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근대 프랑스 문학을 상징하는 대문호로 생전에 작가로서의 영광을 충분히 누렸다. 우리에게도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 『레미제라블』을 쓴 작가로 친숙하다. 그러나 위고가 시와 소설을 쓰면서 무려 4천 점 가량이나 되는 예술작품을 남긴 예술가라는 사실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활동은 작가로서의 유명세에 가린 나머지 크게 조명 받지 못하였고, 스스로도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을 공공연히 노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 프랑스의 문학인이자 예술비평가인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구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 그리고 20세기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앙드레 마송(Andre Rene Masson)의 증언에 따르면 위고가 "문학인이자 동시에 화가"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판1 Ⓒ양효주
20세기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앙드레 브르통이 그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위고를 초현실주의자라고 쓰고, 1936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환상적인 미술, 다다, 초현실주의>라는 전시에서 위고의 작품이 처음 소개된 이래로, 서양의 미술사학자들은 위고의 예술 양식을 원시 초현실주의(proto-surrealism)로 상정하고 그의 예술과 20세기 초현실주의 예술과의 연결고리를 연구하는데 주력해오고 있다.

도판2 Ⓒ양효주
위고의 예술 활동은 1820년대부터 1880년까지 전 생애를 아우르나 대부분의 선행 연구자들은 1850-60년대를 그의 예술적 절정기로 보고 이 시기의 작품 연구에 집중한다. 이때 쏟아진 그림들 속에서 20세기 초현실주의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위고가 영불해협인 저지 섬과 건지 섬에서 정치적 망명생활(1851-70)을 하던 때로 꿈과 무의식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도판3 Ⓒ양효주
그러나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기존의 연구는 위고의 회화적 기량이 원숙해지기까지의 과정, 이를테면 그의 다양한 예술적 원천 및 회화의 기법과 재료에 대해 실험하고 탐구했던 망명 이전 시기의 예술 활동을 간과하고 있으며, 그의 회화 세계를 이해하는 비평적 준거를 오직 원시 초현실주의로 한정하고 있다는데 한계가 있다.
도판4 Ⓒ양효주
따라서 글쓴이는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위고의 회화세계를 이해하는데 ‘시누아즈리’*를 또 하나의 해석 방법으로 취하여 이를 심도 있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 일어난 동양 취미의 유행과 위고가 중국 미술품을 수집하고 중국 미술 양식에 대한 관심을 글로 남긴 것을 토대로 하여 보건대, 그의 작품과 동양 미술과의 연관성을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수 있다.
*쉬느와즈리(Chinoiserie)는 ‘중국에서 유입된 작은 오브제’ 혹은 ‘중국풍의 문양이나 형태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장식물’을 의미하는 미술 용어이다. 쉬느와즈리가 중국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쉬느와(Chinois)에서 파생되었지만 18세 기 말까지 프랑스에서 중국(chine, chinois)의 개념은 동아시아 전체를 포괄적으로 의미했기 때문에 쉬느와즈리에는 일본과 한국의 유물들도 포함된다.(신상철, 「미술시장과 새로운 취향의 형성관계: 18세기 로코코 미술에 나타난 쉬느와즈리 양식」, 2011)
도판5 Ⓒ양효주
"루이 16세 시대에 유럽인들은 그리스화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리엔탈리즘이다 – 도대체 동양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나도 잘 모르겠노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작년 여름 아주 이상하리만큼 나를 사로잡았는데 해가 지는 광경을 보러가던 길이었다." 위고가 『동방시집Orientales』(1829)에 쓴 글이다.
위고의 동양 취미는 그의 문학에서 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디자인하고 장식한 집의 실내장식에서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프랑스 파리는 위고가 생전에 가장 오랫동안 거주하였던 두 채의 집을 보존하여 《빅토르 위고 뮤지엄(Maison de Victor Hugo)》으로 운영하고 있다. 한 곳은 위고가 16년간(1832-48년) 거주하였던 파리의 아파트이고, 다른 한 곳은 그가 19년간(1851-1870) 정치적 망명생활을 보낸 영국해협의 건지(Guernsey) 섬에 위치한 오트빌 하우스(Hauteville House)이다.
파리의 아파트와 가구들은 위고가 가족을 이끌고 망명길에 오른 뒤 1852년에 모두 경매에 붙여졌으나 현대에 와서 건물의 소유권이 프랑스 정부에게 넘겨졌고, 정부는 위고의 사진들과 증인들의 진술 기록 및 그가 고용했던 청소부의 회고록을 참고하여 위고의 생가를 사실에 근접하게 복원하였다. 1903년 이래로는 《빅토르 위고 뮤지엄(Maisons de Victor Hugo, Musée de La Ville de Paris)》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시공간은 위고의 ‘망명 이전’, ‘망명’, ‘망명 이후’로 나뉘어 있고 위고가 직접 디자인한 실내 장식과 미술작품들을 볼 수 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위고의 응접실<살롱 시누아Salon Chinois>은 중국을 뜻하는 '시누아'라는 이름처럼 중국·일본에서 수입한 칠기 가구·공예품·도자기‧판화들이 즐비하다. 중국의 오브제와 고딕풍의 가구들이 함께 어우러져 혼성적이면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도판6 Ⓒ양효주
동양 취미를 적용한 실내장식은 망명길에 올라 새로운 둥지로 튼 건지 섬의 오트빌 하우스에서 보다 적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건지 섬이라는 지역적 특색과도 연관이 깊다. 건지 섬은 영국 동인도 회사와 중국(당시 청나라)의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780년대 이래로 중국에서 싣고 온 차·도자기·목면 등이 제일 먼저 당도하는 무역항이었다. 당시 중국 소주에서는 중국 고사 인물도를 그린 화보를 유럽으로 많이 수출하였고 병풍 형태의 옻칠 공예품 등도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에 대거 유입되었다. 이때 거래된 대부분의 병풍은 짙은 바탕 위에 중국 풍속과 풍경 그리고 화조 문양이 장식된 12폭의 형태를 띠었다. 또한 상인들과 함께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중국의 칠기 가구나 질 좋은 종이, 서적에 큰 관심을 가져 이를 중국에서 구매 후 배편을 통하여 본국에다 다시 팔았다.
도판7 Ⓒ양효주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위고가 건지 섬에 거주할 당시-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아편 전쟁을 계기로 유럽의 무역항은 더욱 크게 확장되었다. 1860년 10월 18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제2차 아편전쟁이 한창인 베이징 북쪽에 위치한 황실의 정원인 원명원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던 수많은 황실 유산을 약탈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위고는 크게 개탄하며 영국과 프랑스의 야만적인 처사를 강력히 비난하였다. 그는 이들이 약탈한 보물을 청나라에 다시 돌려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당시 프랑스 장교 버틀러(Butler)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도판8 Ⓒ양효주
“예술가와 시인들 그리고 철학자들은 원명원에 대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볼테르가 말하길 그리스에는 판테온이, 이집트에는 피라미드가, 로마에는 콜로세움이 있듯이 동방에는 원명원이 있다고 합니다. 두 강도가 원명원을 부수고 보물을 약탈하여 자기 주머니를 한 가득 채우고 그곳에 불을 지른 뒤 낄낄대며 떠났습니다. 한 강도의 이름은 영국이고 다른 이름은 프랑스입니다. (...) 바라건대 프랑스는 수치심을 느끼고 중국에서 약탈해온 모든 것을 다시 되돌려주길 원합니다.” (1861년 11월 25일, 빅토르 위고) |
위고는 평생 중국에 가보지 못했지만 동인도 회사와 예수회 선교사들이 들여온 중국의 문물들을 근거리에서 접하고, 중국 문화재를 소장한 박물관을 찾고, 파리 미술 시장에 동양의 미술을 유행시킨 미술상인들과 교류하며 중국 미술품을 수집하고 동양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키울 수 있었다.
도판9 Ⓒ양효주
도판10 Ⓒ양효주
도판11 Ⓒ양효주
위고의 소장품은 주로 청대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청화·오채 백자와, 용·불상 조형물, 옻칠된 중국 가구와 공예품이다. 흥미로운 것은 당대 유럽 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진 동양 취미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들여온 차를 마시며 수입한 중국의 문물들을 그들에게 익숙한 로코코풍과 결합시키고자 했던 것에 반하여 위고는 그가 수집한 도자기·가구·공예품에 그려져 있는 중국의 풍경·풍속·화조·도석 인물도를 모본으로 하여 ‘흉내내기’ 한 미술작품을 만들었다는 데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 도판 10의 왼쪽 이미지는 위고의 소장품으로, 청대 경덕진에서 만들어진 오채 도석 인물 항아리이다. 오른쪽 이미지는 위고가 목기에 칠기로 그린 것인데, 왼쪽 항아리에 그려진 인물화와 매우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도판 11 왼쪽의 도자기 역시 위고의 소장품으로, 청나라 때 만들어진 화병이다. 오른쪽의 이미지는 위고의 목판 체색화로 왼쪽 도자기에 그려진 인물, 풍경, 화조를 그대로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도판12 Ⓒ양효주
위고는 옻칠된 중국의 가구와 공예품을 해체하여 평면 패널을 만들기도 했다. 중국 고전 시문학에 등장하는 신선과 고사 인물도가 그려진 청나라 소주 채색판화 밑에 위고가 따라 그린 동자승이 보인다.
도판13 Ⓒ양효주
도판14 Ⓒ양효주
도판 13-14 왼쪽 이미지는 위고의 집 벽에 부착된 중국 목판화이고 오른쪽의 이미지는 위고가 만든 채색목판화이다. 꽃 열매 새의 모습이 상당히 유사하다.
도판15 Ⓒ양효주
도판16 Ⓒ양효주
도판 15의 오른쪽 상단의 용 조각상은 위고의 소장품이고, 하단의 좌우 이미지는 위고의 작품이다. 서양의 용과 동양의 용을 결합하여 해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위고는 중국 미술의 모티프를 목판화 제작에 뿐만이 아니라 드로잉에도 접목시켰다. 그는 중국 목판화의 고사 인물과 귀면을 그대로 따라서 나무 판에 새김 하였는데, 이후 그가 그린 드로잉을 보면 중국의 귀면과 상당히 유사한 모습이다.
글쓴이는 이곳을 직접 둘러보면서, 위고에게 동양이란 –낭만주의자들에게 그랬듯- 이국적인 분위기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환상의 세계일뿐만 아니라 흉내내고 싶은 이상 세계이자 서양의 미적 관습에 대항하는 자유 그 자체이며, 특별히 중국 미술에 대한 그의 지식과 호기심은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는 서양의 오랜 식민주의 사관에 반하여 타자인 동양의 미술이 역으로 유럽의 미술에 영감(inspiration)을 제공하는 주체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새롭다.
이어서 다음 편에는 위고의 회화세계에 대해 살펴보겠다.
[참고문헌]
양효주(2017), 「빅토르 위고의 수묵화(Ink-wash drawing)와 시누아즈리」, 『동양미술사학회-춘계학술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