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Twitter

Artlecture Blog

Artlecture Post

Artlecture Band

Artlecture Main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2) - 작품론 | ARTLECTURE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2) - 작품론


/People & Artist/
by 박정수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2) - 작품론
VIEW 6030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 (2) - 작품론, <안개 속의 풍경><영원과 하루>


*<안개 속의 풍경> 속 어둠과 빛

다음으로 작품론이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침묵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인 <안개 속의 풍경>이다. 본 극이 다루는 침묵은 신의 침묵이라 할 수 있다. 누나 불라와 남동생 알렉산드르 남매는 독일에 있다고 여겨지는 아버지를 무작정 찾으러 여정을 떠난다. 이 같은 부재하는 아버지와 마치 성녀로서 존재하는 어머니의 구도가 곧 기독교적이며, 생물학적인 의미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아버지로서, 그를 향한 남매의 염원에 절대자로서 아버지는 지속적으로 침묵한다. 우리는 부재하는 아버지와 희생하는 어머니를 허용하는 이데올로기에서의 남성들의 형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에서 아버지뻘의 나이로 등장하는 남성들은 외삼촌과 트럭 운전사를 꼽을 수 있다. 허나 삼촌은 남매를 위험에 내몬 것을 마냥 어머니의 잘못이라 질책하고, 트럭 운전사는 불라를 강간하며 여성에 대한 폭압적인 태도를 펼친다. 그리고 이러한 남성들은 언제나 아이들의 곁에서 떠나가며, 아버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오직 어머니다. 영화의 초반부, 독일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타는 것이 불발되고, 다시금 집으로 돌아간 남매는 세계의 탄생에 대한 신화를 노래한다.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났고, 이후 세계를 이루는 원리들과 생명들이 탄생했다고 남매는 밤의 암실 속에서 얘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에 생명의 맹아에 다름 아닌 빛을 비추는 것은 어머니다. 그녀는 굳게 닫힌 방문을 열고 빛을 들여와 남매를 비춰낸다. 신화를 얘기하는 암실을 포착하는 시퀀스는 이 세계에 생명을 영위케 하는 것은 짐을 여성이 짊어졌다는 것을 드러내는 듯 하다.

 


*연출

영화는 좁다란 4:3의 화면비를 사용한다. 이 같은 화면비는 일반적으로는 갑갑함을 동반한다. 허나 본 극은 좁다란 화면비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갑갑하고 숨 막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영화의 거리감이 비교적 멀기 때문이리라. 영화 속 강조되는 연출은 근거리와 원거리의 대비라 할 수 있다. 영화의 많은 순간들은 대부분 피사체들이 아스라하고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익스트림 롱숏에 가깝게 포착된다. 이러한 롱숏들은 아버지라는 일련의 진리를 찾아 헤매는 남매의 여정이 곤경에 빠졌음을 드러낼 때 사용되거나, 또한 이 같은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짐을 포착하곤 한다.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본 극의 제목처럼, 남매에게서 아버지는 아스라한 안개 속에 휩싸여 도무지 보이지 않고, 영영 닿을 수 없는 롱숏처럼 미지의 존재에 다름 아니다. 한편 이 같은 불가해한 세계, 비정한 세계로부터 클로즈업되는 것은 서로를 의지하며 꼭 껴안는 남매의 초상, 오레스테스가 남매에게 보이는 범적인 인류애에 다름 아니다. 이는 모든 것이 모호하고 멀리 있어 생을 불완전하게 하더라도, 이 같은 삶을 유지하게 만들어주는 가치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롱숏이나 클로즈업은 동일한 것을 포착하기도 한다. 바로 죽음이나 고통, 시련 등이라 할 수 있는데, 롱숏은 이를 부여하는 세계와 구조들이 함께 포착되어 이들의 비정함과 쓸쓸한 우리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클로즈업은 우리에게 닥쳐오는 위협의 강조, 또한 인류가 애써 외면하려 하는 가치들을 당면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반성적인 시선

우리가 당면해야 하는 것은 세계의 필연한 원리들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가 범한 과오들이다. 영화 속에서 일반적인 인류는 남매와 오레스테스와 태도의 대비를 자아낸다. 그것은 풍경을 바라보거나,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일반적인 인류의 태도는 눈 내리는 풍광의 심미성에 깊이 도취되거나, 우리를 기쁘게도 하지만 슬프게도 만드는 비극과 같은 진중한 예술들을 외면한다는 측면이다. 그리고 남매는 전자의 심미성에 도취되지 않으며, 오레스테스는 후자의 생산자, 그리고 남매는 후자의 감상자다. 후자의 예술들은 우리에게 숭고함이나 고통을 자아내고, 전자의 예술들은 우리를 심미적인 만족감으로 인도한다. 이는 아도르노의 예술론을 연상케 한다. 아도르노는 대중예술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대중예술의 심미성은 우리가 마땅히 기억해야하고 주목해야하는 역사, 상흔을 망각하게 만드는 도취제에 다름 아니라 여겼었다. 2차 대전이라는 인류가 비인류로 추락한 야만을 겪은 이후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예술은 심미성이 아닌, 고통과 숭고함을 드러내는 예술로서 이를 통해 인류와 유리될 수 없는 예술은 지나간 인류의 역사를 기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본 극의 예술들도 그렇다. 오레스테스의 극단이 노래하는 것은 20세기 그리스의 역사로서, 나치독일이 그리스를 침략한 아픔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같은 예술들을 연극무대에 세우지 않으며, 또한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바이올린 연주를 행하는 음악가를 쫓아내기에 급급하고, 음악가를 쫓아낸 세계에서 음악은 이데올로기와 권위만을 긍정하는 군인들의 군가만이 울려 퍼진다. 그들이 도취되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는 눈 내리는 풍광이다. 허나 눈의 냉기는 모든 생명의 삶을 앗아갈 정도로 비정하다. 눈을 아름답게만 보는 것은 인류가 대상을 멋대로 재단하는 오만한 시선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남매와 함께 놓인 한 여인은 이 같은 눈 내리는 풍광에서 그녀의 남편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고통을 노래한다. 심미성에 도취되는 인류들은 가만히 멈춰 마치 조각으로 굳어버린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에 도취되지 않은 남매는 그들을 가로질러 질주한다.

 

앙겔로풀로스는 이 같은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시퀀스를 결코 심미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굳어버린 관료들의 불편함에, 무슬림 여인의 발화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 같은 예술가로서 앙겔로풀로스가 구축하는 심미성이 은폐하려는 바를 고발하는 날카로운 시선이라 할 수 있다. 남매는 여행의 초반부에 결혼식이 열리는 장면을 마주한다. 흥겨운 음악과 달리 여인이 뛰쳐나온다. 부재하는 아버지와 희생하는 어머니로부터 자라난 남매에게 보인 여인의 비극, 그녀는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예견한 것일까. 허나 이내 곧 식장으로 다시 불려가고, 음악 소리는 더 커져만 간다. 여인의 비극을 망각하게끔 노래는 더 흥겨워진다. 그리고 거리에서는 마부가 죽어가는 말을 비정하게 끌고 가는 잔혹한 풍경이 펼쳐진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같은 다른 생명의 비극에 주목하지 않는다. 고통을 주목하고 기억하는 예술로서 앙겔로풀로스는 클로즈업을 통해, 우리가 주목해야할 누군가의 죽음을, 그리고 이에 대한 마땅한 슬픔을 포착한다. 불라가 트럭운전사로부터 강간을 당하는 씬에서도, 바깥의 거리에서는 무심하게 차들이 흘러가고, 그들이 크게 틀어놓은 대중음악들이 무심히 흘러간다. 물론 아도르노의 입장은 대중예술을 극단적으로 배격하고, 아방가르드 예술만을 긍정하기에, 전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감상자들은 동의할 수 없으리라. 허나 우리는 도처에 널린 심미성 때문에 고통이나 상흔에 무감해지는 것은 아닌지 한번 쯤 돌아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거리감

본 극의 음악도 결코 긍정이나 이상향을 위해 사용되지 아니하며, 풍광들도 아름다움 보다는 숭고함에 가깝다. 그리고 포착하는 풍광들도 결코 심미성과는 거리가 멀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내러티브의 구조에 있어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편이며, 다만 이를 풀어냄에 있어 쉬이 이해되지 않는 상징성이나, 현실적이면서도 이와는 거리가 있는 듯한 연극성을 보여주지만 이를 아방가르드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앙겔로풀로스가 숭고함을 구축하는 방식은 미장센을 구현함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앙겔로풀로스가 롱숏을 주요한 연출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다시금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앙겔로풀로스의 롱숏에서 대두되는 것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연상케 하는 자연풍광들이다. 망망대해와 인류의 나약한 육체를 산산조각 내버릴 것만 같은 바위산, 자욱하고 무거운 구름, 우리의 온기를 앗아가는 지독한 추위의 악천후, 그리고 우리의 시야를 모호하게 방해하는 안개들이 그의 숏들에서 강조된다. 앙겔로풀로스는 안주할 수 있는 삶이 아닌, 안주할 수 없고 의지할 수 없으며, 인류가 홀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이 세계의 민낯을 드러낸다. 오레스테스와 알렉산드르가 주은 필름에서는 모든 것이 모호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필름이 곧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자 삶이요, 영화의 역할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감독의 고찰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무수한 질문들이 쏟아지지만 영화 속 인류들은 이에 답하지 않는다.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지 모른다. 허나 이렇게 모호한 세계임에도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가치야 말로 클로즈업으로 거대하게 포착되는 연대, 사랑에 다름 아니다.

 

앙겔로풀로스의 롱숏과 클로즈업이 포착하는 것이 때때로 동일하며, 그것의 양가성을 포착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롱숏과 클로즈업이 다른 것이 포착된다 한들, 그것은 롱 테이크로 포착된 하나의 숏으로서 결코 분리되지 않은 채 드러나곤 한다. 앙겔로풀로스의 롱 테이크는 결코 단일한 것을 포착하지 않는다. 남매는 오레스테스와 재회하여 기쁨을 만끽하고, 특히 불라는 오레스테스와 춤을 춘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그녀에게 아버지뻘의 남성이 해를 가한 상황에, 의지할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오레스테스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롱테이크로 포착되는 재회에서는 그가 군 입대를 해야 한다는 비극과 불라의 슬픔이 함께 포착된다. 하나의 숏에서 연극은 시작되고 끝을 이루며, 관객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자 분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극단은 멀리서 서서히 다가오지만, 온전히 도착하지 않고 다시금 떠나간다. 알렉산드르는 영혼을 전율케 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만끽함과 동시에, 하나의 숏 내부에서 차갑고 싸늘한 이념의 원리를 몸소 체화한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났다는 세계의 탄생신화처럼, 군 입대를 앞둔 오레스테스가 유희를 만끽하는 클럽에서 빛과 어둠은 교차된다. 즉 세계는 명쾌하고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모든 것에는 그것들의 양면이 하나의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분절되지 않는 숏으로 드러낸다.

 


*운명으로부터 발버둥, 자유

운명이라는 비자유와 우리가 염원하는 자유 또한 양립한다고 볼 수 있지만, 영화 속 세계에서는 자유가 있기에 비자유가 존재하고, 비자유가 있기에 자유가 존재한다는 양가성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오레스테스라는 인물의 운명으로 드러날 것이다. 알렉산드르나 불라는 그리스의 일상적인 이름이지만,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어머니 클라이타임네스트라를 죽이게 되는 신화의 인물의 이름을 따온다. 그리고 오레스테스의 이 같은 비극은 신을 우롱하고 패륜을 저지른 탄탈로스의 후손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필연 속에서 일어났다. 본 극의 오레스테스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국가가 부여하는 입대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오레스테스는 남매의 이상적인 보호자가 돼줄 수 있지만 떠나야만 하는 인물이다. 허나 그 운명의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자유를 모색하고, 또한 인류애를 펼치는 인물로서, 운명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의해 떠나야만 하는 오레스테스는, 아버지를 앗아가는 세계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운명은 바다에서 드러나는 거대한 손 조각으로서, 이는 오레스테스나 남매에게 결코 구원이나 그들이 바라는 진리의 방향을 가리켜주지 않는다. 절대자는 아스라이 호화로운 도시를 향해 사라져만 가며, 침묵하는 신의 테마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한편으로 도시로 사라져가는 일련의 이념으로서 절대자는 주변부에 놓인 인물들의 삶에 관심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도 있다. 영화에서 불가해하고도 숭고한 자연과 더불어 대두되는 풍경은 쇠락해가는 공업지대나 쇠창살이 쳐진 국경지대로서, 이 같은 세계에 인적은 거의 없고, 난민들은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알렉산드르가 한 난민을 갈매기라 부르는데, 이는 국경을 넘어가고 싶은 염원을 담아낸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영화 속 찰나적인 구원이 되는 것은 절대자나 이에 상응하는 권력에 의해서가 아닌, 불완전한 인류들의 온정에 의해서다. 오레스테스 및 매춘을 암시하는 불라에도 이를 거부하고 선심을 베푸는 기차역에서 만난 이름 모를 군인 등, 그들에 의해서 남매의 여행과 삶은 영위되지만, 한편 절대자의 현현에 다름 아닌 국가, 이념, 구조에 상응하는 국경수비대에 의해 남매는 그 여정의 끝을 맺는다. 다만 영화의 시선은 때때로 하이앵글로 올라가며, 아득한 저 하늘의 절대자가 굽어보는듯한 시선을 취하곤 한다. 즉 침묵하지만 지켜본다는 절대자의 시선, 이는 죽음 이후의 구원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는 어둠으로 가득한 삶과 죽음으로 향하는 순백, 그 이후 명확해지는 풍광의 극적 대비를 통해, 삶과 죽음의 명백한 분리를 보여준다. 비로소 에덴의 세계수의 형태로서 존재하는 아버지, 모든 것이 탁 트여 투명하게 펼쳐진 풍광, 허나 흐릿하다 한들 아버지는 분절되지 않은 롱테이크로 포착된 삶 속에서 존재해야만 한다. 즉 우리의 삶 속에서 신의 답변은 결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생의 최후까지 우리의 앞날은 칠흑 같은 밤과 같을 것이다. 허나 우리는 그럼에도 진리를 찾는 여정을 끊이지 않을 것이요, 연대의 인류애와 삶과 현실에 책임을 보여주는 예술의 역할 속에서 여정은 지속될 수 있으리라.

 


*<영원과 하루>, 바다

다음으로 <영원과 하루>이다. 침묵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시테라 섬으로의 순례>에서도 중심인물이 난민이었고, <안개 속의 풍경>의 주요한 공간 자체도 국경이었던 만큼 앙겔로풀로스의 주요한 관심 중 하나는 난민이다. 그리고 침묵 3부작 이후의 국경 3부작에서는 이 같은 관심을 극대화하며, <영원과 하루>는 그들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환기시킨다. 여전히 본 극에서도 앙겔로풀로스의 카메라가 지니는 운동성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시작, 어린 알렉산더는 그를 붙잡고자 하는 카메라로부터 언제나 멀어진다. 카메라는 알렉산더에게 가까이 근접하고자 하지만, 언제나 그를 오롯이 붙잡을 수 없다. 한편으로 브루노 간츠가 연기하는 늙은 육신의 알렉산더는 더 이상 카메라로부터 희미하게 떠나가지 않는다. 죽음이 근접한 알렉산더는 카메라 앞에서 뚜렷하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영화의 운동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바로 삶과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바다로, 아틀란티스를 향해 나서는 우리의 삶은 특정 순간에 정체되어 있지 않다. 언제나 우리는 삶과 성장을 향해 달려 나간다. 멈춘다면 그것은 곧 죽음일 것이다. 그러한 죽음은 우리가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죽음으로부터 저 멀리 달아나고자 한다. 어린 알렉산더가 바다로, 아틀란티스를 향해가는 그 여정은 아직은 죽음에서 멀리 있는 젊고 찬란한 우리의 여정, 그리고 삶에서 삶으로 향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에 근접한 알렉산더의 늙은 육신은 카메라로부터 더 이상 달아나지 않는다. 정체되어 있는 것, 달아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 멀리 있어 모호한 삶과 달리 언제나 뚜렷한 우리의 필연이자 운명, 그것은 곧 죽음이다.

 


*거리감

영화의 근접과 멀어짐은 뚜렷한 죽음과 이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삶의 여정에 상응할 수 있다. 허나 영화의 운동감, 거리감은 이러한 삶과 죽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본 극의 테마가 유고 내전 이후의 난민들의 삶을 다룬다는 영화라는 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가 난민을 어떻게 포착하는지를 다뤄야 할 것이다. 알렉산더에게 있어 난민들은 찰나적으로 근접하고, 대체적으로는 멀리 떨어져가는 존재다. 알렉산더와 같은 그리스인들에게 난민들은 결코 근접해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리고 난민을 마주하는 내부인의 태도에서도 들은 언제나 멀리 사라져야만 하는 존재다. 그래서 알렉산더와 소년의 여정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지 않을 때, 언제나 소년과 난민들의 초상은 희미하고 아스라하며 익스트림 롱숏을 통해 포착되는 떠나가는 풍광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감독은 멀어져야 하고 사라져야만 하는 난민을 향한 태도에 낙담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지는 숏의 긍정은 영화의 결말에 다름 아닌 주체적으로 자유를 찾아 나서거나, 자신들의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에 근접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앙겔로풀로스의 태도는 난민과의 근접이요, 그 근접은 인간성의 회복과 연대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즉흥적으로 알렉산더가 소년을 구출했을 때의 근접, 그 소년이 보여주는 미소를 포착하는 영화의 클로즈업, 마찬가지로 근접해서 포착되는 셀림을 애도할 줄 아는 소년의 정신, 우리가 다시금 근접해야 하는 것은 선함과 감정들이 엮여있다.

 


*비선형적인 시간

지금 여기를 이루는 알렉산더, 그리고 나는 무수한 과거, 그리고 오늘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이러한 시간을 포착하는 앙겔로풀로스의 시간은 비선형적이다. 때때로 영화는 알렉산더의 과거를 회고하는 시퀀스에서 숏의 분절을 행하기도 하지만, 그의 회고는 롱테이크로 분절 없이 포착되곤 한다. 그의 현재와 과거, 오늘과 어제는 결코 유리될 수 없고 분절될 수 없는 것임을 표명하는 롱테이크이랴. 어제로 향하는 알렉산더의 회고에서 그는 여전히 늙은 육신이다. 떠나간 이들은 알렉산더가 기억하는 최후의 순간, 찬란했던 순간에 멈춰있지만, 그만은 늙고 쇠락해있어 지금 여기의 존재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그리고 어제로부터 알렉산더는 여전히 살아있다. 지금 여기와 어제의 바다, 양자 모두 살아있는 알렉산더를 이루는 총체의 일부 인 것 이다. 나와 우리는 이 같은 시간의 연속이지만, 영화는 우리가 밟고 서 있는 땅도 이 같은 무수한 시간의 총체로서 역사를 함축한다는 태도를 보여준다. 알렉산더와 소년은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행했던 19세기에 혁명을 노래했던 한 솔로모스의 일대기를 좇고, 그 시인이 살아왔던 19세기와 당대인 20세기 후반은 한 시공간에 놓이며 서로 교차한다. 솔로모스는 그리스인임과 동시에 이탈리아에서 문학을 전공했던 이로, 그의 정신 중 일부는 그리스적인 것이었으나, 다른 반쪽은 이탈리아의 것이었다. 즉 솔로모스가 일조한 그리스 독립전쟁의 정신은 자국민인 것과 동시에, 외부인의 개입과 연대를 보여준 것이다. 외부인으로서 그는 자국의 난민들과 독립 운동가들의 생생한 단어들을 사들였다. 솔로모스에게서 그들의 단어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이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역사에의 책임

시인으로서 그리고 불우한 국가와 난민들을 바라보는 외지인의 시선으로서, 알렉산더가 밟은 대지에서 솔로모스의 현현은 곧 그들도 한때 도움을 받았던 난민이었기에, 지금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처지에서 소년을 도울 것을 요구하고 또한 이 같은 정신을 환기하는 시퀀스로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지금 여기의 이 땅을 밟고 있는 우리들은 결코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에게는 지금 여기를 이루는 것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앙겔로풀로스의 시간과 역사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그래서 영화는 알렉산더가 잃어버린 책임을 회복하는 극이요, <안개 속의 풍경>을 비롯한 그의 이전 작들과 연계하여 생각한다면 아버지들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는 극이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아내 안나가 최후를 맞는 순간, 그녀의 곁에 부재했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책임은 아니지만, 자신의 명예와 관련된 솔로모스의 형식과 단어들을 줍는데 급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너무 늦었고' 또한 '이방인'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알렉산더가 최후의 순간에 난민 소년을 만나, 그를 어떻게든 책임지려 몸부림을 치는 것은 본래 있어야 했던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며 과오를 반성하고 극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난민 소년 모두를 구원할 수 없다. 그가 구원하는 것은 거리에서 구출한 오직 금발 소년 단 한 명이다. 극의 말미까지 이름도 모르는 소년임에도, 그를 거리에서 구출했기에 이로써 관계 맺었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책임감을 느낀다. 이에 새로운 미래를 짊어진 그 소년은, 최후를 마주하는 안나가 오버랩되는 알렉산더의 마지막 순간에 부재한 빈자리를 메꿔준다. 여전히 삶은 지속될 것이기에, 오늘이 단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은 생의 옆에서 그 찰나를 보내도 결코 늦지 않다.

 


*예술의 역할

즉 그의 예술은 자신의 것도 아니었고, 솔로모스의 정신을 오롯이 이해한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솔로모스와 엮여있었지만 시인이 압제받는 그리스를 향해, 그리고 불우한 난민들을 향해, 책임져야 할 것을 짊어지는 그 태도를 옮겨내지 못했다. 그래서 본 극은 시인으로서 알렉산더가 자신의 최후에 예술이 추구해야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일련의 미학적인 탐구를 선보인다. 이는 곧 현실의 소리,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영화의 초기에 알렉산더는 소년과 소통하지 못한다. 하지만 점차 귀를 열고 소년에게 질문과 말을 걸며 지속적으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에 소년은 입을 열고 노래를 하며, 시인은 그것에 영감 받고 옮겨온다. 시인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과 유리되는 가상이 아닌, 살아 숨 쉬는 현실로서 앙겔로풀로스는 예술은 현실에 대한 일련의 거울이라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거울에는 알렉산더의 늙어가는 육신으로서 죽음이, 그리고 소년이 포착되며 그의 신분인 난민이, 또한 군인들이 포착되어 당대의 현실인 유고 내전이 드러난다. 또한 솔로모스가 난민들에게서 단어를 산다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 구원을 이룩하는 것은 창작자 자신이 아니라, 창작자가 빌려온 대상, 현실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최후에 앞서 충실한 믿음의 상징에 다름 아닌 반려견의 목줄을 풀어놓지 않던가. 허나 그 믿음을 다시금 소년을 통해 회복하며 이에 대한 믿음을 우라니아에게 맡기지 않던가. 일련의 신념, 믿음은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된다.

 


*정지된 시간과 운동성

우리는 그러한 예술로서 본 극에서 포착되는 하루, 그리고 풍광에 주목해야 한다. 싸늘한 유고내전을 드러내는 국경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서 알바니아와 맞댄 국경의 현실이 드러난다. 겨울이라는 시간과 소복하다 못해 둔탁하고 무겁게 쌓여진 잿빛 눈덩이는 유고 내전의 피해자들이 감내해야 하는 시련을 더욱 강조한다. 그리고 국경을 넘으려는 알바니아인들은 <안개 속의 풍경>에서처럼 정지된 모습으로 포착된다. 똑같이 삶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전자는 비인간성에 의해, 후자는 환경에 의해, 넘을 수 없는 운명과 환경에 의한다는 것에 차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것은 실제 죽음의 전시일지 모른다. 철조망에는 그리스의 땅에 솔로모스의 역사가 담긴 것처럼, 유고 내전의 비극을 피하려고 철조망을 넘으려던 알바니아인들의 비극의 역사가 지금 여기의 시간에도 담겨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얼어붙은 시공간과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지향하는 것은 역향이다. 마치 카메라가 근접해도 멀어져가던 꼬마 알렉산더의 모습처럼, 그리고 멀어져갈 것을 요구받아도 근접하던 난민을 향한 알렉산더의 태도처럼,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의 태도는 결코 순응하지 않는 시대의 조류와 반대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파도가 치는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산책하는 알렉산더, 소년과 함께 강의 물살과 마찬가지로 반대방향으로 걷는 알렉산더에서 물결에 반대되는 그들의 삶의 방향이 드러난다.

 

또한 겨울은 하나의 나무가 지닌 수천 개의 이파리들을 모조리 떨어지게 만들어 그들을 헐벗고 추위에 떨게 만들었다. 허나 생명력 없는 계절에 사람들은 결혼식을 행하고, 헐벗은 나무 대신 자신들의 옷가지를 이파리 삼아 신랑신부들을 축복한다. 앙겔로풀로스의 결혼은 지금까지 비극적이었다. <안개 속의 풍경>에서 결혼식에서 뛰쳐나오는 신부, <황새의 정지된 비상>에서 널따란 보폭의 강을 결코 뛰어넘지 못한 두 신랑신부 등, 결혼은 새로운 생명력, 탄생과 무관하거나, 이것이 가능하다 한들 당대의 구조, 이데올로기에 의해 침탈 받고 억압받곤 하였다. 허나 본 극에 이르러서 비로소 결혼식,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가능하게 된다. 알렉산더에게 우라노스가 믿음의 징표이자, 가정의 수호자로서 반려견을 넘겨받으며, 또한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에서 결혼식이 일어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결혼식 장면에서 연상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의 풍광이었던 알바니아와의 국경이다. 국경에는 철조망이, 결혼식이 열리는 바다광장에는 울타리가 쳐져있고, 이에 넘어오려는 사람들이 포착되는 게 동일하기 때문이다. 허나 전자의 사람들은 싸늘하게 얼어붙어있었다면, 그것이 죽음을 연상시켰다면, 후자의 사람들은 꿈틀거리고 움직인다. 결혼식을 구경하고 또한 향해가는 그들은 살아있다. 비로소 앙겔로풀로스의 세계에서 결혼식은 일어난다, 인간성이 회복되어 분열된 세계가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목도된 순간에 말이다.

 

익명의 소년은 이 같은 삶으로 향해가는 한편, 알렉산더는 이 세계를 마주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는 죽음을 거역할 수 없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다름 아닌 집이라 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는 시청각의 불일치가 드러난다. 시각적으로는 집이 포착되지만, 청각적으로는 알렉산더와 친구의 대화가 포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불일치라 할 수 없다. 이내 곧 늙은 육신의 알렉산더와 집과 집으로 이웃과 대화한다고 언급한다. 모든 타인은 집일지 모른다. 내부를 결코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희미하게 열어젖힌 좁다란 창문 틈 사이로 겨우 속내를 터놓고 소통할 뿐이다. 하지만 인물들은 언제나 이러한 집을 뛰쳐나간다. 오프닝 시퀀스도 집으로부터 바다로 나아가는 소년 알렉산더를 포착하는 것이었고, 소년의 ''인 버려진 폐허에서 난민 아이들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창문에 돌덩이를 던진다. 즉 집이 폐쇄적인 자신이요, 기억의 총체로서 죽음에 우리는 다시금 집으로 되돌아간다. 치매에 의해 퇴행하는 알렉산더의 어머니도, 안나의 최후의 순간에도 집과는 결별할 수 없으며, 자식들은 알렉산더의 '기억'이 담긴 집을 처분하겠다고 말한다. 기억의 총체로서의 집, 그리고 영원하고 싶은 기억을 회고하기 위해 더 이상 현재를 달려 나가지 못한 인물들은 집으로 돌아온다. 허나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집으로 향하지 않는다. 이는 버스를 타는 알렉산더와 소년의 여정에서도 드러난다. 알렉산더와 그의 최후를 함께하는 소년은 버스 안에 스스로 갇혀서 결국에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허나 버스 안에서 만나는 삶을 살아가는 인파들에게는 그들의 목적지가 있다. 최후에는 그들도 도착점으로 되돌아올지 모르지만, 그들은 여전히 삶의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을 끊이지 않는다. 또한 밤이라는 시간도 내일에선 영원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오늘에선 영속적이지 않아서, 여명에 상응하는 미화원들이 칠흑같은 어둠에 빛을 밝힌다. 그렇게 무수한 오늘들은 여전히 밝아온다.

 


*앙겔로풀로스가 포착하는 우리

삶은 오늘이고, 죽음은 내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잠들며 내일을 기대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무수한 오늘들이요,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는 없다. 죽음에 비로소 우리는 내일로 향하는 것인지 모른다. 삶이 무수한 오늘의 연속이요, 지나간 어제들이 축적되며 쌓인 것이라면, 내일은 비로소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가 펼쳐진다. 알렉산더의 죽음은 소년과 작별하고 되돌아가는 차안에서 멈췄다는 것, 그리고 삶을 위한 원리인 초록불이 아닌 빨간불에 운전한다는 것으로 암시되곤 한다. 그는 다시 집으로 되돌아온다. 영원하고 싶은 내일, 이는 안나의 애원이 담겨있던 편지의 편린이다. 그녀의 욕망임과 동시에, 신발을 들고 있는 안나의 모습은 소년 알렉산더의 포즈와 일치하여, 동시에 그의 욕망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가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부재했던 그 찰나, 알렉산더는 비로소 그 공백을 채운다. 불완전하고 책임을 다하지 않았던 그 오늘은, 이제는 영원하고 온전한 내일로서 우리 사후의 구원을 이룬다. <안개 속의 풍경>의 에덴처럼, 불완전함의 연속이었고 진리를 찾을 수 없었으며, 실수로 가득했던 인간 우리의 삶은 죽음 이후에 내일을 마주하며 영원할 수 있기를. 또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의 태도는 타인에게 있어 무수한 오늘을 열어젖혀주는 것, 또한 누군가의 내일이 될법한 오늘의 ''가 되어주길 행동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안개 속의 풍경>속 불라와 알렉산드르의 내일에는 오레스테스도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또한 오레스테스와 알렉산더는 그들이 마주한 이들의 오늘이 열어젖혀질 수 있게끔 선을 실현한 이들이 아니던가. 억겁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가지 않기에, 타인 또한 억겁의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끔, 또한 우리와 타인의 내일에 서로가 자리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여전히 아스라하고 흐릿한 풍광을 헤쳐 나가는 여정을 끊이지 않는다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artle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