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악몽
그림속은 주홍빛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다. 공중에는 어떠한 건축물의 부서진 일부분, 혹은 고대 유적지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물체들이 열을 이루며 떠있다. 화면 윗부분에 떠있는 물체의 가운데에는 X자의 무늬와 푸른 빛의 돌이 있으며 사람의 얼굴같은 형체와 울리고 있는 종이 보인다. 어디에서 왔는지 알수 없는 이 물체들은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다.
Zdzislaw Beksiński, Untitled, 1973
(https://uploads0.wikiart.org/images/zdislav-beksinski/untitled-85.jpg!Large.jpg)
위 작품은 폴란드의 작가 즈지스와프 벡신스키 (Zdzislaw Beksinski)의 1973년 페인팅 <Untitled> 이다. 벡신스키는 초현실 작가로 환시 미술 (fantasy art)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폴란드 사녹에서 1929년에 출생해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었던 작가는 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퇴근 후 취미로 실험적인 예술 사진을 찍었고,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70년대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초현실적이며 때로는 잔혹한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 많은 작품들은 황무지나 전쟁 속 상황처럼 생명체가 보이지 않는 혹독한 풍경, 그리고 인간인지 괴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앙상하고 거친 생물체들이 보여진다. 많은 경우 작품 속 인물들은 살과 가죽이 없는 해골의 모습이고, 죽음이 생각나는 이 생물체들은 화면 밖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때로 이런 괴물들은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며 화면을 압도하고, 때로는 매우 작지만 헤아리기 힘든 표정과 몸짓으로 인해 공포감을 준다.
대부분의 작품에 제목을 붙이지 않고, 별다른 해설을 제공하지 않기에, 벡신스키의 작품을 보는 이들은 그가 겪은 전쟁시대와 관련지어 이런저런 해석을 한다. 부식된 교회나 거대한 십자가, 해골을 연결지어 전쟁을 반대하는 의미나 종교의 무지함,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 등 관객들은 그림속 상징을 찾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 속 등장하는 동물과 사물에 특정 상징성을 부여하지 않으며, 단지 보여주고자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한 인터뷰에서 벡신스키는 작업과정에서 몇가지의 사물과 그것이 연상케 하는 의미들이 서로 충돌하며 자연스럽게 특정한 내용을 만든다고 했다. 또한 많은 이들의 추측과 달리 벡신스키는 자신이 꾼 꿈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많은 초현실주의 그렇듯 작가는 그림 자체에 대한 고찰은 없고 무의식의 행로를 따라간다고 했다. 마치 꿈을 꾸듯 작업하지만 꿈이 영감의 원천은 아닌 것이다.
Zdzislaw Beksinski, Untitled, 1978
(https://uploads4.wikiart.org/images/zdislav-beksinski/untitled-1978-1.jpg!Large.jpg)
작업할때 클래식이나 록 음악을 들으며 무의식 속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벡신스키의 그림들은 헤비메탈과 연관될때가 많다. 그리고 실제로 작가의 작품들은 몇몇의 메탈 밴드의 앨범 커버를 장식하기도 했다. 죽음의 힘과 환상, 알수없는 천지적인 운명과 혹한 속에서 여정을 걷는 삶속의 회의를 주제로 노래하는 메탈의 예술관은 벡신스키가 보여주는 끔찍하면서도 웅장한 세계관과 서로 잘 어울린다. 2005년 생을 마감한 작가가 보여준 환상적이고 광활한 풍경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두려움, 경외감 같은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