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아카이브, 아카이브 예술
‘아카이브(archive)’는 유독 예술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인데 그 정확한 의미를 짐작하기 쉽지 않다. 쉽게 말해 아카이브란 기록 보관소이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는 예술 자료들의 모음집인 ‘예술 아카이브’를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형태로 보관하며 이와 관련된 콘텐츠나 행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기획하는 전시는 그 자체로 아카이브이거나, 아카이브의 방식으로 작업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록과 모음, 수집의 방식으로 어떤 예술 작업을 할 수 있을까? 온 가와라(On Kawara)의 작품을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Today> 연작이다.
출처: https://onkawara.co.uk/
새까만 배경에 흰색으로 날짜가 쓰여 있다. 언뜻 단순해 보이는 이 그림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세심하게 공들여 완성된다. 캔버스에 다섯 번씩 바탕색을 칠하고, 그날의 날짜를 늘 같은 서체로, 흰색 물감을 사용해서 일곱 번씩 칠한다. 그리고 캔버스 뒷면에는 그날의 신문을 넣어 보관한다.
출처: https://onkawara.co.uk/
작가는 이 작품을 하루에 세 개까지만 제작했고, 만일 자정까지 완성하지 못한다면 중도에 파기했다. 굉장히 기계적이며 철저하게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https://onkawara.co.uk/
또 가와라는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매일 자신이 위치한 지역의 엽서에 그날의 기상 시각과 장소를 도장으로 찍어 누군가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것들이 모인 아카이브가 그의 또 다른 대표작 <I Got Up> 연작이 되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매일 아침 일어나고, 늘 어떤 시간과 공간에 위치해 있지만 가와라는 이런 일상적인 것들을 기록하고 모아두거나 누군가에게 알림으로써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엽서를 보내는 한두 번의 해프닝이나 한두 점의 그림으로 끝났다면 지금과 같은 이야기와 가치는 없었을 것이다. 수년 간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기록함으로써 아카이브를 이루고 예술사에 있어 중요한 작품이 되었다.
<이력서: 박미나와 Sasa[44]>
‘아카이브’가 무엇인지, ‘아카이브’의 방식으로 예술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이해했다면 이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진행하고 있는 전시 <이력서: 박미나와 Sasa[44]>를 둘러보자.
출처: 본인 촬영
박미나와 Sasa[44] 작가는 약 20년째 함께 해온 동료라고 한다. 두 작가 모두 무언가 수집하기를 좋아하고 원본과 복제본에 대한 고민을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보여주는 작업을 한다. 이번 전시는 ‘이력서(CV)’라는 콘셉트로 구성되어 있고 크게 1부(전시 이력), 2부(참고 문헌)으로 나뉜다. 이력서는 원하는 곳에서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개성과 역량, 경험, 이력을 A4용지 한 장에 담은 문서로, 일종의 압축된 아카이브다.
아카이브 예술로 가득 채워진 아카이브인 ‘이력서’ 전시가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에서 진행되고 있다.
출처: 본인 촬영
전시실 입구로 들어가면 맨 먼저 두 작가의 협업 작품이 나타나는데,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화살표들이 보인다. 보통의 전시는 동선이 정해져 있어 따라가도록 되어 있는데 이 벽을 마주한 순간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출처: 본인 촬영
Sasa[44] 작가의 <연차보고서>는 ‘한 해 동안 자신이 소비한 설렁탕 그릇 수 월 별 집계’와 같이 웃음이 나오는 통계 자료들을 표와 그래프로 만든 것이다.

출처: 본인 촬영
플라스틱 조립 모델을 구매해서 <아카데믹하지 않아?>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 레지던시 기간 동안 마신 음료 병을 모두 모으고 항목별로 표로 정리한 작품 <2004년 7월 15일에서 9월 25일까지 호주 IMA 스튜디오 1에서 Sasa[44]가 마신 음료수>도 있다.
출처: 본인 촬영
위 사진은 박미나 작가의 작품으로, 문구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초록색 볼펜으로 가로줄을 그은 것이다. 볼펜 하나당 액자 하나를 차지하여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종류의 초록 볼펜을 사용했다.
빨간색 아크릴 물감을 모두 수집해서 일정한 간격으로 칠한 <2004-빨강색-TV 유닛>, 코리아나 화장품에서 판매하던 립스틱을 모두 수집해서 종이에 칠한 <2005-코리아나-립스틱>도 만나볼 수 있다.
그밖에 두 작가가 언급된 기사를 전부 모아 책으로 만든 <참고문헌 일부>도 전시실 2에 설치되어 있다.
원본과 복제본
박미나, Sasa[44] 두 작가는 줄곧 원본과 복제본 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원본과 복제본에 관한 논의는 약 백여 년 전, ‘기술복제’의 출현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술복제란 사람의 손으로 글이나 그림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기계를 이용한 복제 방식이다. 판화에서 발전한 인쇄 기술은 똑같은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디자인의 제품을 사용하거나 똑같은 디자인의 포스터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카메라가 만들어낸 영화 기술은 똑같은 장면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심지어는 여러 번 볼 수 있도록 했다.
기술 발전은 예술을 손쉽게 감상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그렇기에 복제본에 익숙해질수록 원본이 지닌 권위나 신비로움은 사라져갈 수밖에 없다. 때로는 원본과 복제본의 경계가 희미해지기도 한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앤디 워홀(Andy Warhol)은 기술복제의 이런 점을 대담하게 이용했다. 그의 작품 <브릴로 박스, 1964>는 당시 시중에 판매되었던 세제 브랜드 브릴로의 박스 디자인을 실제 크기와 똑같이 판화로 복제한 것이다. 이미 대량생산된 상품이었던 세제 상자를 베껴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러면 원본은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본일까?
21세기의 새로운 기념비성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앞서 언급한 온 가와라, 앤디 워홀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인 로버트 스미스슨(Robert Smithson)은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이용해 당대의 예술 흐름을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엔트로피는 본래 열역학 용어로, ‘무질서도’를 뜻한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는 속성이 있다. 이 부분은 너무나 깊고 어려우니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통계학(정보이론)에서도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불확실성’, ‘평균 정보량’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스미스슨은 1966년 자신의 에세이 <Entropy and the New Monuments(엔트로피와 새로운 기념비들)>에서 ‘엔트로피’와 ‘기념비’를 새로운 언어로 정의하고 이 용어들에 빗대어 예술 흐름을 설명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원래의 기념비는 과거의 것을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해야 했기에 오랜 시간을 버텨낼 수 있도록 단단하고 영구적이어야 했다. 과거의 예술 작품이 그랬던 것이다. 반면 새로운 기념비들, 즉 당대에 새롭게 등장한 작품들은 미래를 잊게 하는 일시적인 기념비였다.
댄 플래빈(Dan Flavin)의 형광등 설치 작품처럼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기계나 전기 기술을 이용한 작품들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라질 시간에 대한 기념비’이며 이것은 즉 ‘엔트로피에 대한 기념비’이거나,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기념비’라는 것이다. 과학 용어로서의 ‘엔트로피’의 의미로 직역하자면 ‘무질서도에 대한 기념비’ 또는 ‘불확실성에 저항하는 기념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워홀의 <브릴로 박스>가 디자이너의 원본 스케치를 토대로 복제하여 만든 공산품의 포장 상자를 다시금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며 기념비화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누군가 집에서 구운 쿠키를 본떠 공장에서 가능한 비슷하게 반복 생산한 쿠키 또한 예술가의 개입으로 기념비화할 수 있다.
스미스슨이 이 글을 썼던 시점에서 60년 가량이 흐른 지금의 기념비성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과거에는 대단한 사건이나 인물이 기념비가 되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기술의 발전으로 모두가 개인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게 되며 일상의 매 순간을 비물질적으로 기록한다. 별것 아닌 일상까지,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일시적으로 기념비화하고 그 기념비들마저 쉽게 잊어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박미나와 Sasa[44]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전시에 등장한 작품이 아닌 것들, 예를 들면 립스틱, 볼펜, 음료수 병, 행위의 기록물은 모두 으레 사라져버리는 것들이며, 영구적이라기보다는 일시적인 대상이다. 이것들에 작가가 개입하여 다시 물질적 속성을 부여해 회화나 아카이브라는 새로운 기념비로 재탄생한다.
개인 모두가 복제의 주체임과 동시에 복제의 대상이 되는 지금, 우리 모두는 스스로 디지털 세상 속 기념비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우리가 젤리처럼 말랑말랑한 기념비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끊임없이 녹여버리는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번 전시 <이력서: 박미나와 Sasa[44]>에서 반영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어보고 생각해 봄직한 질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