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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빅토르 위고(2) | ARTLECTURE

"화가" 빅토르 위고(2)

--위고가 그린 동양풍의 수묵화--

/People & Artist/
by 양효주
"화가" 빅토르 위고(2)
--위고가 그린 동양풍의 수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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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그는 예술의 위계보다도 상호 연관되는 방식을 더 중요시한 예술가였다고 사료된다. 상이한 예술은 상호 작용을 할 때 예술의 감각적 특질이 더 향상된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면서 그림을 그렸고, 부르주아지가 추구한 격정적이고 화려한 감각적 유희와 더불어 도덕과 진실성을 추구하는 민중적 노력을 해왔으며, 비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신비로운 관념, 이국적인 동양 취미까지 어우러진 개성적이고 혼성적인 예술관을 표방하였다. 이는 매우 진보적인 예술 행보로, 당대의 위대한 문학‧예술비평가 보들레르의 말처럼 그는 19세기 최초의 현대인이자 혁신적인 예술가였음에 틀림없다....

(전편:https://artlecture.com/article/669)

 

빅토르 위고의 회화세계

 

앞서 쓴 "화가 빅토르 위고(1): 화가 빅토르 위고 소개 및 동양취향(시느와즈리chinoiserie)"에 이어서 본 글에서는 위고의 회화세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보면 그가 다채로운 색감의 유화보다도 흑백의 강한 색 대비가 돋보이는 모노크롬 회화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양 미술사학계에서는 생전에 그가 존경하였던 화가 뒤러와 렘브란트, 판화가 피라네시의 작품에서 받은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나 글쓴이는 -이와 같은 선행 연구자들의 해석과 연구성과를 수용하면서도-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동양 취향을 중요 요소로 꼽는 바이다. 위고는 잉크와 물을 이용한 단색화를 많이 그렸는데 흥미롭게도 동양의 (Chinese ink, Indian ink, Lamp black)’을 주 재료로 사용하였다.

 


왼쪽의 텍스트는 위고가 쓴 작업일지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고, 오른쪽의 그림들은 위고의 그림들이다. 위고는 먹을 회화의 주된 재료로 썼다. 양효주



위고가 일반적인 서양 잉크만을 쓰지 않고 먹을 쓴 이유는 보다 짙고 선명한 발색으로 그림에 깊고 강한 맛을 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을음을 원료로 하는 먹은 색깔이 아주 검고 시간이 오래 흘러도 빛깔이 퇴색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깊은 아름다움이 우러나오는 물리적 특성을 갖는다. 또한 먹은 부착력이 강해서 종이 속까지 깊이 침투하며 물 조절에 의한 농담과 번짐의 효과로 예술적 조형성을 이룬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먹의 물리적 성질을 이용해 다양한 수묵화의 기법들이 창출되었다. 예컨대 물을 조절하여 먹의 농담을 여러 단계로 만들어 형태와 거리감을 내고 구름, 안개, 노을, 그리고 비속에 소멸되는 형태와 형태 위에 번쩍이는 광선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암시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위고 역시 "수묵(Water and Ink)을 이용해 동양화풍의 먹그림을 그렸다”(이태호, 2016 :먹으로 그린 가을 정취, 정선의 <도봉추색도>)


 

수묵화라는 명칭은 서양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어권에서는 ‘Ink-wash painting(drawing)’이라 불리며, 블랙잉크로 그린 중국화(Chinese painting)’에 기원을 둔 동아시아의 그리기 방식을 뜻한다. 일명 문인화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로는 수묵화라고 부른다고 표기한다.

서양의 선행 연구자들은 위고의 회화 양식을 ‘Ink-wash drawing’ 혹은 ‘Ink-wash painting’이라고 지칭한다. 글쓴이는 이 말을 우리말로 바꾸어 본 글에서 '먹그림', '수묵화라고 쓰겠다.




양효주

 



위고의 회화의 배경

 

19세기 초 파리 화단은 화가 도미니크 앵그르(Dominique Ingres)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유화 그림이 선풍이었다. 위고 역시 1819년 파리 미술전에서 본 앵그르의 작품 <La Grande Odalisque>1827년 파리 미술전에서 본 들라크루아의 작품 <L a Mort de Sardanapale>으로부터 받은 강렬한 시각 경험에 매료되었으나 이에 대한 감흥은 오래지 않아 식어 버렸다. 그는 다채롭고 풍부한 색채의 아름다움보다도 흑과 백’, ‘빛과 어둠이라는 강한 대조(contrast)의 미를 더 선호했다. 이와 같이 변모한 그의 미적 취향은 이미 문학잡지 콩세르바퉤르 리떼레르Le Conservateur littéraire(1820-21)에 기고한 그의 글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위고는 아실 에트나 미샬롱(Achille Etna Michallon, 1796-1822)의 작품 <Œdipe se réfugiant près du temple des Euménides>에 대한 감상평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양효주



이후로 위고는 보다 더 깊이 흑백 단색화에 매료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집Oeuves Complètes de Victor Hugo(1819-34)에 중국화와 플랑드르의 회화가 검은 화풍이라는 동일한 특징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양효주



이제 위고의 회화작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중국화(동양화)와의 연관성을 추적해보자.

작품 <Landscape with river>(1837-1840)은 호젓한 강의 정취를 표현했다. 그림은 전경-원경의 경치가 평행으로 나열되어 있다. 근경과 중경 사이에 자리한 강과 그 너머의 하늘은 여백으로 처리되었다. 그림의 오른쪽 근경에는 바위가 자리하고, 중심에는 강이 흐르고, 그 너머로 나무 풀숲이 있는 구성이다. 그림에 여운과 운치가 있으며 여백이 있어 시원하다.

 

위고가 그림에 여백을 남기는 것은 동양화의 예술적 표현과 유사하다. 여백은 중국화의 독특한 구조로, 동양의 허실사상에서 형성된 공간 개념으로서 서양화와 가장 쉽게 구별되는 조형적 특징이다. 서양의 그림에서 여백은 미완성의 개념이나 서양에서 인식하는 허공이 동양에서는 여백이 된다. 여백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무엇인 가를 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나타내려고 하는 동양의 마음이다.


양효주



위고가 바위를 표현한 묘사 기법을 보면 마치 실로 베를 짜는 듯한 가는 선묘를 특징으로 하는 동양화의 피마준법을 연상시킨다. 평소 중국의 도자기, 공예품, 가구 등을 수집하기로 유명한 위고가 중국화를 접하고 그것을 흉내내기 한 것일까? 17세기 말 이래로 청대 소주 지역에서 제작된 판화와 화첩들이 유럽으로 대거 수출되었던 역사적 정황으로 봤을 때 이는 가능한 일이다. 특히 청대 건륭제 때 황제의 명을 받은 화원 낭세녕이 중국화 16점을 파리로 가져가 200장의 동판화로 제작해온 사례는 보다 직접적이다.

 

16점의 중국화 중 한 장인 <진영 공격도(Gädän-Ola)>(1767-1774)를 보면 빼곡한 군상들 주위로 나무와 산 바위와 같은 중국의 자연풍경이 함께 묘사되어 있다. 낭세녕의 또 다른 작품으로 파리의 기메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목란도>(1745)에서도 중국 궁중회화에서 보이는 인물과 산수 표현의 양식적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양효주



  

당시 프랑스의 귀족들과 중국을 좋아하는 사람들(Sinophiles)은 중국 화원들이 완성된 동판화를 배에 싣고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동판화의 사본을 구하려고 애를 썼다. 이와 같은 성화에 따라 1783-85, 파리의 동판화가 Isidore-Stanislas Helman에 의해 중국 동판화의 원본 크기를 축소한 화첩 <Conquest>이 편찬되었고, 1791년 파리에서 또 하나의 소책자 <Précis historique de la guerre>가 편찬되었다. 책의 첫 번째 장(chapter)은 청나라의 주요 정복전쟁 사례들을 32장에 걸쳐 서술하고 있고 이어 두 번째 장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16점의 동판화에 대해 19장에 걸쳐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은 현재까지 두 권만 남았는데 한 권은 파리 루브르 뮤지엄(Musée de Louvre), 다른 한 권은 플로렌스 살바토레 페라가모 뮤지엄(Museo Salvatore Ferragamo)에 소장되어있다. 파리에서 오래 살았던 위고가 뮤지엄에서 이 동판화를 봤을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

 

아래 그림은 위고가 그린 연못가 풍경이다. 물과 잉크의 농담으로 다양한 먹색과 원근을 내었다. 왼쪽 그림을 보면 전경에 바람에 날리는 갈대가 빠른 붓질로 속도감 있게 그려져 있고 그것의 주변은 특정한 묘사 없이 중간톤으로 넓게 칠해져 있다. 오른쪽 상단은 여백의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오로지 그림의 주제만 강조하고 그 외의 주변부는 과감히 생략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른쪽 그림은 "정적인 화면에 윤곽선이 파괴되어 있고 수묵의 엷은 담채법이 능수능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마치 중국화를 연상시킨다."(플로리안 로다리 Florian Rodai)



양효주



위고의 작품 <Castle overlooking a river>(1847) 에는 어둡고 무거운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두 성이 서있다. 화면 왼쪽 하단부에 보이는 성은 실제의 대상을 그대로 모방한 듯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반면에 첫 번째 성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대각선을 그리며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번째 성은 형태가 불명확하고 묘사도 대폭 생략되어있다. 이 두 개의 성을 가르는 넓은 대지는 두텁게 목탄을 문질러 단순화시켰는데, 소실점을 비롯하여 일체의 시각정보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오로지 어둡고 무거운 밤공기 같은 우수로 화면을 채웠다. 작품 <Town beside a lake>(1850)에도 이와 유사한 표현방식을 볼 수 있다. 근경·중경·원경으로 시선이 옮겨가는 자리마다 바람, 노을, 안개와 같은 장치로 뿌옇게 처리하여 구체적인 시각정보를 감추고 화면에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양효주




이와 같이 위고가 수평 투시법으로 화면의 공간감을 내고, 감춤과 드러냄을 적절히 경영하여 교묘하게 화면을 구성하며, 긴장과 이완의 효과를 낸 표현법은 동양화의 표현법과 유사하다. 동양의 전통 산수화는 흔히 구름과 안개를 빌어서 가림과 드러남의 멋진 표현으로 삼았다. 교묘히 감춤으로써, 형상은 보이지 않으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정보나 경치를 연상하게 하여 숨겨진 이 드러나게 한다.

 

 

위고의 예술의 의의

 

위고의 예술은 격변하는 시대상황과 그의 드라마틱한 개인사가 맞물리며 매우 혼성(hybrid)적인 특징을 갖는다. 그의 예술관은 바로크 고전주의로코코민중적 영웅주의시누 와즈 리(Chinoiserie)의 취미가 모두 병존하는 혼합체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서양의 문화 이전(Cultural transfer)’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쓴 "화가 빅토르 위고(1): 화가 빅토르 위고 소개 및 동양취향(시느와즈리chinoiserie)"에서 살펴봤듯이 위고는 유럽 양식의 고유한 정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국적인 동양 미술의 요소들을 차용하여 화려고 독창적으로 집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중국의 유물들을 소장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수집한 중국의 도자기·옻칠된 가구·공예품에 그려져 있는 중국의 자연풍경, 중국 우화에 나오는 동식물, 도석 인물도를 모본으로 하여 직접 목판화를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는 데에서 소극적 의미의 동양 취미와는 다르다.

 

위고가 선보인 회화는 전통 동양화의 구도와 원리로 꼽는 여백을 중시한 화면 구성에 수평 원근법을 사용하고 중국의 먹으로 동양풍의 그림을 그림으로써 당시로서는 매우 실험적인 미술 양식을 구사하였다. 특히 그가 회화의 주 재료로 먹과 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동양화에서 수묵은 색을 초월한 무색의 의미로서 재료가 갖는 물성 자체에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동양의 정신과 미학이 있다고 본다. 특히 수묵은 빛과 가벼운 대기의 변화를 포착하기에도 매우 적절한 재료인데 위고 또한 명암(brightness)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한 잔의 물뿐이다라고 말하며 수묵의 농담과 종이에 번지는 효과를 이용하여 숙련된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위고가 의식적으로 동양풍이 농후한 그림을 그렸으나 그가 동양의 전통 사상, 동양미의 본질적 특질들을 갖추었다고 하기에는 사실 무리가 있다. 유럽인인 위고가 동양미술의 미감과 정신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회화를 동양화의 양식사와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오류의 소지가 높다. 다만, 그의 동양 취미와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동양미술 흉내내기는 탈식민사관에 입각한 동서양의 문화전이라는 데 의의가 있겠다.

 

이처럼 혼성적이고 광범위한 그의 예술 활동을 살펴보건대, 그는 예술의 위계보다도 상호 연관되는 방식을 더 중요시한 예술가였다고 사료된다. 상이한 예술은 상호 작용을 할 때 예술의 감각적 특질이 더 향상된다. 그래서 그는 글을 쓰면서 그림을 그렸고, 부르주아지가 추구한 격정적이고 화려한 감각적 유희와 더불어 도덕과 진실성을 추구하는 민중적 노력을 해왔으며, 비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신비로운 관념, 이국적인 동양 취미까지 어우러진 개성적이고 혼성적인 예술관을 표방하였다. 이는 매우 진보적인 예술 행보로, 당대의 위대한 문학예술비평가 보들레르의 말처럼 그는 19세기 최초의 현대인이자 혁신적인 예술가였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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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효주 (미술칼럼니스트키라의 박물관 여행 8: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