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Twitter

Artlecture Blog

Artlecture Post

Artlecture Band

Artlecture Main

체코 프라하에서 만나는 아르누보 화가, 알폰스 무하 | ARTLECTURE

체코 프라하에서 만나는 아르누보 화가, 알폰스 무하


/Site-specific / Art-Space/
by uumin_ol
체코 프라하에서 만나는 아르누보 화가, 알폰스 무하
VIEW 2779

HIGHLIGHT


가장 고귀한 장소 슬라빈의 가장 성스러운 곳 비셰흐라드는 이곳에 체코와 프라하는 당신을 묻는다. 당신은 이곳에서 히라드차니와 성 비투스 성당을 보게 될 것이다. ... (중략) 영원한 평화 속에서 편히 쉬거라!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막스 스바빈스키, 무하 장례식 연설 중-

체코의 형형색색 건물들이 햇빛을 받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빛났다. 독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던 체코의 첫인상과 달리, 밤에 카를교에서 보는 프라하 성은 왜 체코가 동유럽의 대표 여행지인지를 보여준다. 가만히 길거리만 걸어도 예술의 영감들이 떠오를 법한 도시, 프라하는 중세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제각기 개성 있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프라하 성을 비롯해 구시가지 전체가 문화유산이기에 도보 여행객들에게는 최상의 도시이다. 정확히 도로의 정 가운데서 보이는 국립 박물관은 도로 끝에 우뚝 서 웅장함을 보여준다.


변신의 작가 카프카에의 고향이자 고뇌의 도시이기도 한 프라하는 낭만파 음악가인 안토닌 드보르작을 더불어 아르누보 양식의 선두주자 알폰스 무하가 예술의 꽃을 피워낸 도시다.







체코의 동부 지방에서 태어난 알폰스 무하는 어릴 때 데생에 유난히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는 걷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먼저 배웠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기어 다니면서 바닥에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목에 연필을 걸어 주었다고 한다.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무하는 프라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기회를 놓치고 대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법정에 취직시켜 주었다. 무하는 그 일이 수치스러운 나머지 원고와 피고의 캐리커처나 그리며 시간을 때웠다. 비엔나에서 극장 간판 화가 견습생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19살의 나이에 그는 직업 화가로서의 첫 발을 내딛는다. 이후 독일 뮌헨과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며 예술의 세계를 넓혀 갔고, 인쇄소에서 일하던 무하는 우연히 당대 최고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다음 공연 포스터 제작을 의뢰받았다. 명절에도 일터에 혼자 일을 하던 그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그는 <지스몽다(Gismonda)> 포스터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지스몽다> Gismonda, 1894



포스터는 세로로 좁고 기다란 모양, 실물크기보다 큰 2m가량의 포스터 속 사라는 비잔틴 귀족의 복장을 하고 난초 머리 장식을 하고 있다. 주인공 얼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화려한 문양의 아치는 무하의 전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파스텔 특유의 미묘한 색감을 바탕으로 제작된 포스터는 사라 뿐 아니라 모든 파리 시민의 엄청난 호응이 있었고 혁신적인 포스터로 평가받았다. 일부 수집가는 그 포스터를 얻기 위해 밤마다 그의 포스터를 띄어가기 위해 포스터를 찾아다녔다고 한다. 이후 무하는 사라의 연극 포스터 전담 제작자가 되었고 포스터 이외에도 연극 세트, 의상, 보석 등을 직접 디자인하기도 했다. 이렇게 지스몽다 포스터로 무하 스타일이 탄생했고 무하는 파리 아르누보 양식의 창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지스몽다> Gismonda, 1894



알폰스 무하는 자연에서 끌어온 것들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특성을 드러낸다. 여성과 계절, 시간의 흐름과 같은 것들을 대상으로 많은 포스터를 제작한 그는 자연주의적인 개념을 택하여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자로서 식물과 자연, 아름다운 여성의 양식화된 조합을 그려냈다.




The Four Arts cycle, 1898



하루의 일부를 대표하는 네 명의 여성이 고딕 양식 창문을 연상시키는 복잡하게 구성된 프레임 내부의 자연환경에 위치한다. 무하는 하루의 시간을 대표하는 네 명의 여성 모두를 맨발로 묘사하였고 각각의 장식 프레임 바깥으로는 야외 풍경을 담아냈다.



The Four Times of the Day, 1899



무하는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위해서 체코를 떠났지만 조국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뮌헨, 파리 또는 미국 어디에 있건 그는 체코 출신 예술가들을 불러 모으고 물심양면 도왔고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해 자신의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10년 무하는 체코로 돌아왔고 그는 체코의 독립을 염원하는 슬라브 대서사(Slav Epic)’ 20점을 그리며 여생을 보냈다. 그 작품들은 슬라브인들의 공로와 단결을 주제로 그려내어 애국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그는 프라하 시민 회관 내 마요르 영주의 전당의 장식, 체코 연극이나 축제 홍보 포스터, 국가 행사 포스터를 더불어 우표 및 지폐 도안 등을 제작했다.



Lottery, 1912 | Princess Hycinth, 1911



프라하에 있는 알폰스 무하 미술관에선 실제 무하가 그의 작업실에서 사용하던 물건들도 진열되어 있다. 여러 사진도 함께 전시되어 있는데, 무하의 친구 폴 고갱이 셔츠와 저고리만 입은 채 풍금 앞에 앉아 있는 사진은 전시 중 발견할 수 있다.






무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파리의 유명 인사가 되자 자신의 수집벽을 더욱 발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캐비닛 서랍 하나를 현금으로 가득 채워두고, 그의 친구들이라면 아무 때고 돈을 집어가게 할 만큼 인심을 썼다고 전해진다. 서랍이 비면 다시 채워두었고 프라하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파리에서 산 모든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여행 중에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체코 프라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알폰스 무하의 예술적 감성 덕분에 이토록 많은 관광객들이 프라하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체코는 훌륭한 아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래픽 디자이너 막스 스바빈스키가 무하 장례식 연설 중에 이렇게 언급했다. 이렇게 체코가 사랑하고 무하가 사랑한 프라하에 온다면 잠시 시간을 내 알폰스 무하 미술관에 들러 그의 작품들과 작품에 연관된 체코의 역사 또한 경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artlecture

uumin_ol_글로 기록을 남기고 그림으로 기억합니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