있었다고 생각했던 점을 주목해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들이 기억이 감각과 분리되어 저장된다고 생각했음을 뜻하기도 한다. 사실, 현대과학에 의해 감각 뇌세포와 기억 뇌세포는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으며, 감각 뇌세포는 기억을 형성하고 회복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인의 시각에서 중세인들은 뇌에 관한 그릇된 사고를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세인들의 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식은 사실 인식이 아닌 상상력에 의존한 것과 같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인간의 삶의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정신적 측면을 주관하는 인체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고 중세인들이 인식했다는 점은 알 수 있었는데, 다음 칼럼에서 중세인들이 몸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했던 머리에 관한 이야기를 세례 요한의 머리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마저 하고자 한다.
*이번 칼럼의 정보는 잭 하트넬의 <<중세 시대의 몸>>, 2023‘과 ‘자크 르 고프의 <<중세 몸의 역사>>, 2009’를 참고하였다.
이어지는 칼럼에서도 중세의 미술과 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지속하고자 한다.
몸과 미술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