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클>(Circle, 2024)
한 소녀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서, 무심히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자리를 떠난다. 소녀가 그린 동그라미를 먼저 발견한 직장인은 그 안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이어서 무거운 짐을 든 여성, 작은 나무 한 그루를 담은 에코백을 메고 있는 남성, 걸으면서 책을 읽는 학생,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온 소년, 결혼식을 막 올린 신랑 신부 등 각자의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도 점차 비좁아진 동그라미 안에 들어간다. <수학시험>(2010), <연애놀이>(2013), <존재의 집>(2022)에 이어 네 번째로 베를린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초청 받은 정유미 감독의 <서클>(2024)은 눈앞에 선택지가 여러 개 있음에도, 획일화된 선택을 하며 자발적으로 자유를 놓아 버리는 군상의 모습을 비추는 애니메이션이다. 누군가의 자의적인 행위로 그려진 원을 가장 먼저 발견했지만 어떤 고민도 하지 않는 모습과 더불어, 이미 벌어진 일에 의문을 품지 않고 동조하는 모습은 사회 및 타인이 정립한 기준에 무의미하게 따르는 군상을 환기한다. 물론 자리가 점점 좁아지자 서로 조금씩 움직이며 공간을 확보하거나, 오로지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두는 이들의 모습은 원점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공동체의 무언의 약속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서클>에서 누가 언제 이 동그라미를 그렸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는 점은 과연 이를 공동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만약 이게 공동체라면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의미가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관념적인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끌어올리는 정유미 감독만의 세밀한 연필화가 힘을 발휘하는 대목이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단편]

<나츠메 아라타의 결혼>(夏目アラタの結婚, 2024)
아동 복지센터 공무원 아라타(야기라 유야)는 아버지의 사라진 머리를 찾고자 하는 소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시나가와 피에로’로 유명한 연쇄 살인마 신쥬(쿠로시마 유이나)를 만나지만, 본인이 편지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키자 그녀에게 충동적으로 청혼한다. 2024년 3월 29일 완결된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나츠메 아라타의 결혼>(2024)은 예기치 못한 아라타의 프로포즈를 기점으로 신쥬의 정체와 그녀가 저지른 살인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이야기의 형태를 우선적으로 가져간다. 허나 공판이 진행되면서 아라타와 신쥬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진짜 동기가 드러나고, <나츠메 아라타의 결혼>은 <고백>(2010), <세 번째 살인>(2017) 등과 같은 작품의 장르적 맥락에서 벗어난다.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태어나 평생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신쥬는 아라타가 본인의 선한 면과 악한 면을 재단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봤으면 하는 진심을 숨기지 않고, 아라타는 일그러진 호기심으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던 시간의 끝에서 신쥬를 향한 간솔한 마음에 비로소 당도한다. 원작과 달리 ‘아라타’의 전사를 덜어낸 각색은 오히려 두 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고 미묘한 관계 변화에 집중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이해와 공감의 단계로 진입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게 아라타와 신쥬 모두 누군가를 기다려줄 수 있고, 누군가를 위해 버틸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한편 <아무도 모른다>[간니발] 야기라 유야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퍼레이드> 쿠로시마 유이나의 탄탄한 연기력은 이질적인 두 장르 ‘서스펜스’와 ‘로맨스’가 조화를 이루게 하며, <나츠메 아라타의 결혼>만의 쌍방 구원 서사를 완성시킨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 매드 맥스]

<뻐꾹!>(Cuckoo, 2024)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갈라 부문에 공식 초청된 바 있는 <뻐꾹!>(2024)은 엄마와 사별한 17세 소녀 그레첸(헌터 샤퍼)이 미국을 떠나 아빠의 새 가족과 함께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알프스 산간에 있는 한 리조트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을 맞이해 주는 사람은 리조트의 주인이자 마을에 있는 의료 시설에서 진행 중인 기밀 프로젝트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있는 쾨니히(댄 스티븐스)다. 쾨니히는 그레첸이 리조트 리셉션 데스크에서 일할 수 있도록 과도하게 친절을 베풀 뿐만 아니라, 쌍둥이 소실 증후군을 겪으면서 태어나 수어 혹은 음성 애플리케이션으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알마(밀라 리우)에게 지나친 관심을 두며 기이한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남의 둥지에 기생해 알을 낳는 새를 일컫는 기생조(寄生鳥)로 알려진 뻐꾸기를 소재로 삼는 <뻐꾹!>에서 미스터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클로즈드 서클을 활용한 기존 작품들과 비슷하며, ‘König’를 음차 표기한 ‘쾨니히’는 ‘왕’ 혹은 ‘왕과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관습적인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틸만 싱어 감독은 공포와 미스터리의 실체를 진부하게 설명하는 대신, ‘어떤 멜로디에 반응해 떨리는 목울대 및 귀 근육’,‘특정 시간대에 일어난 행위의 반복’, ‘메스꺼움으로 인해 구토하는 여성들’을 비롯해 특정 이미지들을 반복하며 장르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한편 극의 중후반부에는 그레첸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는 미스터리와 알마가 겪는 발작은 멸종이 두려워 번식에 집착하게 된 남성들의 뒤틀린 욕구와 유관하다는 게 드러나는 반면, 여성들의 신체를 통제하려는 이들의 계획에 반하는 선택을 내리는 그레첸의 모습은 작중 말미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천 초이스: 장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