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2) - 작품론: 초기 세 작품, 영성의 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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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2) - 작품론: 초기 세 작품, 영성의 고양

『이반의 버드나무』
전쟁이 있기까지
이반은 개울가에서 지냈네
주인을 모르는 버드나무가 자라난 곳.
개울 위로 가지를 뻗은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이것은 이반의 버드나무.
군복을 입은 채,
전쟁에서 죽은 이반은
자신의 버드나무 아래로 돌아왔네.
이반의 버드나무,
이반의 버드나무,
흰 쪽배처럼 개울가를 떠다니리.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
*<이반의 어린시절>
다음으로 초기 작품론 첫 번째, <이반의 어린 시절>이다. 블라디미르 보고몰로브의 단편소설을 원전으로 하고 있지만, 그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본 극이 이반의 이상향을 표현하는 모티브는 아르세니의 시에서 여러 영향을 받으며, <거울>이후 보다 직접적으로 투영되는 아버지의 시에 대한 영향을 데뷔작에서부터 느껴볼 수 있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쉬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내러티브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후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명확한 경계들 흑백이나 채색, 현재와 과거, 현실과 이상향의 경계를 자유롭게 무너뜨리는 그의 관심은 여지없이 드러나 있다. 그것은 이반의 과거, 꿈, 이상향에 다름 아닌 초현실적 세계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독소전쟁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드러난다. 이러한 세계를 구축함에 있어서 대비를 이루는 것은 우선 낮과 밤을 꼽을 수 있다. 이반이 꿈꾸곤 하는 초현실적인 세계는 절대자에 다름 아닌 태양이 자신의 일부인 빛을 분유하여 찬란하고도 자애롭게 내리쬐어주고 있다. 화사하고 따스함을 자아내는 충만한 자연광이 도드라진다.
*조명
허나 현재에는 이러한 빛이 없다. 단지 미약하게 일렁이는 일말의 조명에 그친다. 낮이라 한들 하늘에는 연기와 구름으로 자욱한 그늘진 세계로서 암울한 풍광들만이 대두되고, 간헐적으로 일렁이는 아름다운 강가와 태양이 포착되지만 폭격 속에서 상실되고 만다. 이러한 밤이라는 두려움의 시간 속에서 죽음은 일상화된다. 이러한 낮과 밤의 경계에 해당하는, 전쟁이 시작될 즈음을 회고하는 이반의 꿈에서 우물과 자신을 내리쬐던 태양이 서서히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손에 잡힐 것만 같은 태양은 이윽고 자취를 감추고, 이반의 또 다른 태양에 다름 아닌 어머니는 총에 맞아 사망하고 만다. 태양은 저물고만 있다. 이러한 현재의 어둠 속에서 대두되는 것은 그림자다. 이반이 처음으로 갈체프 중위와 마주했을 때, 강렬하고도 불길한 중위의 그림자가 대두되곤 하였다. 세계는 신앙심과 선함, 인간성과 종교로 대두되는 태양이 실종하였고, 이에 반하는 추악한 이념과 이에 충돌하는 거대국가라는 불온한 태양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태양이 대신 형성케 하는 그림자는 언제나 그림자를 따라다닌다. 이러한 태양은 중위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다. 그림자는 중위에게서 강렬히 대두되고 이반에게서는 대두되지 않는다. 중위가 징병된 것이라면 이반은 어린 나이임에도 파르티잔과 척후병이 되기를 결정했으므로 말이다. 허나 그 결정의 배후는 결국 거대한 타율의 영향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반에게도 그림자가 드리운다.

프란시스코 드 고야, 1808년 5월 3일의 학살, 1814
*종교성
12살의 척후병 이반, 소년을 그려내고 바라보는 타르코프스키의 시선은 가히 경건하고 신성하다. 앙상한 이반이 처음 비춰지는 것은 헛간이다. 그곳은 그리스도가 태어난 곳, 이반은 전쟁에 참여한다는 죄를 짊어지지만 이윽고 차가운 강물에 몸을 담그며 이 같은 죄를 정화하고 씻어낸다. 그리고 빛이 없는 세계지만 이반의 뒤에서는 후광이 비춘다. 이후 인간성을 보이는 고체프에게도 타르코프스키가 후광을 허락한다는 것을 본다면, 그 빛이란 선한 인물들을 관통하는 신성한 굽어봄에 다름 아니다. 또한 전쟁에 참여할 이유도 없는 12살 소년이 전쟁에 참여하는, 성인남성주체들이 일으킨 죄를 몸소 짊어지려 한다. 아이는 곧 죄를 짊어진 그리스도에 다름 아니다. 앙상한 살거죽을 내비치며 목욕하는 장면과, 그 이후 순백의 옷을 입는 장면 또한 그리스도의 복식을 연상케 한다. 허나 이러한 순교자는 곧 대위에 의해서 회색 옷이 입혀진다. 순수한 아이까지 전쟁에 동원하는 탁하고 부정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듯 말이다. 하지만 이반의 행위는 이와 대비를 이룬다. 군사학교 및 고아원에 가지 않으려하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 한다. 타율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자유는, 인민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이데올로기의 비자유와 대비된다. 또한 이반은 전쟁에 의해 추락하고 떨어져버린 종을 다시금 매단다. 예배를 위한 종이자 망자를 애도하는 종으로서, 종은 곧 타르코프스키의 세계에서 정교회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다음 작품인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 종을 다시금 재건하는 것이 하나의 숙명이 되는 것을 보라. 전쟁에 의해 인간성, 선함을 천명해야 하는 종교는 추락했다. 황폐하게 흉물이 된 십자가 또한 이 같은 종교가 부재한 세계를 드러낸다. 이반은 종교에 다름 아닌 종을 다시금 매달며, 이 세계를 바로잡는다는 사명을 몸소 실천에 옮긴다.

알브레히트 뒤러, 묵시록의 네 기사, 1498
매달려 있어야 마땅한 종이 추락하고, 또한 십자가는 황폐하게 불태워지고 흉물이 된 세계이다. 회화를 마주하고 시와 소설을 읽어야 할 소년은 병법서를 익히며, 정신성 대신 무력을 체화한다. 또한 들려오는 노래는 곧 낭만이자 사치에 다름 아니요, 독일은 자신들이 쌓아올린 가치들을 몸소 불태우고 짓밟는다. 본 극에서 강조되는 회화는 북유럽 르네상스의 대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인 <묵시록의 네 기사들>이다. 세상의 인류가 선함을 잃고 악함으로 가득 차 타인을 해하고 시기하며, 또한 거짓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사람들을 선동한다. 이러한 역한 세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악한들을 심판하고 선인들을 구원하며, 세계를 바로잡을 것이라는 테마. 이러한 심판에 있어 네 기사는 각각 지배와 전쟁, 기근과 역병에 상응하며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만든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심판과 종말은 인류가 몸소 불러오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본 작품을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 본 그림을 태동시킨 독일이 곧 나치즘으로 인류를 야만의 시대에 빠뜨리고, 또한 히틀러라는 거짓 그리스도가 재림하며, 나치즘과 파시즘이 불러일으킨 2차 대전은 지배와 전쟁, 기근과 역병으로 인류를 종말의 위기에 내몬다. 어둠과 두 척후병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이를 경고용으로 전시하며 무덤에 누이지도 못하게 만드는 비인간성, 이에 대응하는 이들도 아이들을 전선에 투입하는 비정함 속에서,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누군가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멸망할 것이다.
*희망
이러한 희망을 곧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이반과, 또한 아이로서 미래에 상응하는 이반, 그리고 여성인 마샤에서 엿본다. 이러한 그들은 남성주체들의 회개, 인간성의 회복을 자극한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꽃핀다. 갈체프와 마샤의 미묘한 감정, 이러한 사랑 속에서 여전히 상실되지 않는 미래가 엿보인다. 한편 이러한 여성들은 남성(콜린)에 의해 참호에 떨어질 위기를 겪는다. 이러한 위기를 겪지 않게끔 남성들은 마샤를 안아야만 한다. 또한 타르코프스키의 종교적인 성적 통념 속에서 여성들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들과 아이들이 생존하여 미래를 엿볼 수 있어야만 한다. 마샤의 시점 숏에 상응하는 시퀀스 속에서 일련의 낭만이 엿보인다. 이후 비춰지는 희생당한 두 척후병 때문에 현실은 절망적이라는 바가 포착됨에도 말이다. 또한 전쟁이 끝난 이후 이반을 입양하겠다고 하는 군인들, 더 이상 남성주체들은 무책임한 폭력과 증오로 일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인간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척후병으로서 이반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치들에 의해 전시되었던 아군 척후병의 주검을 거둬온다. 세상은 이러한 원리로 이뤄져야만 한다. 한편 복수심에 눈이 멀고,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성인들의 죄를 짊어진 이반에게 과연 미래란 허락될 수 있을까.
*이상향, 구원
어쩌면 오프닝에서 거미줄과 함께 놓인 이반을 포착하는 시퀀스에서, 이데올로기와 전쟁이라는 덫에 걸린 그의 운명은 예고된 것인지 모른다. 허나 그럼에도 자신이 유용하다 외치는 이반은 행동을 끊이지 않는다. 과연 인민들을 전선에 내보내는 소련이 가진 사회주의라는 이념이 건강한 형태로 흘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한평생 이념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타르코프스키는 결코 현재에 이념이 긍정적으로 흘러간다는 바를 긍정하지 않았다. 그는 이반의 행위를 통해서 사회주의라는 이념, 혹은 종교적인 선함이 회복된 세계를 그려낸다. 현재에서 이반은 군사학교에 가기 싫어 고향에 돌아간다. 거기서 어떤 노인을 만난다. 고향은 예전의 아름다움을 잃고 폐허가 되어있다. 이내 곧 콜린이 그를 데리러온다. 떠나기 전 이반은 그 노인에게 빵과 통조림을 남긴다. 생명의 영위를 위함이다. 또한 이반이 꿈꾸는 이상향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시퀀스 중 하나는, 트럭에 충만하게 가득 찬 사과와 이를 먹는 말의 평온한 풍광이다. 말에게 사과를 먹여도, 또한 몇 개쯤 흘려도 아무렇지 않다. 그것이 생명의 영위를 위한다면, 또한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공동의 삶을 위한다면 말이다. 이념에 부정적이었던 타르코프스키를 생각하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닌 타인을 위하는 선함일 수 도 있을 테다. 허나 사회주의의 본령이 되었든 선함이 되었든, 결국 이로 인해 공동이 이로운 세계로 도달해야 한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세계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반은 언제나 꿈을 꾸며 과거를 갈망하고, 고향에서 만난 노인 또한 치매를 앓으며 과거 속에 살아간다. 결국 이 암담한 세계의 전쟁은 종결되지만, 그것에는 이반의 희생이라는 처절하고도 신성한 순교가 수반된다. 이반의 신성한 희생이자 순교란, 이반 사후 구원의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물위를 걷는 기적을 포착하면서 드러난다. 이는 물위를 걷는 기적을 선보인 그리스도의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일담을 연상시키며 이반의 그리스도화를 더욱 공고히 한다. 이러한 희생으로 도래시켜야만 하는 세계란 무엇인가. 현실과 이상향,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구분함에 있어 낮과 밤과 함께 도드라진 것이 바로 감각성이자, 또한 가족의 회복이다. 생명력에 상응하는 나무가 상승하는 운동성으로 포착되고, 널따란 바다가 청량하게 펼쳐져있으며, 마실 물이 도처에 널려있고, 태양 및 자연이 회복하여 변덕스러운 자연, 비와 천둥 번개를 느낄 수 있는 세계에 다름 아니다. 시원하고 촉촉한 비에서 느껴지는 물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세계, 또한 어머니와 동생, 친구들과 노닐 수 있는 평화롭고도 눈부신 풍광, 그러한 찬란한 과거 및 이상향을 도래시켜야만 한다. 향수에 빠져서 기다릴 수 는 없는 노릇이다. 구원은 현실에서 도래해야만 한다. 폭력, 증오의 종결과 평화와 인간성의 복권을 노래하는 타르코프스키의 가장 명확한 작품,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성과 더불어 그의 색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부재하는 아버지로서, 이반의 그리스도라는 상징에도 상응하지만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 언제나 바깥에서 진리를 탐구하던 아버지의 자리에 상응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재하는 아버지란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 갈망하는 바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보수적인 성별의 구획 속에서 진리를 찾아 떠나가야만 하는 주체적인 인류의 의무와 여정에 상응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다음으로 중세 러시아 이콘화의 대가로 알려진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다. 중세회화의 핵심은 색채다. 형태는 교리에 의해 단순하게 표현되고, 그리스도의 권능과 그가 하사한 것으로 믿어지는 빛을 찬미하기 위한, 오색찬란한 색채들의 다채로운 조화가 대두된다. 허나 본 극은 흑백이다. 컬러영화로 찍을 수 있는 시기임에도 흑백으로 촬영된다. 이는 색채가 앗아간 세계이다. 또한 중세까지 신앙인과 화가는 사실상 일체를 이룬다. 언제나 회화 및 조각은 종교와 깊은 관련을 맺었기 때문에, 신앙심이 배제된 화가가 종교미술을 제작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루블료프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영화는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될, 신앙심을 되찾는 여정이다. 본 세계가 신앙심을 잃어간다는 것은 오프닝의 강렬한 시퀀스로 포착된다. 성당에서 한 인물이 열기구를 타고 비행을 행한다. 타로포크스키 특유의 절대적인 시간에 상응하는 롱테이크는 짧게 분절한다. 그가 부여한 시간을 거스르려는 듯이, 또한 조물주가 빚어낸 지상의 중력이라는 원리를 거역한다. 그는 절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마주하고자 한다. 본 극에서 줄곧 포착되는 러시아를 향한 시련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일 것이다. 허나 인류가 이룩한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는 초원의 소들을 위협한다. 또한 인류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요동치는 불완전한 핸드 헬드로 포착되는 비행자는 곧 추락하고 만다. 신앙심이 무너져 조물주의 권능을 넘보고자 하지만, 인류는 중력과 시간을 거스르기에 나약하다.
*중세 러시아
허나 그렇게 추락했다고 한들 신앙심이 회복된 세계인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포착되는 시퀀스는 광대가 포착된다. 그는 귀족들을 조롱한다. 조물주는 귀족과 평인의 육체를 동등하게 빚어내었으나, 똑같은 육체를 가진 누군가는 수탈하고, 누군가는 착취당한다. 누군가는 종교적인 공간에 해당하는 헛간에 에둘러 앉아있지만, 누군가는 그러한 시련을 겪을 줄 모른다. 또한 누군가는 비라는 시련을 겪으며 정화의 시간을 갖지만, 누군가는 햇빛 찬란한 그리스도의 축복밖에 누릴 줄 모른다. 귀족들은 시련을 겪기를 거부하였으며, 또한 비를 맞지 않아 신성하지도 않다. 귀족을 풍자하는 광대는 실로 신성하나, 그는 귀족에 의해서 유폐 당한다. 귀족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신앙의 대리인처럼 행동한다. 허나 신성을 잃은 귀족들에게서 시민들을 문책할 권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귀족들 밑에서 러시아의 농민들은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책형당하는 그리스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러시아 농민들의 운명에 상응하는, 겨울의 시베리아에 십자가를 지고 횡단하는 러시아인들의 행렬을 타르코프스키는 스크린에 그려낸다. 이를 통해 20세기 시베리아라는 순교의 공간에서의 시련을 겪었던 러시아 대문호들의 종교성을 타르코프스키가 스크린을 통해 시청각적으로 계승한다. 이렇게 정교회는 이러한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특히 자본에 의해 더럽혀졌다. 그래서 루블료프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러한 정교회의 밑에서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기란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신앙의 약화
과연 정교회가 띠어야하는 역할이란 무엇인가. 루블료프는 사랑이라 말한다. 정교회는 이방인이나 이교도들을 아가페의 정신이 띠는 넓은 아량으로 감싸 안아야만 한다. 침엽수들이 빽빽하고 또한 어둠이 뒤덮여 음침하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시공간, 거기서 디오니소스 밀교의 이교도들이 그들이 숭배하는 욕망의 연회를 벌인다. 이교도들과 정교회의 태도는 나룻배를 통해서 대비를 이룬다. 이교도들은 나룻배를 노 젓지 않고, 그저 강물의 흐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둔다. 한편 정교도에 상응하는 루블료프의 무리는 노를 힘겹게 저으며 강물의 흐름을 거스르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성을 쫓아간다. 전자는 강물의 흐름에 다름 아닌 욕망과 동물적인 삶만을 좇는 태도, 후자는 이러한 유혹에 거역하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한편 이교도들 또한 치열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공의 핍박 속에서 팔로 강물을 헤엄치고, 물결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대공의 부하들의 태도와 대비를 이룬다. 말을 착취하고 또한 같은 인류를 착취하며 어떠한 시련도 겪지 않는 사랑 없는 이들과, 정교도들과 이교도들 모두 일련의 시련을 겪고 있는 태도가 대비를 이룬다. 정교의 대리인으로서 신앙심을 간직하고, 특히 사랑으로 이교도 또한 감싸 안아야 할 대공은 폭력으로 응대하고, 이교도 및 이방인들을 탄압하고 배제한다. 영화 속 하이앵글은 절대자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절대자가 굽어보는 신앙심 깊은 루블료프의 일원들의 눈알을 대공의 부하들이 뽑아버린다. 영혼의 창에 다름 아닌 눈을 해하는 그들의 악랄함을 통해, 대공일가의 추악한 영혼을 강조한다. 루블료프는 영혼을 파괴하는 대공의 공포정치를 선전할 종교화를 그리고 싶지 않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최후의 심판>이지만 루블료프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아가페의 정신이 스며든 신앙이 녹아든 종교화다. 이렇게 교리의 위반, 신앙이 추락하는 세계 속에서 러시아 내부의 결속은 서서히 느슨해지고 있다.
이렇게 1부는 러시아 내부에서 신앙심을 잃고 결속력이 느슨해지며 자멸하는 러시아인들의 시련을 포착한다. 그리고 2부는 외부의 침략으로, 타르코프스키는 이러한 외세의 침략의 원인 또한 결국 신앙심의 약화가 원인이 된 것으로 주장한다. 대공의 형제는 권력다툼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유다가 되어, 러시아를 배반하고 자신의 모국에 타타르인들을 침략시킨다. 즉 내부의 타락으로 외세가 능동적으로 침략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타타르인들의 종교에 대한 무지와 종교를 알면서도, 특히 대주교가 평화와 화합을 천명했음에도 이를 거역한 대공의 태도를 대비시킨다. 무지로 성소인 성당을 침략한자와, 성소를 침략하게 허한 종교를 악용하는 정치인, 깨우침으로서 회개의 가능성이 있는 자와 알면서도 악덕을 반복한 자. 또한 대공의 공포정치 속에서 내부의 결속이 느슨해지자, 외세의 침략에 맞설 힘조차 부재한다. 타타르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하는 러시아인들의 운명을 감독은 역시 하이앵글로 포착한다. 절대자가 굽어보는 하이앵글을 통해 그것이 숭고한 순교임을 강조한다. 특히나 루블료프의 시종인 토마는 강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순수한 강에서 최후를 맞으며 그 희생은 종교적으로 정화와 승화를 이룸을 드러낸다. 한편으로 이렇게 순교하지 못한 안드레이는 책임이 있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한다. 나를 지우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일, 그럼으로써 신앙심을 회복하는 과정이리라.
*종의 소년, 니콜라이 버리아예프
폐허가 된 블라디미르, 허나 그러한 순교와 희생 속에서는 구원이 꽃피어야만 한다. 물론 생존 자체가 어려운 세계다. 타르코프스키에 있어 사과는 생명력의 상징으로서 인류의 영위에 기여한다.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트럭에 가득 찬 황홀한 사과를 기억해보라. 허나 본 극에 이르러 사과는 더 이상 싱싱하지도 않아 곪아있고, 또한 충만하지도 않다. 전 인류의 생존을 보듬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 루블료프의 주변을 떠도는 백치여인은 타타르의 침략 이전에 비극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인간성이 돋보인 인물이었다. 허나 그러한 인간성은 당장의 생존 속에서 망각된다. 타타르족의 갑옷은 거울처럼 그녀 자신이 비춰진다. 그녀 자신이 지금 진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녀는 마주한 듯, 루블료프의 만류에도 타타르족을 따라가 버린다. 결국엔 생존해야 만이 신앙심과 종교도 재건시킬 수 있는 것이지만, 권력의 투쟁 속에서 백성들을 저버린 세계이기 때문에 그 시공간에서 생존 자체가 절망적인 환경에 놓여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누군가들은 신앙심을 일깨우고, 선한 마음으로 다시금 세계를 재건시켜야만 하리라. 그것은 성당의 종을 재건하는 일로서 실현된다. 종 또한 결국 신앙심이 긷든 인물이 제작할 수 있는 성물에 다름 아니요, 그것을 만드는 일에는 열렬한 신앙심과 희생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종을 빚어낼 흙을 찾는 과정과 그것을 구워낼 터를 발견하는 과정이 이러한 신앙의 절차를 보여준다. 흙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이러한 시련을 굽어보는 그리스도가 비를 내려 계시로서 흙을 점찍어준다. 구워낼 터 또한 생명수가 자리 잡고 있는, 종교성이 있는 터여야만 하여 결코 쉬이 찾아낼 수 없다. 허나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찾다보면 결국에는 찾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신앙심을 잃은 주물공과 시민들은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허나 대규모의 인력이 투입되는 일에 결국에는 종을 만들기 위한 신앙심으로 단결하게 되며, 대공에 의해 느슨해진 세계는 회복의 맹아를 틔운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영광의 그리스도, 1408
배신한 키릴은 회개하고, 대공의 문책에도 광대는 굴하지 않으며, 권력을 침탈한 대공은 결국 최후를 맞는다. 즉 회개한 종교적인 인물들에게만이 삶은 허락된다. 또한 보리스는 자신이 행한 폭압과 거짓말이라는 죄를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다. 보리스를 맡은 배우는 니콜라이 버리아예프로서 그는 <이반의 어린 시절>에서 이반을 맡았었고, 마찬가지로 고아였으며 종을 다시 매달곤 했다. 소년이라는 미래에 상응하는 그가 이전 작에서는 이데올로기의 만행을 바로잡는 어린 순교자에 다름 아니었다면, 본 작에 이르러서는 신앙심을 바로잡고 현재와 미래를 짊어진 살아남은 인물로서 그에게서 희망을 틔운다. 이러한 회개를 자애로운 마음으로 품어내며 안드레이 또한 입을 열고, 비로소 신앙심을 회복한다. 이렇게 신앙심이 다시금 회복한 세계에서 안드레이는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에는 황홀한 색채들이 가득하다. 또한 타타르인들이나 대공에 의해 종속되었던 말들은 조물주가 창조한 상태 그대로 자연에서 뛰어논다. 그 풍광에는 깨끗하고도 투명한 정화의 비가 내린다. 색채란 이러한 세계 속에서, 그리고 작가 개인이 신앙심을 회복한 상태에서만이 사용할 수 있으리라. 이러한 <안드레이 루블료프>는 단순한 전기 영화라기보다, 러시아가 대내외적으로 겪은 비극을 타르코프스키가 정교회 신자라는 시각에서 풀어내는 역사영화라 볼 수 있다. 또한 종교인임과 동시에 작가인 그의 예술관을 천명하는, 초기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그 자신이 열렬히 투영된 일련의 자전적인 영화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솔라리스>
이렇게 초기작은 타르코프스키가 지금의 시간이 아닌 과거로 향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보다 가까운 과거로, 그리고 먼 과거로, 이러한 과거로 향해 작금에 필요한 것을 길어온다. 그리고 타르코프스키는 세 번째 작품인 <솔라리스>의 가까울지도 그리고 멀지도 모르는 미래로 향한다. 그곳으로 향한 타르코프스키는 길어 올리기보다는, 과거에도 변치 않는 바를 못 박는다. 크리스의 아버지가 전통적인 취향과 혁신을 굳이 추구하지 않는다는 언급, 그 직후 내리는 감각적이고도 청명한 비, 이 같은 시퀀스가 타르코프스키가 미래에도 유지되었으면 사상 및 풍광에 다름 아니다. 또한 오프닝에서 포착하는 감각적인 식물들의 클로즈업 또한 그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가 일련 드러난다.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환경은 수중과 대지, 두 공간이 포착된다. 클로즈업으로 포착되는 움직임은 자연의 원리에 의해 속절없이 부대끼는 식물들의 나약한 잎사귀들이다. 식물들은 물살의 흐름이 되었든, 세찬 바람이 되었든 그러한 흐름과 방향에 결코 거역할 수 없다. 순응할 수 없는 자연의 원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뿌리내리고 이 세계를 살아간다.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인류는 두 다리로 이 세계를 지탱한다. 이러한 날 것의 자연에의 순응과, 또한 클로즈업으로 포착되는 바는 연약한 풀잎들의 표피와 물살 및 바람의 때로는 사근거리고 때로는 세찬 감각성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감각성을 자극하는 것은 자연의 근원적인 생명력이 포착되는 녹색에 다름 아니다. 결국 그 감각성이란 우리의 무덤해진 삶을 향한 의지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리라.
*폭력적인 기술
허나 경계하는 것은 삭막하고도 딱딱하며, 어떠한 감각성도 포착하기 어려운 기계문명의 풍광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본 작의 sf적인 세계관을 위해서 도쿄로 로케이션을 향했다. 70년 당대에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며 도쿄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현대적이고 또한 지향점인 도시에 다름 아니었다. 허나 이러한 세계에는 감각성이 없다. 차는 일정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소통하는 인물들은 부재하며, 무엇보다 색상이 부재했다. 흰 색 캔버스에 다채로운 색이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모든 색들의 끝에 다름 아닌 검정색, 그것의 중턱인 회색빛에만 경도되고 있다. 이러한 생기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태도도 딱딱하기 그지없다. 타르코프스키가 살아간 20세기는 이성이 추락한 두 차례의 세계적인 비극을 마주한 시점이었다. 허나 타르코프스키가 그려내는 미래에 다시금 이성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은 타르코프스키에게 재앙이다. 인물들은 오직 이성적으로 판별되는 원리 및 시각에만 집중한다. 영혼의 창에 다름 아닌 살아 숨 쉬는 우리의 몸에 달린 눈이 경험한 기억은 배제된다. 오직 이성적이고도 객관적인 카메라가 담아낸 시각만을 믿으며, 이러한 기계중심적인 사고 속에서 인류는 배제된다. 기술은 인류를 고립시킨다. 또한 합리적인 사고로 계산을 통하여, 인류에게 결코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이 되면 파괴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다. 그것의 탐사와 연구를 명확히 행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류가 자신들로부터 소거하고자 하는 바는 합리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에 다름 아니다. 허나 우주로 향하는 시대임에도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자연과 조화로운 전원이며, 또한 성인들은 이성을 필두로 반목할지언정, 아이들은 어떠한 편견에도 휩싸이지 않는 태도를 통해 상대방과 소통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여전히 희망을 품어낸다. 또한 과학이 감정과 주관성을 유리하고, 또한 그것의 우월성과 존재이유를 위해서 비합리적인 것들을 파괴함에도 결국 그러한 과학을 결정하는 것은 인류이다. 인류는 그들의 한계를 드러내게 만드는 비합리적이고 또한 미지의 대상인 솔라리스를 파괴하려 한다. 극의 주인공 크리스는 이러한 계획에 열렬히 동의한다. 허나 이러한 계획은 결국 크리스의 주관성에 의해 꺾어진다. 먼저 솔라리스로 향했던 페히어라는 비행사의 기억을 솔라리스가 읽어내어, 이를 물리적으로 가시화시키고 물질적인 존재로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크리스는 이에 매료된다. 자신 또한 물리적으로 영영 잃어버린 존재가 있고, 구현하고 싶은 존재가 있다는 듯, 결국 주관성에 의해 과학은 좌우되는 바를 통해서 인류는 주관성과 감정을 결코 꺾을 수 없음을 드러낸다. 이와 더불어 솔라리스에서의 탐사과정을 통해서 이러한 감정에 상응하는 도덕률 및 인간성과 화해한 과학의 태도를 타르코프스키는 그려낸다.
*타자
솔라리스가 만들어내는 존재의 특성은 크게 둘을 포착할 수 있다. 하나는 불멸성과 하나는 우리의 무의식에서 상응한다는 것이다. 우선 전자의 특성의 경우 종교성에 상응하듯 하다. 이제 인류를 지배하는 원리는 지구와 중력이 아니다. 이제는 무중력이 자리하고, 중력일 수 있는 세계는 제한되며, 또한 솔라리스를 향한 인류의 태도는 미지와 두려움에 둘러싸인 원시인에 다름 아니다. 원시인들에게는 의지의 대상이 필요하다. 유한한 운명 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또한 이 세계를 이해하게 만들어줄 대상을 바란다. 이로써 의지의 대상으로 종교가 태동한다. '손님'들은 이러한 솔라리스의 대리자로서, 그들의 불멸하는 특성은 솔라리스라는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게 해준다. 이방인으로서 인류가 갖지는 못했을지언정, 원주민인 그들에게는 보편률인 것이다. 허나 인류의 아집이란 그러한 절대적 진리의 현현을 두고,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기베리안은 이러한 진리를 두고 외면하고 거짓 속에서 자살하거나, 사토리우스는 이러한 세계 위에 군림하기 위하여 솔라리스의 불멸성을 파헤치는 연구 및 파괴방안을 모색한다. 허나 우리는 코스모스에 다름 아닌 솔라리스가 일으키는 파도의 약동하는 생명의 출렁임을 마주하며, 그것이 파괴했을 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 반문한다. 우리의 합리적인 판단으로 행할 수 없는 역학적인 숭고의 대상으로서의 솔라리스.
이러한 솔라리스는 불멸의 대상으로서 일련의 신을 현현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에 자리한 간절한 타자를 우리 앞에 현현시킨다. 그들은 크리스에게 있어서는 욕망의 대상이나, 한편으로 그러한 존재는 대다수의 인류들이 관계맺음에 있어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드러낸다. 솔라리스의 ‘손님’은 크리스 욕망의 대상인 하리와 똑같은 용모를 지닌다. 허나 외형은 똑같을지언정, 정신은 텅 비어있다. 크리스의 무의식, 잠재의식, 기억에서 비롯된 그 손님은 크리스가 얼마나 하리를 몰랐는지, 크리스가 그저 자신의 입장에서 규정된 '환영'으로서 하리를 사랑해왔는지를 드러낸다. 손님은 마냥 크리스를 사랑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고, 또한 주체성이 부재하여 있다. 이러한 타자를 두고 앞서 언급했듯 누군가는 어쩌면 불온했을 그 욕망을 외면하거나, 누군가는 은폐한다. 또한 사랑이 아닌 탐구의 대상이자,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대상으로서 지배하거나 도구화한다. 허나 크리스는 그 진실한 사랑을 외부에 선언하듯 결코 숨기지 않는다. 허나 수동적이고 기계적으로 크리스를 거짓 사랑하다, 진정으로 크리스를 사랑하려하는 하리는 반문을 행한다. 크리스는 하리를 사랑하지만 나는 하리가 아니며, 나의 존재는 누구란 말인가?

피터르 브뤼겔, 눈 밭의 사냥꾼, 1565
*존재 자체로의 긍정
그 손님은 결코 하리일 수 없다. 하리가 크리스와 함께한 시련의 공간인 시베리아를 연상케 하는 브뤼겔의 <눈밭의 사냥꾼들>속 풍광과, 크리스와 아버지의 필름에 담긴 사계 속에서 살아온 존재라면, 손님은 그것을 모르는 존재고 그저 상상하는 존재, 그것의 감각을 모르는 존재다. 주체성과 감각성이 틔면 틜수록 크리스가 손님을 향한 하리의 규정에 몸서리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소통은 일방적이다. 손님 자신이 하리가 아니라는 말에 크리스는 외면하고, 그저 자신이 손님을 하리로 규정하고 사랑하려 한다. 타르코프스키가 이후 작품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공중 부양하는 정사는, 본 극에서 환경이 무중력상태로 변하자 이에 의해 찰나적으로 사용된다. 진정으로 육체와 정신이 교감한 사랑은 찰나적이고, 대부분은 폭력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본 극이 나아가는 것은, 이로써 역설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과 소통의 형태에 있다. 크리스는 꿈속에서 어머니와의 만남 이후 손님을 하리로 투영한 사랑을 단념한다. 하리를 향한 진정한 사랑이라면 이제는 망자가 된 하리를 인정하고, 이제는 그녀가 부재한 흔적만이 남은 공간들을 배회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크리스는 자신이 중력이 되어 대상을 나에게 귀속시키려는 그 폭력적인 시선을 극복한다. 이러한 크리스의 뇌파를 동료들이 솔라리스에게 보낸다. 언제나 요구받은 타자들만을 생산하던 솔라리스는 생산을 멈춘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섬들을 탄생시킨다.
*상대주의와 감각성의 긍정
또한 이러한 탄생에 있어 언제나 독립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솔라리스 또한 조물주가 만들어낸 원리의 일부일까, 혼자 오롯이 생산하지는 못한다. 솔라리스가 모체라면 부체인 누군가의 잠재의식이나 기억이 필요하다. 둘의 합일 속에서 생명이 탄생한다. 인류를 지배하는 원리는 독립적이거나 절대적이지 않다는 듯,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관계에 둘러싸여 있다. 크리스가 하리를 향한 욕망 또한 독립적이지 않고, 어머니를 욕망했던 남근기의 기억 속에서 상대적으로 형성된 바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엄격하고도 편협한 이성제일주의를 본 극에서 부정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렇게 상대적인 것들의 연속으로 형성된 세계를 이해하기에, 이성적으로만 접근한다면 이해 불가능한 것들 투성일 것이므로. 그래서 오만한 자신의 이기적인 판단이 아닌, 상대방의 총체를 이해하는 바가 중요하며, 타르코프스키는 그러한 이해를 돕기 위함으로 일련의 감각성을 중시한다. 영화의 결말에서 솔라리스가 탄생시킨 섬을 포착한다. 정거장의 천편일률적인 차가움과 딱딱함, 그리고 무감함이 아닌, 변화무쌍한 날씨와 불완전성으로 인해 다채로운 감각성이 대두되는 세계이다. 또한 집안은 물이 새서 불안정하지만, 재회한 아버지와 크리스의 감정은 온당 살아있다. 그것이 타르코프스키가 긍정하는 바로 감각성이다.
또한 섬에서 포착된 불완전성, 우리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은 유한성이다. 허나 유한하기에 우리는 다채로운 감각을 만끽하려는 노력과, 생의 방향에 있어 무한한 자유를 누리려한다. 그것에 죽음이라는 운명이 기다리더라도, 삶은 무한하게 열어젖혀진다. 그 섬에서 정적인 카메라 프레임 바깥으로 자주 나가곤 하는 크리스, 우리는 언제나 시선을 벗어나야만 한다. 그 카메라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고, 또한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 도 있을 테다. 허나 우리는 타인들이 그저 우리 시선 바깥으로 언제나 벗어날 수 있게끔 내버려 둬야만 한다. 그러한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할 때, 또한 세계의 원리 그 자체에 순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대상의 총체와 소통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과거로부터 길어 올린 가치들로 쌓아올린 미래에 다름 아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그것은 세계 그 자체를 이해하는 일, 이를 도모하는 것으로 감정과 감각성을 두고 있다. 인류라면 절대로 잃어선 안 되는 것이 남아있는 미래, 우리는 이러한 세계로 향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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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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