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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위대함 | ARTLECTURE

밥벌이의 위대함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 월터 랭글리-

/Picture Essay/
by 안노라
밥벌이의 위대함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 월터 랭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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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시간에 흠씬 두들겨 맞은 사람들이 나란히 앉았어. 폭풍에 몇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지. 모자와 스카프로 가린 근심은 모진 파도에 대거리도 잊은 채 입술마저 꾹 다물게 만들었구나. 바다로 나간 누군가를 기다리며 다가올 운(運)을 뜨개질하고 있는 여인들.
이른 출근길, 지하철 풍경에 마음이 곤죽이 되었다는 느루의 문자를 받고 나니 문득 이 그림이 생각났어.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월터 랭글리 <배를 기다리며, 1884>




월터 랭글리(Walter Langley, 1852~1922)의 <배를 기다리며, 1884>란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배어든 남루한 옷차림의 두 여인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어. 파도가 싸대기를 올려붙인다 해도 잠깐 찡그릴 뿐, 바다를 향한 저 눈길을 거둬드릴 것 같지 않구나. 고기잡이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것일까? 젊은 두 여인의 양 옆에는 꼭 그만큼씩 늙은 노파(老婆)도 보이네. 


젊은 여인들과는 다르게 노파는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아. 그녀들의 시선에 무겁게 매달린 건 '세월이 할퀴고 간 지난날'. 이제 '그녀들의 어제'를 장식했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조차도 해풍에 쓸리고 닳아 한 끼를 해결하는 마른미역 줄거리가 되었겠지. 조난, 난파, 실종 같은 삶의 매몰찬 언어들이 그녀들 감정에 방습제를 넣었을 테니까. 


느루가 문자로 갑자기 지하철을 멈추게 할 만큼 무거운 발걸음들이 커다란 콩나물시루 엎어지듯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고 했지. 아침 5시 40분이면 이른 시간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타리라곤 생각 못했다고 말이야. 검은 마스크, 허름한 웃옷 주머니를 삐져나온 핸드폰, 발목까지 오는 랜드로바, 헐렁한 바지, 어깨에 맨 큰 가방, 졸린 눈까지 모두 똑같다고 했지. 깜짝 놀란 네 모습이 보이는구나. 


느루야, 지금 고개를 들어 네 맞은편 졸고 있는 아저씨를 봐 볼래? 21세기 이른 아침, 노동으로 다져진 근육과 하루라는 시간을 화폐로 변하게 하는 연금술사들이란다. 책임이 움켜 쥔 얼굴을 하고, 여린 속살을 감추는 헛웃음의 갑옷을 입고 자신이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 매일 전투를 벌이는 현대판 기사(騎士)들이기도 하지. 또한 1884년 배를 타고 나간 사내들과 그를 기다리는 여인들이기도 해. 




월터 랭글리 <콘웰의 소박한 풍경, 1902>




뉴스나 활자로는 접했지만 하루하루 삶을 버티는 사람들의 생활을 느루가 직접 맞닥뜨려 본 적은 없었구나. 또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볼 때와 제법 사회 구성원으로서 '평등'이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부분에 고민을 할 때 접하는 것과는 크게 다르니까. 교과서라는 활자보다 현장이라는 교과서 밖 온도가 훨씬 뜨거우니까. 


그동안 느루는 보폭에 알맞게 계단을 올랐지. 중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을 갔고, 이제 취업을 준비하고 있고, 취직을 하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의 팔짱을 끼고 결혼식을 올리겠지. 미래의 시간 그 어디에나 상냥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예상할 거야. 하지만 인생은 오르는 계단이 있는 것처럼 내려오는 미끄럼틀도 숨기고 있단다. 무자비함도 삶의 또 다른 얼굴이지. 


엄마가 핸드폰으로 그림을 보낼 테니 함께 보련. 랭글리의 <A Cornish ldyll, 1902>이야. 엄만 '콘웰의 소박한 풍경'이라고 번역했어. 


바느질하고 있는 여인을 넋 잃고 바라보는 이 사내를 봐. 마음에 드는 여인 앞에서 삐딱한 자세로 파이프를 물고는 300kg의 참다랑어도 잡을 수 있는 굳센 팔뚝을 자랑하고 싶은 표정이잖아. 그는 그녀에게 비록 자신의 배는 없지만 평생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소박한 허세도 부렸을 거야. 주먹을 꾸욱 쥐며 당장 당신을 안고 싶지만 당신 마음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도 보였을 거야. 만선(滿船)이 되면 여인이 갖고 싶어 하는 반짝이는 머리핀을 선물하고, 머리핀을 꽂은 아리따운 여인에게서 자신의 아이를 낳을 거라는 꿈도 꾸었을 거야. 


물항아리를 발치에 두고 다소곳이 바늘귀를 찾는 여인의 몸짓은 또 얼마나 애틋하니! 마치 당신의 부족하고 헤진 삶을 '가족'이라는 바늘로 한 땀 한 땀 기워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니? 하지만 그녀는 몹시 조심스러워. 사내의 뜨거운 눈빛을 살짝 비껴 정숙한 바느질만 하고 있지. 아마도 그건 사내의 등 뒤에서 둘의 대화를 모르는 척, 귀 기울이고 있는 꼬마 때문이 아닐까? 이미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바닷가 삶이 남긴 어린 어부! 그녀 삶의 부표(浮標)!




월터 랭글리 <우체국 앞의 어부들-행방불명, 1884>




한 번도 창조를 연습한 적이 없는 신(神)이 며칠 동안 하늘과 바다를 주물럭거리고 나면 그 혼돈에 실성한 배가 곧잘 바다 끝에 고꾸라지곤 했어. 배와 운명을 같이 한 뱃사람들의 영혼이 하늘 같은 바다와 바다 같은 하늘 사이에 우왕좌왕하는 동안 어부의 아낙들은 아이를 토닥이며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 해가 뜨고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를 가르고 나면 비로소 우체국 벽에 바다로 주소를 옮겨버린 이들의 이름이 적히곤 했단다. 


생명에겐 수백 가지 형태로 죽음이 찾아오지만 남은 자들의 슬픔은 동일한 모습이지. 싸구려 술로 아픔을 달래 보거나 더 먼저 치른 슬픔이 나중 도착한 슬픔을 위로하거나. 주름만큼 아픔도 많았을 할머니는 젊은 새댁의 손을 붙잡고 그녀가 차마 마주 보지 못하는 현실을 부축하고 있어. 괜찮다고, 두려운 날도 지나간다고. 


느루야, 삶이란 풍랑에서 살아남은 사내와 살아남아야 하는 아낙들이 바구니를 짊어지고 다시 거친 바다로 나가는 거란다. 삶의 품격이란 소중한 걸 잃고 난 뒤에도 중심에서 도망치지 않고, 삶이 주는 피로와 궁핍에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에게 남아있는 존재와 귀한 가치를 지키는 일이지. 그러니 지하철을 타고 새벽을 건너는 사람들의 품위를 싸구려 자본주의의 논리로 폄하해서는 안될 일이야. 


더구나 코로나가 덮친 사회의 그늘은 깊고 넓어. 특히나 목소리가 작고 주머니가 얇은 사람들에겐 폭력적이지. 사회는 빈혈과 영양실조를 겪고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의 현실은 이토록 남루한 모습일 수 있단다. 




월터 랭글리 <가장들, 1896>



월터 랭글리 <어획물을 나르다>

   



월터 랭글리는 사회의 낮은 자리를 그렸구나. 거대한 자연 속에 묻혀 지내는 사람들, 산업화의 부스러기들, 자신이 젊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도 잊고 지내는 늙은 사람들을 그렸어. 그건 너무나 무거워 자신조차도 나르지 못하는 삶의 무게를 그의 어머니가 짊어지셨다는 걸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랭글리의 어머니는 문맹이었고 평생 가난했지. 하지만 행운을 구걸하지 않을 만큼 의지가 굳세었단다. 어머닌 당신이 살아보지 못한 세상을 아이에게 살게 하고 싶었나 봐. 랭글리가 다섯 살 되던 해, 그를 허스트 스트리트 유니테리언 선교학교(Hurst Street Unitarian Mission School)로 보내. 랭글리는 5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했어.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해야 하나? 그의 탁월한 회화 재능은 곧 두각을 드러냈지. 선생님(Benjamin Wright 목사라고도 해)은 열한 살이 된 랭글리에게 버밍엄 디자인 학교 야간수업을 권했고, 헌신적인 어머니는 랭글리의 수업료를 벌기 위해 세탁부 일을 시작하셨어.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가축처럼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에는 그를 위해 숭고한 땀을 흘린 어머니가 담겨 있어. 그의 붓은 잘 마른 수건처럼 어머니의 눈물을 닦아주었구나. 


랭글리는 한시바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열다섯 살이 되자 석판가의 견습생이 돼. 녹처럼 눌어붙은 가난은 끊임없이 그를 주저앉쳤고 일상의 골치 아픈 문제가 꿈에서 멀어지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랭글리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갖고 싶은 열망에 불탔어. 




월터 랭글리 




이 작품은 이때의 심정을 그렸는지 몰라.(이 작품의 제목과 년도는 찾지 못했어.) 화면 앞 가득, 생선들이 널브러져 있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생선들이지. 더 이상 보드라운 물결을 간지럽힐 수도, 유선형의 아름다운 몸매로 파도를 탈 수도 없어. 화면 밖으로 상하고 부패한 냄새, 비릿한 갯 냄새가 우리의 코를 찔러. 더 이상 파닥이지 않는 물고기들처럼 가끔 우린 현실의 창검에 찔려 피 흘리는 패잔병일 때가 있지. 삶은 너절하고 질척거려 발을 묶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하고. 


하지만 그는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어. 드디어 2년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사우스 켄싱턴 학교(South Kensington School)에 진학해 디자인을 공부하게 된단다. 이때 랭글리는 자유롭게 박물관, 갤러리, 극장 등을 탐험하며 닫아 두었던 자신의 내면을 여행하게 되지. 


랭글리는 1876년 클라라 퍼킨스와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둬. 아들 셋에 딸 하나의 단란한 가정을 꾸렸지. 그는 이때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단다. 석판공의 일을 버리고 전업화가로서의 길을 가기로 말이야. 1879년 랭글리는 Birmingham Art Circle을 설립하지만 미술시장의 불공정으로 인해 그림 가격은 형편없었어. 희망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문지기가 그에게 유독 까다로왔던 걸까? 이른 아침 지하철에 탄 초라한 기사(騎士)들처럼 아직도 거대한 세상과 전투 중이었던 걸까?


그는 다시 도전했어.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며 실력을 더 키워나갔지. 드디어 1882년 버밍엄의 유력한 딜러로부터 500파운드라는 큰 금액으로 작품 구매 제안을 받게 돼. 그는 나아진 경제사정에 힘입어 2년 전 방문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닷가 뉴린(Newlyn)에 정착한단다. 그가 가졌던 사실주의 화법과 뉴린의 어촌 풍경은 너무나 절묘하게 맞았고 그의 내면이 말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는 풍광을 제공해 주었어.  


 


월터 랭글리 <인사, 1904>



   

느루야, 네가 놀이터에서 탔던 미끄럼틀 기억하니? 중심을 잃어 모래밭으로 처박히던 순간도 말이야. 네가 "으앙"하고 울면 엄만 냉큼 달려갔지. 머리와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고 토닥여주면 느루는 입안 가득한 모래를 뱉고는 떠듬떠듬 이렇게 말했어. 

  

"다시... 다시..."


우리에게 그 "다시"를 가능하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늘 가난과 씨름하고 생계의 책임에 꽁꽁 묶여있던 랭글리를 회화에 몰입하게 했던 건 어떤 힘일까? 


톨스토이는 예술을 쾌락의 수단이 아닌 인간 생활의 조건으로서 통찰할 때 가장 정확하게  예술을 정의할 수 있다고 했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이 깊이 교류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 말이야.



"예술은 인류를 사랑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사업이다." -톨스토이-



그런 톨스토이가 랭글리의 작품을 보고는 '진정한 예술작품'이라고 찬사했어.


어쩌면 그의 예술이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품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겠다는, 가족의 품위와 안전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한 그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인사, 1904>라는 작품에서처럼 이제 배를 타고 나가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아이가 서로를 향해 흔드는 손이 말하는 것, 아무리 모진 폭풍과 거센 비바람이 몰려와 배를 뒤집고 바닷속 심연으로 우릴 잡아당길지라도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의 웃음과 그 웃음을 지키려는 의지가 그의 삶을, 우리의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월터 랭글리 <뜨개질, 1890>



느루야, 연금술사들이, 21세기의 기사들이 지하철에서 내렸니? 가족에게 줄 한 끼의 밥을 위해 오늘도 삶의 원시림을 개척할 그분들이 안전하고 활기차게 일하셨으면 좋겠구나. 오늘 새벽, 이른 출근에 입이 댓 발 나왔을 네게도 "밥벌이의 위대함"을 배우는 큰 그림이었기를...


네게 이 문자를 마지막으로 엄마도 출근할게.


"미끄럼틀에서 미끄러져 곤두박질친 순간에도 행운의 코를 연결하는 뜨개질을 멈추지 마."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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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노라_음악과 문학과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며 엄마와 딸이 알콩달콩 수다 중입니다. 지난 6월에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도서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