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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진가-로버트 카파,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 | ARTLECTURE

전쟁사진가-로버트 카파,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Art & Preview/
by 노용헌
전쟁사진가-로버트 카파,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
-사진에 관한 짧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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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빛, 사진과 폭력, 수지 린필드, 바다출판사- 를 읽고

     



1.낙관주의자-로버트 카파(Robert Capa)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해야만 한다.

어느 한쪽의 입장에 있지 않으면 주위 상황을 견뎌낼 수 없다

-로버트 카파   

  

그럼에도 카파 사진의 핵심에는 역설이 존재한다. 비록 전쟁사진가였지만 그의 주된 관심사는 신체적 고통이나 잔학행위, 전투나 죽음이 아니었다. 지금은 이토록 친숙해진 인간의 비참상을 담은 암울한 사진은 카파가 특히 싫어한 것이었으며, 그의 가장 뛰어난 사진은 전쟁 자체를 찍은 사진이 아니다. 


대신 카파는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스페인에서 그는 공화파 민병대의 인물사진을 다수 찍었다. 때로는 충격적일만큼 늙고 때로는 충격적일만큼 젊은 민병대원들의 얼굴은 맨 처음 희망과 미소로 빛난다. 한편으로 고단하고, 주름지고, 진지하고, 결의에 차 있고, 근심 어리기도 한 이 얼굴들은 마침내 비탄에 빠지고 만다. 카파의 사진은 이 사람들이 전쟁을 근사한 모험이라기보다 가슴 아프지만 불가피한 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카파는 공포에 질린 도시와 시골의 민간인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폭격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P274-275)     


카파의 사진과 동시대 전쟁사진가가 찍은 사진의 차이는 극명하다. 부상과 장애를 입은 신체의 시각적 묘사는 카파의 시대 이후로 그 종류와 양이 급격히 증가했다. 잔학행위를 강조하여 묘사하는 경향이 포토저널리즘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내 생각에 이는 오히려 전쟁과 폭력, 정치 자체의 근본적 변화를 보여준다. 카파의 작품을 보며 우리는 그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깨닫는다.       (P276)     


회고록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에서 카파는 당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라인 강에서부터 오데르 강에 이르기까지 사진을 찍지 않았다. 강제수용소는 사진가들로 우글우글했고 참상을 담은 사진들은 새로 찍힐 때마다 전체적인 효과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유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카파는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나 승리주의자가 아니었다. 고통이나 패배를 묘사하는 일을 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앙드레 말로처럼 카파는 인간 존재가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모든 작품이 입증하듯이, 그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의 고통을 겪고 순전한 희생자가 된 사람들의 절대적 무기력과 철저한 굴욕을 사진으로 담는 데 선천적 반감을 느꼈다.       (P287-288)    

 

카파의 사진, 특히 이스라엘과 스페인에서 찍은 사진은 유달리 날카롭게 묻는다. 사진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는가? 또 우리가 사진에 추후 알게 된 지식을 부여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반대로 자신의 신념과 편견과 감정을 사진에 투사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브레히트부터 포스트모던 비평가에 이르는 긴 목록의 비평가들이 특히 정치적 윤리와 관련해 사진은 어떤 내재적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손택은 “사진이 도덕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느냐는 그에 상응하는 정치의식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말했다. 의식이 부재한다면, 또는 생겨나기도 전이라면 사진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일까?


어떤 점에서 이런 질문은 성립 불가능하다. ‘춤추는 사람과 춤을 나누는 일’은 그것이 사진의 문제일 때 특히 어렵다. 분명 카파의 일부 인물사진에서 누가 누군지를 구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 인물의 행적과 동기는 말할 것도 없다.   (P304-305)     


그럼에도 사진 속 얼굴들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으며, 기만적이라는 악명을 얻을 수도 있다. 범죄자는 결백해 보일 수 있고, 거짓말쟁이는 정직해 보일 수 있다. 겁쟁이는 용감해 보일 수 있고, 악인은 (특히 자기 자식에게 입맞춤을 할 때) 선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겉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해도,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은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과연 누가 굳이 사진을 –또는 세계를- 보려 하겠는가? 사진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은 –예술이나 저널리즘의 다른 형식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은- 즉각적인 이미지와 우리가 그것을 보고 떠올리는 더 장기적이고 때로는 무의식적인 연상, 숨은 의미, 방대한 지식 사이의 독특한, 그리고 독특한 힘을 가진 변증법읻. 가장 중요한 것은 프레임 안에 있지 않고 프레임 밖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관계며, 다큐멘터리 사진의 의미와 힘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P312)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카파의 신념은 바보스러울 만큼, 어쩌면 용서 못할 만큼 낭만적으로 보일 것이다.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파가 우리는 모르는 많은 일을 겪었고, 따라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실을 알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카파의 사진을 볼 때 내가 확신하는 것이다.   (P315) 







2.파국주의자-제임스 낙트웨이(James Nachtwey)


어쩌면 신 자신도 타락했을지 모른다.

-제임스 낙트웨이    

 

제임스 낙트웨이의 사진에서 우리는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이 이런 이상과 결별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게 된다. 낙트웨이의 이미지는 허무주의적이거나, 흔히 비난받는 것처럼 포르노그래피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몹시 까다로우며,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다. 더할나위 없이 적나라한 잔학행위를 묘사하지만 그 잔학행위가 종교적, 정치적, 역사적 구원과는 더 이상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는 까닭이다.  (P316)     

아렌트가 말한 ‘인간쓰레기’는 낙트웨이의 사진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그래픽적 강렬함을 획득한다. 묘사는 대개 충격적일 만큼 잔인하며 본능적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낙트웨이의 사진은 정치적 명확성이 소멸한 자리에 남은 이미지가 얼마나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사진은 이 문제를 특히 과장된 방식으로 제기한다. 사진이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다큐멘터리 사진 –목격자의 사진- 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허무주의의 전쟁 –메무나의 전쟁- 이 피사체가 될 때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P317)      


낙트웨이의 사진에서는 비참과 고요함, 도발과 완벽한 통제, 끔찍한 내용물과 양식화된 형식이 기묘하고도 강렬하게 조합되어 있다. 한마디로 시각적으로 표현된 모순어법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 완벽한 구도, 이른바 아름다움이 우리의 눈을 속이지는 않는다. 낙트웨이의 사진은 난폭하며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코 필요 이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낙트웨이는 가학증 환자가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고통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일종의 구성된 통일성을 의미한다면, 그의 사진 일부를 특징짓는 아름다움이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읻. 그러나 아름다움이 비윤리적인가? 낙트웨이의 시적인 감각 때문에 피사체의 산문적 고통이 가려지는가? 확실히 답하기는 어렵다. 아니 차라리 그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대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낙트웨이를 포르노그래피, 관음증 환자, 기회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제기하는 우리 시대의 폭력에 대한 곤혹감을 단순히 회피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P326)   

  

낙트웨이는 가상의 영역 –사진의 영역-에서 질서를 찾을 것을 고집한다. 그는 혼돈 속에서 통일성을 암시한다. 허무주의 속에서 형식을 발견한다. 파편 속에서 연결점을 찾는다. 잔혹함 속에서 우아함을 가려낸다. 낙트웨이는 때로 스스로를 타인의 고통을 전달할 뿐인 목격자 –실제로는 종복-로 묘사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정반대다. 그의 사진은 피사체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변형시킨다. 피사체의 삶과 죽음의 조건들을 단순히 전달하기보다 정제하고, 구조화하고, 응집시킨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노역을 하면서도 단테를 암송했던 것처럼 낙트웨이가 고집하는 구조는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할지 모르는 더 정상인 세계를 상기시킨다. 무자비하게 우리를 부정부 상태에 내던질 때조차 말이다. 낙트웨이의 야만의 기록이 한편으로는 문명의 기록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낙트웨이는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며 고통에 형상을 부여해 (거의) 인식할 수 있는 형태로 빚어낸다. 그는 모든 특별한 고통을 인간의 숙명으로, 인간이기에 겪는 모든 특별한 숙명으로 제시한다. 공허하거나 착취적인 충동이 아니라 차라리 삶을 긍정하는 충동이다.   (P330-331)     


낙트웨이의 사진은 카파의 사진이 취한 입장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 않는데 –취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낙트웨이의 입장에서 그러기 위해서는 야만을 낭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낙트웨이가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P334)     


“우리는 우리가 사진찍는 사람들처럼 개인적으로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고통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을 목격했을 뿐이다.” 이들이 기록한 투쟁처럼 이들의 작업도 꼭 필요하고 정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백하다거나 이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네 사진가들은 친구이자 동료인 제임스 낙트웨이가 언젠가 “자신을 저격수의 총구 앞에 드러내기로 결심한 순간보다 더 자유로운 순간은 결코 없을 것이다.”라고 한 말에 –아마도 조금은 겸연쩍게- 거의 틀림없이 동의했을 것이다.  (P343)     


제임스 낙트웨이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쩌면 계속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가 눈앞에 들이미는 고통에 결코 단련될 수 없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다. 낙트웨이는 자신의 “악귀 같은 잔학함”을 보여줄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그 이유는 올바른 방법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목격한 범죄와 파국과 전쟁은 결코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나 그것을 보여주는 일은 틀린 일도, 쓸모없는 일도 아니다. 그의 재능과 한계는 때로 우리를 격분시키지만 사태를 더 가까이 보게 하며 최소한 더나은 실패를 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제임스 낙트웨이의 사진이 필요하다. 비록 보고 싶은 사진이 아닐 것은 거의 분명하지만 말이다. (P355-356)







3.회의주의자-질 페레스(Gilles Peress)


우리는 아주 빨리 진행되는 역사의 속도와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 진보의 속도가 빚어내는 긴장 속에 있다.

-질 페레스  

   

그는 말한다. “언어는 현실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1971년이 되자 언어는 광기의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치적 언어는 “점점 더 지적 질병처럼” 되어갔고, 현실을 바꿀 도구가 되기보다 현실과의 관계를 대신하는 대체물이 되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페레스는 말의 세계에서 이미지의 세계로 피신했다. 로버트 카파가 저널리스트의 언어를 갖지 못해 사진가가 된 반면, 페레스는 더 이상 언어를 믿지 못해 사진가가 되었다. 

페레스에게 사진은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의 사진은 그가 보고 있는 것의 기록이라기보다 그것과의 또는 그것에 대한 논쟁인 것처럼 보인다.   (P358-359)  

   

페레스의 사진은 해석하기 어렵지만 결코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그의 주제는 단순히 복잡한 것 이상읻. 현실에서 이런 주제를 찾고, 전달하고, 무엇보다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그리고 어렵고, 실제로 보통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페레스의 사진은 실패에 관한 사진이 된다. 고칠 수 있는 개인의 결점으로서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 조건의 견딜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측면으로서의 실패다. 페레스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그가 “자기회의의 방법론”이란 부른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다.  (P359)     


페레스가 깊이 천착하는 것은 그가 “역사의 저주”라 부른 탈출하기 힘든 악몽이다. “기억한다면 우리는 저주받는다. 그 벌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다시 체험하고 재연하는 것이다. 기억하지 않는다 해도 저주받는다. 그 벌은 아버지의 위선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P360)     


사회 참여적인 대다수 사진가와 달리 그리고 다양한 인도주의 및 인권 단체와 작업을 했음에도 페레스는 자신이 사진을 찍는 가장 큰 목적은 정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사진이 “현실과 내가 맺는 관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도구이자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내가 사진을 찍는 가장 큰 목적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개인으로서 내 입장을 결정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페레스의 사진에 유아적 측면은 전혀 없으며, 그에게 사진이 단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는 쓸모를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는 인간의 내면만을 파고드는 사진계 추세의 변화를 “세계를 다루지 못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무능력”이라 부르며 맹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이런 무능력은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할 방법이 없으며 따라서 밖으로 나가 세계를 보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세계를 보려하지 않는데 어떻게 세계를 바꿀 수 있겠는가.” (P362)     


페레스의 관점에서 사진은 살아가고 변화를 겪는 민주적 과정이다. 사진은 “텍스트의 절반이 독자 안에 있는” 열린 기록이다. 감상자는 사진이 암시하는 바를 파고들어 더 깊은 통찰을 부여함으로써 사진을 완성하도록 힘써야 한다. 사진은 “내 언어가 끝나고 너의 언어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페레스는 모든 이미지에 네 명의 저자가 있다고 말했다. 사진가, 카메라, 감상자, 마지막으로 현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큰 목소리를 내며”, 실제로 가장 “맹렬히” 말하는 저자는 현실이라고 주장한다.(P365)     


페레스는 자신이 “포스트-포스트모던”이라 부르는 이 시대에 인터넷이 반권위주의의 잠재성을 지닌 도구가 되리라고 상상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시각적 언어가 사진가와 관객 사이의 대화로 정의되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이것은 이미지가 민주적으로 게시됨은 물론 민주적으로 해석됨을 의미한다.” 감상자는 더 이상 고마워하는 수동적 학생이 아니며, 사진가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어서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살리고 죽일지 선택하는 선생이 아니다. 페레스는 “권위 있는 단일한 목소리, 위로부터 창조된 일의적인 이미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미지의 창조자를 니체식 반신반인으로 여기는 잘못된 관념”에 안녕을 고해야 한다. “지금의 현실을 형상화하려면 깊은 겸손과 겸허함이 필요하다.”  (P395-396)     


페레스는 사진이 “여전히 현실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세계 속 우리의 자리를 재조직하는 공간”이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현실의 외양을 해방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사진술의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내내 되풀이되어 왔다. 이 질문은 벤야민과 브레히트까지 거슬러 올라가 몇 대의 사상가들의 머릿속을 맴돌며, 이들을 분노케 하는 한편 자극시켰다. 그럼에도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이미지들을 낳은 한 세기가 지난 후 그리고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폭력을 낳은 한 세기가 지난 후, 페레스는 어떤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또 다른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뿐 아니라 저널리스트, 영화제작자, 인권운동가에게까지 해당되는 질문인 이것은 사실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상처 입은 세계의 모든 거주민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할 것인가?” 페레스의 질문이다.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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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노용헌_사진기자 - 사진을 찍을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사진관련 일로 생활하고 사진찍으며 사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