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에 마무리된 탈영역우정국의 전시, <애프터라이프Afterlife>전은 ‘반복해서 죽음을 선고 받은 어느 존재의 운명과 그 존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전시이다. 쉽게 말하면, ‘회화의 죽음’ 이후로 반복되고 있는 관련 논의에 한 스푼을 더 얹은 전시이다.
애프터라이프
전시장소: 탈영역우정국
기간: 2019년 8월 2일 – 2019년 8월 13일
참여 작가: 김영재, 김혜수, 문경의, 이윤상, 이준아
이미 오래전 죽음을 선고받은, 언데드-또는 좀비-화된 회화에 대한 CPR보다는, 죽음 후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 네이밍 된 전시명은 놀라우리만큼 직관적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낡아 떨어지기 직전의 느낌이 날 정도로 반복되었고, 혹자는 애초에 해당 논의가 당시 시대 상황에서 맞물려 나온 것이며, 최근에도 건재 중인 회화를 바라보면 당시 사진 기술과 영화 매체에 대한 앓는 소리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화의 죽음’은, 더 이상 어떠한 매체의 등장으로도 놀라지 않을 수 있는 현대의 경우, 회화를 논하고자하는 미술인에게 필수적이자, 매체에 기술적으로 다가가기에 좋은 화젯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며 360도 카메라와 VR등 첨단 기술을 이용한 가상 전시를 서비스하는 미술관이 늘어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Google의 경우, Arts & Culture이라는 앱과 웹페이지를 통하여 전 세계 미술관의 작품들을 대중에게 서비스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누구나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 디스플레이를 통하여 제공되는 이 작품들은-여기서 진품성 또는 유일성에 대한 논의는 제쳐두고서라도- 실제로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아무래도 직접 가서 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왜?
<애프터라이프(AFTERLIFE)>전은 ‘오늘날 보편화된 이미지 경험 방식과 상반되는 회화에서의 시각 경험에 주목한다.’고 밝히고 있다. 20세기 이후 수도 없이 되풀이된 ‘주목’이긴 하다. 하지만 앞서 주장한 바와 같이, 회화전을 꾸리며 고려하기에는 딱 맞는 논의이기도하다. 전시 리플렛에서는 ‘대상과의 실재적인 경험’을 부각하기 위해 ‘질료로 구축된 이미지’, 물성에 주목한다. 역시나 되풀이된 ‘주목’이다. 물론 ‘회화라면 좀 더 납작하게!’를 부르짖은 그린버그 때와는 물론 다르다. 우리에게 회화로서의 특징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어(死語)이다. 대신 전시는 질료가 형성하는 공간감, 즉, 실재적 감각을 꺼내든다.
전시포스터
그렇다면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이 모두 마띠에르를 살린, 붓 터치 밑에는 그림자가 드리우는 정도의 부피감을 자랑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준아와 김영재, 이윤상의 작품에서는 복합적인 재료를 더한 회화로 린넨, 자개, 두꺼운 부피감이 드러나지만, 김혜수와 문경의의 작품에서 그러한 질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전시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가.
전시 리플렛은 ‘제각각이지만 이웃한 작품마다 특정 화두를 공유하고 … 모두의 작업을 단일한 키워드로 압축하기보다는 … 부분이 대비의 풍경을 이루었으면 한다.’고 힌트를 제시하고 있다. 좋게 말하자면 각 작품의 특색이 살아있다는 말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나 통일성을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애프터라이프>전을 구성하는 작품들은, 회화라는 요소 하나만으로 묶인 듯하다.
보통 전시를 꾸릴 때에, 기획자들은 통일성 또는 내러티브 구축을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고 기획하기 마련이다. 12일 간의 짧은 전시에서 기획자는 5명의 현대 작가들의 회화 작업 경향을 소개하는 데에 목표를 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목표가 좋고 나쁘고의 가치 판단을 내릴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들 작품들을 묶는 공통점을, 회화라는 매체 외의 다른 곳에서 뽑아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추상과 구상, 반추상을 넘나드는 작가들의 작품을 엮는 일이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회화라는 매체로만 이들을 엮어내는 것이, 자칫하면 기획자의 태만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전시명인 ‘사후세계’를 작품이 완성된 뒤, 유통되는 뒤, 감상된 뒤에 일어나는 사건의 연속과 그 운명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면, 이 태만은 더욱 두드러지는 것이다. 이 ‘afterlife’라는 전시명은 그렇다면, 모든 작품과 전시의 부제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헤겔과 이브 알랭 부아의 주장 사이의 궤적을 하나씩 연결해보면, 어느 시대든 회화나 예술은 죽음을 선고받아왔다. 현대에서도 이러한 주장은 되풀이 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기계화되는 노동 현장에서 창작의 값어치를 높게 책정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이 또한 이전부터 되풀이 되어온 의견들이다. 이제는 사형 선고를 받던, 경쟁력을 인정받았던, 예술은 어떻게든 진행될 것이라는 개인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서, 더 이상 구식의 종말이론에 영향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것이 회화라는 매체를 언급할 때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주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고전으로 읽히고 사용되는 과거의 이론은 전복이 필요하며 그 전복을 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전시기획자이다. 전복은 또 다른 전복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이 약동이 예술이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