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국의 미술과 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의 몸
지난 칼럼에서 <<산해경(山海經)>>과 함께 고대 한국미술에서의 몸과 반인반수에 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이번 칼럼에서는 지난번 이야기했던 고구려 시대 무덤의 벽화에 나타난 몸에 관한 사유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700여 년간 지속된 후 기원후 668년에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는데, 평양을 중심으로 한 주변 지역에 많은 무덤을 남겼다. 무덤을 남긴 사람들은 사회의 지배계급이 주류였고, 벽화는 대부분 무덤 내부의 벽이나 천정에 그려졌다. 벽화의 내용은 주로 무덤 주인의 사회적 지위와 그가 생존했을 당시의 생활상이 표현되었으며, 더불어 사후의 세계에서의 평탄한 삶을 기원하거나 무덤 주인의 영혼이 보호받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기도 하였다. 이렇게 무덤에 벽화를 그려 넣는 문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이는 신라와 백제에도 전파되었다.
<대안 덕흥리 벽화고분 외부 입구>
사진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71
대안 덕흥리 벽화고분은 현재 평안남도 강서군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 대표적 벽화고분 중 하나로, 고분 안에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5세기 초 고대 한국의 생활상과 문화에 관한 이해를 돕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된다(사진 1). 덕흥리 벽화고분은 벽화의 내용이 매우 다양하고, 당대의 정치·사상·신앙·풍습·일상생활·예술·문화적 상상력 등을 다각도에서 고찰할 수 있는 매우 의미가 깊은 미술 유산이다. 고분 안의 기록에 의하면, 이 고분은 408년에 완성되었으며, 고분의 주인은 고구려의 대신이었던 진(鎭)이다(사진 2, 3). 진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설, 또는 중국인 대사로 고구려에 거주했던 사람이라는 설이 있지만, 고구려 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평양 주변을 지배했던 사실을 고분 안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안 덕흥리 벽화고분 내부벽화, 무덤 주인 진(鎭)과 13군 태수 하례도>
사진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94565&cid=46620&categoryId=46620
덕흥리 벽화고분의 내부에는 무덤 주인인 진이 생전에 보았던 풍경 및 사후 천상에 있는 장면, 하례도, 신하들과 군사들의 행렬도, 무예를 수련하는 장면, 마구간 및 외양간, 불교 행사, 신들, 상상의 동물들, 반인반수들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 중 주목할 것은 진의 초상화와 그를 따르는 13군 태수의 하례도이다(사진 2, 3). 진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오른쪽 손에 ‘검은 부채(모선, 毛扇)’ 같은 것을 들고 중앙에 앉아 있다. 진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그를 보좌하는 시종들이 서 있으며, 벽의 모서리를 중심에 두고 다른 쪽 벽면을 보면, 13군의 태수들이 허리를 약간 굽힌 채로 진에게 하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두 벽면을 함께 고려하면, 마치 진이 그의 공적인 집무실에서 태수들과 정치적 행사 또는 공식 일정을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사진 2).
<대안 덕흥리 벽화고분 내부벽화, 무덤 주인 진(鎭)과 13군 태수 하례도>
사진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71
13군 태수의 하례도는 벽면의 전체 화면을 위와 아래, 즉 2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윗단에 맨 앞에 무릎을 꿇은 통사리와 연군, 범양, 어양, 상곡, 광녕의 6군 태수들이 서 있으며, 아랫단에는 나머지 7명의 태수들이 기립하고 있다(사진 3). 아랫단의 7명의 태수들의 몸의 크기는 윗단의 태수들보다 다소 작게 표현되었으며, 13인의 모든 태수들은 무덤 주인인 진의 몸의 크기보다 작게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 진의 고분벽화에서 인물들의 크기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사람의 순으로 몸의 크기가 차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진의 양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시종들은 태수들보다 몸의 크기가 작다.
<이집트 피라미드 무덤벽화>
‘Agricultural Scenes from the Tomb of Nakht’ copied from a wall
in the tomb of the 18th-dynasty vizier Nakht, Thebes, , Egypt
사진출처: https://www.britannica.com/art/Egyptian-art/Relief-sculpture-and-painting
이렇게 원근법을 무시하며 몸의 크기를 묘사한 것은 이집트 피라미드의 벽화에도 나타나는 특징이다(사진 4). 이집트 고대벽화에서도 인물들의 몸의 크기는 가장 권력이 강한 자 또는 중요한 인물의 순으로 크기가 결정된다. 그러나 진의 고분벽화와 이집트 벽화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이집트 벽화에서 인물들은 상반신은 앞을 향하고 있고 얼굴과 하반신은 옆면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진과 태수들의 모습은 얼굴과 몸의 자세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의 고분벽화에서는 인물들의 몸이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는 자세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이집트 고대벽화에서 몸의 묘사가 벽화를 감상하는 사람에게 인간 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지만 뒤틀린 기괴한 형태로 제시되었던 것과는 다르다. 더불어 진과 태수들의 얼굴과 몸의 형상은 각기 다른 개인으로 구분될 만큼 개성적이다(사진 3). 예를 들면, 진은 태수들과 비교하여 풍채가 좋으며 목과 어깨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 둥근 몸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그의 다듬은 듯한 초생달 모양의 눈썹과 작은 눈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몇몇 태수들의 얼굴의 특징과는 확연히 다르다. 또한, 이집트 고대벽화에서 인물들의 인체 비례가 거의 동일하게 표현되었던 것과는 달리, 진의 고분벽화에서 태수들의 얼굴 크기는 각각 다르며, 서로 다른 인체 비례를 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같은 줄에 서 있는 태수들의 인체 비례가 각각 개성적이면서도 실제 인물의 비례는 아니라는 점이다(그러나 진의 인체 비례는 현실에 가까워 보인다). 사실, 그들의 얼굴 크기는 몸에 비례하여 지나치게 크다. 이러한 크기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고대시대라고 하지만 동시에 생존하여 13인의 태수가 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지난 칼럼에 살펴보았던 완벽한 리얼리티에 가까운 기원전 3세기의 진시황제의 병마용(兵馬俑)을 고려하면, 중국과 문화적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고구려 문화에서 몸의 비례를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마도 고구려 사람들은 실제에 가까운 인체 비례를 고려하여 표현하는 것보다 조금 추상적이지만 각자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몸 형상을 제시하는 것을 선호했던 듯하다. 어찌 보면, 이러한 시각적 특징은 현대의 웹툰이나 캐리커처에서 볼 수 있는 유머러스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엄숙함이나 장엄함이 느껴져야만 할 무덤 안 벽화의 이미지가 유머러스한 친근함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이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안 덕흥리 벽화고분 내부벽화, 견우와 직녀>
사진출처: https://namu.wiki/w/%EC%A7%84(%EA%B3%A0%EA%B5%AC%EB%A0%A4)
진의 고분벽화에서의 유머러스함은 ‘견우와 직녀’를 그린 부분에서 더욱 극대화된다(사진 5). 견우와 직녀를 그린 부분을 보면 소를 끌고 가는 견우의 얼굴은 진지하다기보다는 들뜬 표정이다. 그의 표정은 진중한 것이 아니라 살랑이는 바람처럼 가볍다. 견우가 끌고 가는 소를 보면, 소의 특징을 잘 잡아 캐리커처 식으로 표현되었다. 소의 걸음걸이도 그의 주인의 얼굴 표정과 같은 맥락으로 가볍게 산보를 하는 듯하다. 주목할 것은 견우의 오른쪽 손이 그의 얼굴보다도 길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왼손은 그의 얼굴보다 작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얼굴과 손의 크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에는 필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가 부족하다. 견우와 소의 뒤쪽에는 직녀가 서 있는데, 직녀의 표정은 감정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좋은 기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직녀는 손을 드러내지 않고 소매에 가린 채 슬픔을 담은 듯한 약간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두 사람의 대조적 태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에 숨겨진 비화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견우와 직녀의 몸의 묘사도 앞의 진과 태수들과 마찬가지로 원근법, 몸의 비례, 리얼리티 추구 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인데, 아무래도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몸을 서양의 기하학 및 산술학적 시각으로 사유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으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특징화하여 받아들이는 사유체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았나 한다.
<대안 덕흥리 벽화고분 내부벽화, 행렬도?
사진출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4571
이 칼럼의 첫머리에서 언급하였으나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언급하자면, 고구려 벽화고분의 내용은 주로 무덤 주인의 살아있을 때의 일상 및 업적과 사후세계에서의 안녕을 추구하는 내용이 주로 묘사되었다(사진 6). 이는 이집트 벽화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사진 4). 고구려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인들과 같이 현세와 함께 내세도 존재하여 현세의 몸은 죽더라도 내세에서 다른 몸으로 살아간다고 믿었거나, 또는 적어도 내세에서 다시 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살아있는 몸을 가진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삶, 즉 ‘산다는 것 자체’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몸의 수명이 끝나더라도 다른 몸을 통해 추가적 삶을 원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방증한다. 결국, 몸을 가진 존재들은 살아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며, 주어진 몸의 수명, 즉 몸의 한계치를 넘어서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초적 몸의 욕구는 아득한 과거부터 문화 및 미술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나아가 먼 미래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칼럼의 이미지 및 정보는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국립광주박물관, 2005’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763407&cid=49290&categoryId=49290>을 주로 참고하였다.
이어지는 칼럼에서는 중세의 미술과 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지속하고자 한다.
몸과 미술 이야기는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