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를 위해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을 훑어보고 있다. 마네는 훌륭한 화가임이 틀림없다. 그의 그림은 시대를 반영하고 있으며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빠진 것 같다. 나의 심장근처 가장 따뜻하고 부드러운 부분까지 작품의 감동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스크롤바를 내리다 한 장의 그림과 마주하게 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제비꽃을 든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나는 그림 속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지금까지 마네의 그림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사랑, 한마디로 그것은 사랑의 감정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 도톰한 입술, 살짝 내려온 머리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모여 만들어진 그녀의 분위기는 사랑을 가득 머금고 있다. 물론 그녀가 본래 아름다운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1. Berthe morisot with a bouquet of violets, 1872 / 2. The Balcony, 1868-9 (Musée d'Orsay)
작품의 주인공인 베르트 모리조는 그 자신도 화가였으며 마네의 제자이자 마네 동생 외젠의 아내였다. 그리고, 마네가 사랑한 여인이었다. 마네는 자신의 역작 속에 사랑하는 여인을 마음을 다해 담아냈다. 마네의 작품 <The Balcony(1868)> 속 모리조는 작품에 등장하는 4명의 인물 중 어느 누구보다 빛나 보인다. 모네가 이 작품에서 시도했던 강렬한 색채 대비, 수직과 수평 공간의 구도, 사회적 풍자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이 있기 전 베르트 모리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많은 평론가들이 이야기가 없는 그림이라며 혹평을 쏟아냈지만 모르는 말이다. 분명 그림에서 "나는 모리조를 사랑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는 불현듯 뭉크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 에드바르 뭉크
마네에겐 제비꽃을 든 여인이 베르트 모리조가 아닌 사랑 그 자체로 보였던 것 같다. '그린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인 동시에 '사람을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역시 마네가 대단한 화가 임도 틀림없다. 그가 담은 사랑이 작품에서 흘러넘쳐 자꾸만 그녀를 바라보게 하니 말이다.
마네가 때때로 사랑을 발견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면, 시종일관 사랑으로 점철된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있다. 그는 바로 마르크 샤갈이다. 그의 그림 속엔 고향에 대한 사랑, 아내에 대한 사랑, 딸에 대한 사랑처럼 언제나 사랑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샤갈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이었던 것 같다.
나에겐 샤갈의 그림 속 사랑을 재인식하게 된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젊은 날의 여느 배낭여행이 그렇듯 지쳐 쓰러질 때까지 걷고 또 걷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마드리드 한 미술관의 마지막 전시실. 나는 그곳에서 실제 그의 그림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사실 처음엔 가장 좋아하는 화가였던 빈센트와 드가의 그림에 혼을 빼앗겨 마지막 전시실은 그냥 훑어보고 나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마지막 전시실 한가운데로 걸어가며 양쪽의 벽을 번갈아 바라보고 눈도장만 찍으며 빠르게 넘어가던 중, 막 지나친 한 장의 그림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 그림(The Rooster, 1929) 앞으로 다가가 한동안 바라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은 여행의 피로와 다음 일정 같은 것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림이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감싸 안고 다독이며 무엇인가 채워주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피로하고 일정에 쫓겨 종종걸음 치던 몸과 마음이 너그럽고 따뜻해지는 느낌과 함께 자연스럽게 미소가 지어졌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은 정말 또렷하게 내 가슴속에 머무르고 있다.
3&4.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샤갈의 작품들 , (왼) La Virgen de la aldea, 1938 / (오) The Rooster, 1929
그 경험이 있고 몇 년 후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고 샤갈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림 한 장을 통해 또다시 그 날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생일, 1915 란 작품이었다. 그림 속에는 샤갈의 영원한 사랑 '벨라'와 샤갈이 두둥실 떠올라 입을 맞추고 있다. 이 그림을 본 사람에게 "이 날은 누구의 생일일까요?"라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벨라'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고 그 덕에 나는 또 한 번 사랑꾼 샤갈의 면모를 인식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그림의 주인공은 벨라인데, 이 날 실제로 생일을 맞은 사람은 샤갈 자신이었다. 벨라는 꽃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샤갈에게 줄 꽃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고 샤갈은 그때의 모습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기억해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샤갈의 생일이지만 누가 뭐래도 주인공은 벨라이다. 어떤 순간이든 사랑을 떠올리고 그림으로 옮기는 천상 사랑꾼 샤갈에게 그림이 없었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다 표현했을까? 샤갈이 붓을 들게 된 건 자신과 우리 모두에게 정말 축복 같은 일이다.
그러나 여기 사랑하는 이를 마음껏 그리지 못한 이도 있다. 그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이다. 빈센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그의 동생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던 테오 반 고흐. 암스테르담 반 고흐 뮤지엄에서는 지금까지 고흐의 자화상이라고 여겨졌던 그림이 테오의 초상화 일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그리고 한 점의 초상화에는 두 개의 이름이 붙었다. '자화상' 혹은 '테오의 초상'. 이것이 진짜 테오의 초상이라는 연구결과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나 또한 그 그림은 테오의 초상이 아니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운다. 내가 아는 빈센트는 그렇게 쉽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테오를 그릴 수 있었다면 아마 수많은 테오의 초상화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빈센트에게 테오는 그렇게 쉽게 그릴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던것 같다. 이건 오로지 나의 상상이지만, 빈센트는 테오를 그릴 수 있을 때를 기다린 것 같다. 그것은 그림의 기술이 무르익었을 때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동생을 좀 더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말 안타깝게 그 순간은 도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5. Self-Portrait with a Straw Hat , 1887
그렇지만 빈센트의 생이 비참하고 아프기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님은 "진짜 사랑하는 자는 한없이 추해진다"라고 이야기하며 생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예수와 붓다의 마지막 모습을 예로 들었다. 끝없는 사랑의 발산은 겉보기의 추함과 생이 고갈될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것이 곧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빈센트가 그토록 힘들고 어려웠던 이유 중 한 가지도 '그리는 대상에 대한 사랑'과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 대한 사랑'이 오롯이 합쳐졌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순수하게 생을 바쳐 예술을 실천하고 사랑한 빈센트는 정말 위대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La Mairie de Auvers, illustration By KJA
사랑하는 것만 그리는 사람, 사랑하는 것을 그릴 수 있는 사람, 사랑하는 것은 그릴 수 없는 사람. 이들이 화폭에 그려내는 사랑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모두가 따뜻하고 애틋한 감정으로 사랑을 그리고 있진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그림을 떠올렸다. 나는 그 수많은 동물을 그리면서도 끝내 나의 반려동물이었던 그녀는 그리지 못했다. 어쩌면 평생 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가 아무리 대단한 실력을 가진다 해도, 아마 그녀를 그리기엔 한없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내가 아직 떠난 그녀를 편안한 마음으로 마주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녀를 꼭 그리고 싶다. 그리고 진짜 사랑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 순간과 반드시 마주하고 싶다.
작품 출처
1. http://www.impressionist-art.com
2. https://www.impressionists.org
5. https://www.metmuseum.org/ (퍼블릭 도메인)
6. 개인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