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다. 아이 학교생활을 2년쯤 지켜보니, 자연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된다. 여름이지만, 코로나로 수영장 가는 것도 염려되어 에어컨 틀고, 아이스크림 먹는 재미만 느낄 뿐이다. 나의 어린 시절 여름은 주로 시골의 외갓집에서 보냈다. 지금보다 놀 거리가 없었던 나와 언니는 방아깨비랑 매미 등을 잡으러 헤매고 다녔고, 청개구리를 방에다 잡아서 손으로 쳐 점프를 어느 개구리가 더 멀리하나 시합을 하고 놀았다. 냇가에 나가 우리보다 빠른 송사리랑 이름 모를 물고기를 잡는다고 한나절 보내던 기억도 난다. 외갓집에는 어머니가 사다 놓은 흑백티브이가 한 대 있었다. 외할머니, 고모할머니와 저녁이면, 연속극을 시청했는데, 얄미운 캐릭터가 나오면 두 양반은 “저 여시, 불여시.”라고 연신 욕을 하며 보시던 기억이 난다. 과자랑 고기반찬이 없어 다소 심심한 여름나기를 했던 외갓집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지금은 여름이 되면 많이 생각난다.
<신사임당 초충도>, 조선시대
여름이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시원한 과일이다. 요즘 말로 ‘빨간 맛’의 대표 과일은 수박이 아닐까? 옛 그림에 수박은 책가도에도 등장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신사임당의 그림이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는 수박 뿐만이 아니라 나비, 쥐, 꽃도 등장한다. 쥐는 언제나 밉상스러운 짓을 하는 캐릭터다. 그 귀한 수박 속을 저렇게 파 먹어 놓았으니... 사람의 짓이라면, 나무라기라도 할 텐데 저렇게 파 먹고 도망가 버린 쥐를 혼을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몇 해 전 신사임당을 연구한 학자가 신문에서 신사임당을 ‘일과 가정에서 모두 성공한 사람’이라 평가하는 것을 보았다. 일과 가정에서의 성공은 위인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엄마들의 소망이다. 자식 잘되는 것, 가정 살림 늘어나는 것,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 우리가 붙들고 있는 소망은 옛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임당은 여름날 재미난 광경을 목격한 것 같다. 사임당에게도 여름날은 젊음과 열정의 계절이 아니었을까? 빨간 꽃과 나비가 여름날의 열정을 투영하였다.
손일봉, <장독대>, 캔버스에 유채, 65*98cm, 1973
어린시절 여름하면 또 떠오르는 것은 친할머니의 단독주택 풍경이다. 할머니는 마당에 작게 닭과 꽃을 키우셨는데, 꽃은 사루비아, 봉숭아 등을 키웠다. 사루비아는 따서 먹기에 좋았고, 봉숭아는 여름날 꼬마들의 치장거리로 손가락을 빠알갛게 물들이며 좋아했다. 봉숭아 물들일때 필요한 백반은 흡사 굵은 소금 같았는데, 할머니가 빻아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는 장독대를 윤이 나도록 반질반질하게 닦아 놓으셨는데, 열어보면 된장, 고추장이 들어있어 꼬마들의 관심거리는 아니었다. 그 된장으로 보글보글 끓여주는 찌개는 맛있게 먹으면서도! 손일봉1)의 <장독대>는 한낮의 장독대를 그렸다. 비슷해 보이는 장독들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색깔과 느낌은 각양각색이다. 다른 이야기와 다른 개성으로 장독마다 서로 당당히 자기 빛을 낸다. 이 그림을 그린 날은 하늘이 높고 맑으며 그 빛은 깊었을 것이다.2)
동시대 미술작가 백지혜3)는 아이들의 풋풋하고 순수함을 잘 포착한 사람이다. 그녀의 그림에는 여아나 소녀가 자주 등장하며,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을 잔잔하게 비춰준다. <스쳐가는 여름>에서 양산을 두 손에 받쳐 든 아이의 옆모습이 인상적이다. 민소매가 유난히 여름날의 활기를 말해 주는 것 같다. 노란 양산과 윤곽으로만 보이는 연두빛 나무는 맑은 하늘을 간직한 여름날의 고운 기억을 불러낸다.
백지혜, <스쳐가는 여름>, 비단에 채색, 2015
1) 손일봉 - 1906년 출생, 1928년 경성사범학교 졸업 일본 상양 미술학교 졸업 세종대 회화과 교수 1985년 작고 출처 -『그림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 미술』 2) 강성원,『그림으로 보는 한국 근현대 미술』, 사계절, p. 144. 3) 백지혜 - 1975년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동양화과 박사과정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