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Twitter

Artlecture Blog

Artlecture Post

Artlecture Band

Artlecture Main

[TTP] - 탁구대 이야기 | ARTLECTURE

[TTP] - 탁구대 이야기


/Artist's Studio/
by 최다운
[TTP] - 탁구대 이야기
VIEW 2464

HIGHLIGHT


“똑같은 탁구대가 있는 풍경 사진만 백 장 넘게 보는 일이 지루할 거로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리듬감 있게 흘러가는 이미지가 매번 다른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다양한 날씨와 미묘하게 변하는 탁구대의 위치 같은 요소가 사진에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양한 시각적 요소의 흐름이 통통 튀며 리듬을 만들고, 독자에게 사진을 보는 재미를 줍니다."

얼마 전 한 사진집이 4쇄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벌써 2년 전 뉴스였지만, 그래도 사진 책이 4쇄라니 흔치 않은 인기입니다.


책장을 뒤져 그 사진집을 꺼냈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몇 년 전에 책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 봤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놀랐습니다. 



[TTP] 표지.



자칫 밋밋해 보이는 풍경 안에 담긴 이야기를 상상하다 보면 시간이 금세 흘러갑니다. 사진 속 젊은 부모는 먼 훗날 한 번쯤,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그곳을 추억할 겁니다. 구조물을 지지대 삼아 운동하던 청년도, 편안한 침대처럼 햇살 아래 누워 있던 소녀들도, 이것저것 잔뜩 늘어놓고 불꽃 연을 만들던 소년들도 언젠가 한 번쯤은 그 테이블을 떠올릴 겁니다. 장애물 넘기를 하듯 그물을 넘고 있는 꼬맹이들은 아마도 이곳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요. 그래도 사진가의 프레임 안에 자신들의 시간 한 조각을 남겨 놓고 떠났습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리는 사진집 [TTP](1st edition, MACK, 2018)는 일본 사진가 하야히사 토미야스(Hayahisha Tomiyasu)1)가 진행한 프로젝트입니다. 영국 출판사 MACK에서 발간한 이 책은 디자인부터 독특합니다.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왼쪽의 흰 여백과 오른쪽의 사진 한 쌍으로 구성한 책에는 목차도, 서문도 없습니다. 제목과 편집 디자인, 저작권, ISBN 같은 기본 정보를 책등에 작게 적어둔 걸 빼면, 텍스트는 뒤표지의 짧은 글이 전부입니다. 



책등에 작게 모아놓은 정보.



간결한 디자인은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토미야스가 고른 백여 장의 이미지는 똑같은 장소를 똑같은 구도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사물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탁구대(Tischtennisplatte: TTP)입니다. 사진가는 운동장 한편의 탁구대를 중심으로 흘러간 시간을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담았습니다. 


탁구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가 뜨나, 달이 뜨나 묵묵히 자리를 지킵니다. 누가 찾아오건, 무엇을 하건 원하는 대로 저를 내어줍니다. 먼발치에서 관찰한 탁구대는 그냥 탁구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책상이 되었고, 의자가 되었고, 옷걸이가 되었고, 침대가 되었고, 피크닉 테이블이 되었습니다. 해가 쨍한 날에는 그늘막이 되어 주었고,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날에는 까마귀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부부 혹은 커플.



똑같은 탁구대가 있는 풍경 사진만 백 장 넘게 보는 일이 지루할 거로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리듬감 있게 흘러가는 이미지가 매번 다른 풍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다양한 날씨와 미묘하게 변하는 탁구대의 위치 같은 요소가 사진에 생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다양한 시각적 요소의 흐름이 통통 튀며 리듬을 만들고, 독자에게 사진을 보는 재미를 줍니다.  


동시에 사진 하나하나를 주체성을 갖춘 독립적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프레임 안에 담긴 서사를 상상하며 생각의 나래를 펼치면 백 개가 넘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미야스의 사진은 똑같은 장소를 똑같은 구도로 찍은 풍경 사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면 백 개를 찍은 풍경 사진입니다. 



Outdoor gym for all ages.



그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는 한 여름날 오후의 산책길에서 마주친 여우였습니다. 작은 여우는 작가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님 무시했던 것인지 곧 숲으로 사라졌습니다. 보름 뒤, 아침에 일어난 사진가가 창밖을 내다보다가 여우를 발견했습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던 작은 생명체는 탁구대 옆에 잠시 멈춰 그것을 바라보더니 다시 제 갈 길을 떠났습니다. 


토미야스는 그날부터 종종 바깥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 번 여우가 나타나지 않겠냐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여우에 대한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던, 탁구대였습니다. 그렇게 한 장, 두 장 탁구대가 있는 창밖의 풍경이 쌓였고, 이것을 모아 책으로 엮게 되었습니다. 



흐린 저녁의 피크닉 테이블.



그런데 토미야스가 몇 주 혹은 몇 달 정도를 들여 사진을 찍고, 결과를 내밀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지금만 한 울림을 주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가 운동장 한편의 탁구대를 관찰하고 사진을 찍은 기간은 자그마치 5년입니다. 날짜로 세면 1,800일이 넘는 긴 시간입니다. 그만큼 프레임에 담긴 이야기는 더 풍성해졌고, 독자가 사진 속에서 만나는 감정도 더 깊어졌습니다. 


토미야스의 탁구대 이야기가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하신가요? 창밖을 관찰하기 시작한 지 5년여가 지난 어느 날, 작가는 초록색 포크레인이 찾아와서 탁구대를 철거하는 순간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독자는 여기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되지요. 왠지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마치 제가 그곳에 있었고, 그 탁구대를 자주 찾았던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마도 사진을 보면서 정이 들었나 봅니다. 한번 가보지도 않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공원 한편의 탁구대가 그렇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안녕, 탁구대.



각주.

1) 하야히사 토미야스는 오는 9월 22일부터 열리는 2023 대구사진비엔날레(http://www.daeguphoto.com/2023/content/theme/)의 주제전 <비포 애프터> 전시에 참여한다.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artlecture

글.최다운_아마추어 사진 애호가로 뉴욕의 사진 전문 갤러리에 대한 <뉴욕, 사진, 갤러리>를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