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은 만남 사이에 있다.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어느 하루. 간신히 시간을 조각내어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기로 한다. 몇 달 혹은 몇 년 만에 만나는 자리이니 만큼 멋도 있고 맛도 있는 그런 맛집을 찾아내야 한다. 간단하지만 눈이 즐거운 브런치도 좋겠고, 조금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파스타집도 괜찮겠다. 모던한 인테리어가 일상에서 쪼그라든 가슴을 다림질 해주는 것 같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습관적으로 메뉴를 훑는다. 하지만 이미 검색으로 어떤 메뉴를 시켜야 할지 찾고 있을 뿐이다.
레스토랑의 실내 Interior of a Restaurant, 1887 Vincent Van Gogh(1853-1890), ©Kröller-Müller Museum
고흐는 1886년 파리로 이주한 후 페르낭 코르몽의 스큐디오에서 앙리 툴루즈 로트레크와 에밀 베르나르 등을 만나 친분을 가졌다. 당시에는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이 나타날 때였는데, 그는 쇠라와 시냐크에게서 점묘법을 흡수하며 몇 점을 그렸다. 1887년에 그린 <레스토랑의 실내>는 그중 하나다. 이러한 시도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흐에게는 이 방법이 자신의 예술적 스타일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레스토랑의 내부 공간에서 사용된 점과 선의 조합이 은은하고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밤의 카페가 화려한 도시 파리에서 고흐는 로트렉의 그림, 베르나르의 그림, 고갱의 그림, 쇠라의 그림과 소통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그림과 그림의 만남 사이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 사이에는 음식이 있다.
음식 그림
Clara Peeters(1594~?), 꽃이 있는 정물, 은도금 잔, 말린 과일, 사탕, 빵 스틱, 와인 및 백랍 주전자
(Still Life with Flowers, a Silver-gilt Goblet, Dried Fruit, Sweetmeats, Bread sticks, Wine and a Pewter Pitcher), 1611, Museo del Para, Madrid 소장
드디어 탄성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음식들이 눈앞에 한둘씩 차려진다. 수저나 포크를 먼저 드는 것은 어쩐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거나, 찍고 있는 동안을 잠시 기다린다. 스마트폰을 늘 지니고 다니는 현대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음식이 나오면 사진기부터 드는 습관이 생겼는데, 음식 사진들을 보면 대체로 서양의 정물화가 떠오른다.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굴벽화, 혹은 이집트나 이스라엘의 고대 벽화부터 이겠지만, 음식에 중점을 둔 정물화의 관습을 정립한 건 17세기 네덜란드 회화로부터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음식물이나 식기 등을 쌓아놓는 형태로 묘사된다. 펼쳐진 식탁보라든지, 비스듬하게 놓인 나이프, 빛나는 금속 병이나 반쯤 남은 페이스트리 등이 특징적으로 등장하는데 식사 중이나 식사 후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약 200년 동안 음식 그림의 주류를 형성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과일, 생선, 조개, 햄, 포도주가 담긴 잔, 빵, 파이, 닭고기, 올리브, 견과 등은 이후 수 세기 동안 정물화의 표준으로 자리잡는다.
존 버거는 그의 책 Ways of Seeing에서 대략 1500년에서 1900년에 걸친 서구의 전통적 유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유화는 흔히 현실에서 실제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림을 산다는 것은 그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물건의 외양을 동시에 사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림의 주제와 주제를 다루는 방식, 즉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보는 방식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유화의 시각 이미지는 사진과 영상이라는 매체로 단지 대체 되고 있을 뿐일지 모르겠다.
그의 책에 인용되어 있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말이 욕망에 대한 이해를 더해주는데,
“물건의 소유자 입장에서나 심지어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 같이 이렇게 탐욕스럽게 물건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서구 문명의 미술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두드러진 특색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이 “탐욕스럽게” 라는 기독교적 도덕관념에서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하는 세속적인 물질의 무가치함에 대한 교훈적인 정물화가 그려지기도 했다.
Norman Rockwell (1894-1978), Freedom from Want, 1943. Oil on canvas, 45 3/4″ x 35 1/2″. Story illustration for The Saturday Evening Post, March 6, 1943. Norman Rockwell Museum Collections. ©SEPS: Curtis Licensing, Indianapolis, IN.
하지만 우리는 늘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꾼다.
이미 내 눈앞에 있는 음식, 분위기 내 손에 들어오는 작은 모바일 기계 하나로 현대의 우리는 또 무언가를 그토록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당시 미국 최대 주간지인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의 표지를 장식한 미국의 화가 노먼 록웰이 그린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1941년 연두교서 연설에서 강조한 ‘네 가지 자유(언론과 의사 표현의 자유(Freedom of speech and expression) 신앙의 자유(Freedom of worship) 결핍으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fear)’ 중 한 점이다. 추수 감사절을 맞아 가족이 모여 식탁에 앉아 칠면조 요리를 상기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빈곤이나 불화를 느낄 수 없는 미국의 이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평화로운 설레임을 표현하고 있다.
욕망은 결핍으로부터 비롯된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연설 속에서도, 노먼 록웰의 그림 속에서도 볼 수 있듯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어 돈을 벌러 다닌다. 하지만 늘 부족하다. 돈도 시간도 우리는 늘 부족하기 때문에 욕심을 부린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탐욕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따뜻하고 풍성한 순간들인 것은 아닐까.
참고: 크뢸러 밀러 미술관 https://krollermuller.nl/en
프라도 미술관 https://www.museodelprado.es/
노먼록웰 미술관 https://www.nrm.org/
궁핍으로부터의 자유_ 노먼록웰 https://www.sedaily.com/NewsView/1VGH0RAJYB
존 버거,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열화당 케니스 벤디너, 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 예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