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전주국제영화제 특집기사: 연재리뷰 5편
주요상영작 리뷰: https://artlecture.com/project/5036
“조국을 선택하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 나라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힘든 일이다.” -밀란 쿤데라-
우리에게서 시간은 분명 객관적으로 흘러간다. 시간이 흘러가며 새겨놓는 것들, 상실되는 것들, 그리고 남겨놓은 것들을 우리는 기록한다. 어떤 것들은 명백히 객관적이고 사실임을 판명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어떤 것들은 주관적이고 사람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그래서 역사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며, 우리는 하나의 역사서가 아닌 여러 역사서, 또한 다양한 관점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서 온 시대를 살펴보면, 여러 역사가 아닌 하나의 역사를, 특히 권력의 입맛대로 저술하려는 시도가 포착된다. 1939년부터 1975년까지의 스페인도 그랬다. 지금의 스페인은 유럽 내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국가로 꼽히곤 한다. 하지만 이 같은 급진적이고 해방적인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프랑코 독재 시기, 즉 파시즘 정권을 겪었기 때문이랴. 그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도, 미국을 위시한 민주주의 진영도 아니었다. 1945년에 소실되었어야 마땅한 파시즘의 잔존 세력이었다. 프랑코 정권은 2차 대전에서 추축국 승리했을 경우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한다. 스페인은 여러 개의 역사 서술과 동시에, 다양한 관점의 역사 서술이 이뤄져야 하는 나라다. 단일한 민족으로 구성되어있지 아니하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실상 연방국이다. 하지만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이 같은 민족성을 전면 억제하여 하나의 스페인에 대한 역사를 저술하고자 한다. 하나의 스페인에서 여러 개의 언어는 지양되었고, 권장된 것은 에스파냐어뿐이었다. 고유한 언어를 쓰는 그들에게 강제로 권유된 에스파냐어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온당 반영할 수 없었으리라. 정통성과 중앙 집권, 타자 배척에 힘을 받았으며, 이에 권력을 정당화 하는 역사를 저술한 것이다. 하지만 작금에 그들의 역사는 부정되어야 마땅하다. 이제는 다양한 민족과 지방, 여러 언어의 역사가 저술되어야 할 것이다.

*감독소개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직후를 배경의 갈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엘로이 엔시소 감독의 <끝없는 밤>에서 새로 쓰는 것도 이 같은 갈리시아어로 된 역사이다. 1975년 스페인 태생의 엘로이 엔시소 감독은 쿠바에서 영화를 전공하였으며,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를 활발하게 오가며 활동하는 청년감독이다. 다큐멘터리와 픽션 양자 사이를 활발히 오가기에 그의 영화는 탈경계적인 실험이 대두된다. 이 같은 영화적 형식과 더불어 엔시소의 정체성 자체가 여 타 스페인 감독들과 차별화되는 측면이 있는데, 스페인 감독이라기보다는 갈리시아인으로서 정체성이 도드라진다는 측면이다. 갈리시아는 카탈루냐나 바스크만큼 정치적인 분리주의가 활발하진 않아도, 스페인 내 어떤 타 지역들보다도 이질적이고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지방이다. 갈리시아어는 에스파냐어와는 차별화된, 오히려 포르투갈어와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언어이다. 그래서 갈리시아는 스페인 못지않게 포르투갈과 인접성이 있으며, 엔시소가 다른 영화제에서 소개될 때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계에 위치한 감독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아라이아노스>는 이 같은 갈리시아의 복합적인 정체성이 묻어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양자 사이에 위치한 미묘한 경계를 포착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엔시소의 갈리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이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넘나드는 형식에도 조응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본 작품 <끝없는 밤>은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의 승리로 이어져 그의 독재가 시작되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좌절된 이후의 역사를 포착하는 작품이다. 특히 민주주의의 좌절은 갈리시아와 같이 자치적인 세력을 갖춰야 하는 지역의 입장에서 더욱 뼈아프다. 그들의 민속과 전통이 전체주의에 의해 함몰될 수 있기에, 그들이 민주적으로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획일화의 야욕에 소멸될 수 있기에 말이다.
*연출
스페인 내전이 암담하게 끝맺음하고 프랑코 독재가 시작되는 시점을 다룬 본 작품은 총 3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영화는 갈리시아의 대문호이자 저널리스트인 셀소 페레이로의 원전에서 발췌한, 현실에 근접한 텍스트들을 영화화한다. 이 같은 텍스트에서 비롯된 발화들을 영화 내에서 주고받고, 그것이 승화된 시각적 풍경을 감상자들은 마주한다. 텍스트들은 3부 전체를 관통하고 있지만 1부는 도시에서 정권에 순응한 타인들이나 파시스트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2부에서는 도시에서 시골로 도주하거나 유배당한 인물들을 만나며, 최후의 3부에서는 벼랑 끝 자연에서 홀로 놓인 고독을 조명한다. 영화는 비전문배우들의 기교 없는 생생한 표현으로 원전을 고스란히 옮겨내고자 시도한 리얼리즘임과 동시에, 원전에서 비롯되어 낭독되는 미겔의 편지와, 안쇼가 놓인 자연이란 시각적 차원이 온당 일치하지 않는, 그러나 둘 사이의 긴밀한 인접성이 느껴지는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영화는 대단히 정적이며, 특히 움직임은 대두되지 않고 고정된 카메라로 포착된 회화적인 프레임들이 주를 이룬다. 영화는 원전에서 비롯된 문장들을 읊는 대화가 강조되기에, 대화가 중점이 된다.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은 마치 서로에게 고립된 듯 하나의 숏에는 보통 하나의 인물만이 포착되며, 대화를 통해서 서서히 공동세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공동세계가 구축된 이후엔 빵을 넘기며 두 인물의 손이 함께 포착되는 프레임이 전개되기도 하는 등,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인생을 주고받으며 고립을 극복한다. 또한 언제나 홀로 놓인 숏만이 지배적인 것은 아니다. 터미널의 내부를 롱숏으로 포착하는 장면에서는 분명 여러 인물이 하나의 프레임 안에 함께 놓인다. 하지만 건물의 구조를 이용하여 서로간의 단절을 드러내고, 인물들의 정면이 아닌 측면구도나 뒷모습을 포착하며, 정권이 감시하는 시대상 속에서 자신을 단절시키거나 은폐하려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암시하곤 한다.
*대화
영화에서 주가 되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시대상을 암시할 수 있다. 특히 1부에서는 파시즘의 징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대화의 운을 떼는 것은 두 노숙자들이다. 이들은 한때는 국가와 타인들에 의해 '쓸모'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도구적으로 사용되고 버려져 이제는 사용가치가 전무하다. 그들은 '전체'를 위해서 더 이상 봉사하지 못하는 비렁뱅이다. 프랑코 독재 이전에 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토록 싸늘하고 경멸적이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성으로 모든 것이 평가되고 이에 환원되며, 그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보편적 전체에서 벗어난 그들은 설 자리가 없다. 2부에서 수감생활을 전하는 한 여인에게서도 파시즘의 징후는 나타난다. 교도소 내에서 모범이 되지 못한, 또한 병약한 타자를 축출시키고자 투표가 진행된다. 그녀는 반대하고 싶지만, 다른 구성원 모두가 찬성함에, 그저 무기력하게 기권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전체에 반기를 들 수 없는 것이다. 이는 1~2부에 거쳐서 드러나는 종교에 대한 언급, 특히 이교도를 배제하는 편협한 태도와 이에 현실화된 지옥, 그들이 논하는 종교라면 천국이라 할지라도 결코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언급과도 결부된다.이를 통해 프랑코 정권과 가톨릭의 결탁 및 20세기에 폭발된 파시즘이 일원론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기독교적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고찰한다. 다시 1부로 돌아와서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서 마주한, 한 사업가와의 대화에 주목해 보면, 그는 팔랑헤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떠날 것이라 말한다. 돈을 벌어도 대다수가 전체를 위해서 환수된다. 그것은 ‘전체’를 위해서 사용되지도 않는다. 그렇게 분배가 되었다면 갈리시아의 실상이 이리도 빈곤하지는 않으리라. 그 돈은 오직 독재자와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경찰서를 바로 세우고 보수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개개인이 성취를 느낄 수 가 없음에, 그는 또나가고자 한다. 또한 팔랑헤당에 소속되었던 그는 스스로 감시를 행해본 입장에서, 그 넓은 대지가 너무도 좁다란 세계로 축소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지했기에, 조국을 등 돌린다. 이 같은 인력유출에 의해 국가는 저물어가는 것은 아닌가.
*자치권이 보장되지 않던 프랑코 체제 하의 갈리시아
남아있는 국민들은, 특히 프랑코 지지자들은 모여서 카드놀이를 한다. 빈곤한 거지들은 서로의 처지가 절망적인데도 빵을 나누지 않았던가. 하지만 카드놀이를 하는 그들은 빵 대신 카드를 포갠다. 카드 하나에 독재자를 찬미하고, 또 다른 카드 하나에 세뇌된 구호를 외치며, 또 다른 카드 하나에는 독재자의 신화가 깃든다. 이러한 거짓들이 쌓이고 또 쌓여간다. 당대의 스페인은 진실한 성취들과 타자들이 박탈되고, 거짓들과 획일화된 보편만이 쌓여가는, 그것들이 공통된 세계를 이루는 형국이었으리라. 그리고 본 작품은 독재시기의 스페인임과 동시에, 그 내부에 소속된 갈리시아를 포착하는 작품이다. 이와 같은 시대상 속에서 갈리시아의 풍경은 어떠한가. 파시스트들이 묘사하는 빈자는 부자의 등골을 빨아먹고 그들에게 무례한, 죽여 마땅한 이들이라 논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사업가의 발화로 보건데, 그 빈부격차는 과연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가? 그리고 이 같은 관계망을 중앙정부의 부유함과 갈리시아의 궁핍함으로 뒤바꾼다면, 이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지역의 운명이 드러나지는 않는가. 갈리시아의 시장은 한때 본 지역이 최소한 자급자족할 정도는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는 넝마주이 지역에 다름 아니며, 중앙에 귀속되어 구걸하는 신세다. 그리고 중앙정부를 대변하는 관료들은 갈리시아가 불평불만이 많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리시아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뒤섞인, 스페인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지역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불만은 사실상 불평이 아니라, 다른 문화와 생활사를 역설하는 마땅한 권리의 주장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내 묵살된다. 앞서 살펴본 여인의 투표처럼, 갈리시아는 반대도 아닌 기권을 해야 하는 실정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선 현재에 저항하는 갈리시아인들과, 내전 시기에 격렬히 팔랑헤당에 대항하여 싸웠던 이들의 회고가 펼쳐진다.
*갈리시아인들
하지만 모든 인물들이 그렇게 강인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1부의 한 노파는 이제 체념적이다. 그저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그녀는,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그저 생존만을 바란다고 말한다. 역사 속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가 고안돼도, 또 어떠한 정권이 입성해도 갈리시아는 그저 꼭두각시였을 뿐 바뀌는 게 없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갈리시아의 운명이 출산하지 못하는 소, 즉 다른 지배적인 세력에 의해 굴레가 씌워져 고유적인 생명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처연한 비극과 관련되진 않는가. 또한 갈리시아의 자유를 노래하는 인물들과, 대자연은 오직 밤에만 비춰진다. <끝없는 밤>이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본 작품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시간성이다. 영화는 일단 밤만이 강조되진 않는다. 본 극의 시작은 아침이다. 하지만 아침이 허용되는 인물들은 어떤 유형인가. 아침에 비춰지는 인물은 첫 대화의 운을 뗀 그 부랑자들이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주목받지도 않고 배제되는 대가로 자신을 숨기지 않는 타자로서 아침에 포착된다. 그들과 같은 유형이 아니라면 사회에 순응하여 경찰서를 짓고 있는 건설 노동자와 같은 위치에서야만이 아침을 누릴 수 있으리라. 어떠한 희생도 없이 충만한 아침을 만끽하는 것은 국민들로부터 충성과 찬미를 받는 시장이다. 그는 안개와 고통으로 자신의 권력을 향유한다고 말하니, 비춰지지 않는 무수한 주민들은 정치권력을 위해 찬란한 태양을 만끽하지 못하고 안개 속으로 유배된 고난의 행렬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간헐적인 아침을 직후로 영화의 시간은 밤의 풍경이 지배적이다. 끓어오르는 유황이 연상되는 불길하고 괴괴한 노란 조명과, 인적이 없어 고요하고 삭막하며 어떠한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그저 사물로서 껌뻑이는 네온만이 유일한 운동성이라 할 수 있는 밤의 풍경이 말이다. 이 같은 풍경의 도시에서 사람이란 오직 술집에서 노니는 파시스트들만이 유일하고, 이에 저항하는 운동가들은 2막의 시골에서 포착된다. 그들의 아침을 위해 밤으로 숨겨진 것이리라.

*신화적 알레고리
본 작품은 시대상과 당대 갈리시아의 특성을 국가를 떠나야만 하던가, 아니면 항거와 자유를 위해 도시에서 시골로, 그리고 자연으로 떠돌아야만 하던 운명을 터미널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제시한다. 하지만 이렇게 지역과 공간으로는 모자란 듯, 그들은 시간에서도 배제되며, 모닥불을 통해서 형체가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그토록 어둑어둑한 밤에서야 만이 존재를 어렴풋이 드러낼 수 있다. 독재자들에 의해 과거는 묵살되고, 오후와 현재는 거짓으로 흘러가는 시간이라면, 밤은 그들이 은닉하려는 과거가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영화는 그 참혹한 지하의 수기를 롱테이크로 포착한다. 대상이 말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영화에 옮겨온다. 마치 다이렉트 시네마의 태도처럼 대상에 온전히 집중한다. 이를 통해 어떠한 것도 은폐하지 않는, 파시스트들과 상반된 태도로 역사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이 같은 과거를 드러내어 내전 당시에 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갈리시아인들이 영화 속에서 왜 그토록 체념적이고 무기력한 태도와 초상으로 포착되는지, 왜 잠에만 빠져 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한다. 이렇게 밤으로, 그리고 자연으로 향하는 과정은 흡사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 사공에 의해 시골로 자연으로 향하며, 또한 그 칠흑 같은 밤에 기나긴 산등성이를 거슬러 올라가며 은밀하게 떠돈다. 이러한 여정은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저승으로 인도하는 뱃사공 카론에 의해, 레테 강과 스튁스 강을 지나 저승인 타르타로스로 옮겨지는 것만 같다. 삶이 허용되어 마땅할 문명으로부터, 그들이 '미개의 공간'으로 규정하는, 또한 저승이자 지옥에 다름 아닌 자연으로 서서히 소외되는 것이다. 한편 그것은 자유에 있어선 축복이리라. 망각의 강인 레테를 지나면 살아생전의 모든 기억을 잊고 저승으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스튁스 강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명확히 판가름하는데, 그것이 곧 문명의 망각과 프랑코 정권의 유무에 상응하진 않는가. 이렇게 온전히 자유로운 자연으로 향하며 진실한 자기존재를 회복하는 운동가들의 여정은, 곧 문명에서 덧씌워진 거짓된 상들을, 정화의 강을 거쳐서 씻어내고 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자연과 문명
한편 그 여정은 문명이 자연을 줄곧 침략해오는 형국이다. 그래서 안쇼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모른다. 거대한 익스트림 롱숏으로 포착된 광활한 풍경을 지나, 몽롱한 숲과 밀림을 파고들고 또 파고들어간다. 파시스트들의 독재에 의한 유배는, 그렇게 현실에 재현된 지옥의 고난은 결코 끝날 줄 모른다. 마치 타르타로스에서의 형벌이 영겁의 시간동안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자연으로 향하기 전 영화의 연출은 클로즈업이 주를 이뤘다. 인물들은 포착될지언정 갈리시아의 지역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드러났다면 그 공간에 감시기구로서 경찰서가 더욱 크게 세워지며,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일 당대의 획일성만이 드러났다. 그리고 자연으로 향하며 경이로운 대자연을 숭고하고도 경이로운 익스트림 롱숏으로 널따랗게 포착한다. 수면에 빛살을 총총 떨어뜨리는 서정적인 별자리들, 그렇게 하늘이 수놓은 구슬들을 자애롭게 품어내는 부드럽고 온유한 강물의 흐름, 숲속에서 피어나는 이름 모를 갖가지 식생 등, 도시에선 드러나지 않던 갈리시아의 고유한 풍토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자연은 문명과 대비를 이룬다. 하지만 그 풍경은 모든 것이 투명한 낮이 아니라, 모든 것이 어두침침하게 보이는, 그 지역성이 온당 드러나지 않는 밤에만 허용된다. 이 같은 자연과 대비하여 문명은 삶이 저물어가는 공간이다. 생사도 알 수 없는 아들, 지역에 계속 머문다면 삶을 보장하기 어려운 실태, 그리고 자유를 바라는 빈자들은 죽어 마땅한, 야만의 공간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을 가장 맹렬히 비판하는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지적한 것처럼 인류는 자연을 극복하는 방향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지배하는 법을 배워오며 발전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에 계몽으로 호도된 야만이 문명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와 동시에 생명을 부여하는, 자애로움이라는 양가성을 지니는 자연에서야 안쇼는 평화롭다. 그 어떤 잠보다도 자연에서 편히 얼굴을 기댔을 때, 그의 얼굴은 평온하고 부드럽다. 또한 그 이름 모를 식생들은 내전과 탄압이 일어나는 정치에도 상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삶을 찬동하며 피어나간다. 이 같은 자연과의 대비 속에서 문명이 자연으로부터 잃어버린 자애로움과 생명력, 그리고 문명이 자연으로부터 배워온 가혹함과 야만이 대비를 이룬다.
*인간의 사물화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은 대단히 굳어있다. 슬픈 이야기들을 읊조리는 배우들은 파시즘에 의해 모든 것이 짓밟힌 듯한 생생한 비극을 얼굴로서 보여준다. 그리고 비극을 겪지 않은 인물들, 도시에서 포착되는 인물들은, 즉물적인 초상이라고 알려진 브레송이나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에서 나타난 인위적인 초상들과 유사하다. 그들에게선 어떠한 인간미도 느껴볼 수 없으며, 마치 2막의 자연을 포착한 직후에 이어진, 조명으로 밝혀진 정물을 포착한 숏의 피사체처럼, 생명이 아닌 사물처럼 보인다. 영화는 프랑코 독재 하에서 자유의 상실, 그리고 스페인의 획일화에서 비롯된 사물화를 비판한다. 이러한 사물화는 죽음을 환기하곤 하는데 그가 포착한 정물은, 빈 잔들과 터지고 으깨진 과일 으로 구성된, 죽음을 가리키는 바니타스 정물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앞서 언급한 풍경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엔시소는 인물을 포착함에 있어선 브레송을 따르는 듯 보이며, 이후 공간과 삶을 조응시키는데 있어선 상징적 공간을 구현하는 안토니오니의 경향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같은 사물화의 안티테제로서 영화는 교감의 회복을 제시한다. 영화 속 안쇼는 청자다. 그는 화자가 발화하는 와중에 체념적인 반응을 보이면, 청자인 자신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며 교감을 표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말을 듣고 안쇼는 지금 여기에서, 더욱 더 자연으로 향해간다. 교감에 의해 그들의 존재가 존중되는 자유가 환기되고, 이에 의해 자유를 향한 여정을 더더욱 관철할 수 없는 것이리라. 이후 3막에서 안쇼가 자연으로 향하는 이미지와, 미겔이란 인물이 교도소에서 쓴 편지가 청각적으로 불협화음을 이룬다. 양자의 차원은 분명 다르지만 내전 중, 즉 과거에 있었던 수감과 고난, 그리고 종교와 문명으로부터 박탈되는 일대기가 현재의 안쇼에게도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편지의 속성은 그것을 작성한 작가의 생존여부를 판가름할 수 없는, 그저 차가운 사물이다. 하지만 편지가 나레이션되는 동시에, 축축하고 부드러우며 바스락거릴, 그 감각적인 숲속을 안쇼는 거닌다. 시대에 의해 상대방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편지만이 내게 허락되더라도, 또한 멀리 떨어져있더라도 일련의 감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정리
하지만 그렇게 재현된 과거는 반복된다. 그리고 더 이상 도피할 곳 없는 자연과 밤에, 야만적인 문명의 횃불이 도래한다. 편지에서 최소한 목숨의 보존만을 위해서 선처를 요청한 것처럼 문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쓸쓸한 삶으로의 귀결인 것일까, 아니면 다시금 유배의 일대기가 되풀이되는 처절한 투쟁을 상징화 된 것일까. 무엇이 됐든 그것이 곧 당대 스페인의, 그리고 갈리시아의 비극적인 역사이리라. 살려면 순응하거나, 투쟁하려면 죽음으로 내몰리거나, 그 이외의 삶의 유형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자의 포기되지 않는 정신이, 과거의 편지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로 계승되던 그 항거의 정신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지금의 스페인과 갈리시아를 있게 한 것이리라. 영화는 프랑코 독재 속에서 은폐되던 자유의 투쟁사를, 그리고 갈리시아의 역사를 밤으로부터 낮으로 가져온다. 그의 양식은 20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사우라 및 에리세, 그리고 21세기를 대표하는 이글리사이 내지는 알모도바르의 영화와 결코 같지 않다. 이는 스페인 영화라는 안이한 통념을 벗어난, 지역적이고 다양화된 양식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인도 출신의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이 논하는 것처럼 단일한 국가적 차원으로 규정되는 보편과, 미시적 영역 및 개별적인 지역성은 분명 괴리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반영하는 내용과 형식인 것이다. 엔시소는 이렇게 보편적인 스페인이 아님을, 그것과 다른 갈리시아를 강조한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서 영화는 안토니오니의 방식과 유사한, 갈리시아의 공간성과 인물들을 조응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또한 페드로 코스타의 최근 경향인 리얼리즘과 상징성이 결합된 방식과 유사한 기조로 풀어낸다. 이렇게 엔시소는 갈리시아의 구현을 위한 연출을 모색하며, 아직은 덜 여물었지만 보편적으로 규정된 스페인과는 분명히 다른 갈리시아의 영화의 가능성과 그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삶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