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카메라 열전
-부서진 카메라 고고학-
|
HIGHLIGHT 물론 예전 같은 영광의 시대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의미 있는 규모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이어진다면 필름과 낡은 카메라 또한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일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꿈꿔 본다. |
부서진 카메라 고고학
스웨덴 남쪽 항구도시 말뫼(Malmö)는 과거 조선업의 중심지로 국가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으나, 산업의 주도권이 아시아로 넘어가며 쇠락해 버린 도시다. [^1] 그곳 골목길 한편에 50년 넘은 오래된 카메라 수리점이 있었다. 수리점 주인 크리스터 안데르손(Christer Anderson)은 열다섯 살에 도제 생활을 시작해 반세기 넘게 셀 수 없는 카메라를 고친 장인이었다.
그러나 이토록 유서 깊은 수리점도 밀려오는 시대의 파도를 넘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낡은 필름 카메라를 고치겠다고, 가족이 썼던 오래된 카메라를 되살려 보겠다고 오는 손님도 줄었고, 최신형 디지털카메라는 만만히 손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디지털카메라 또한 스마트폰에 밀려 위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안데르손의 수리점 또한 말뫼가 맞이했던 운명처럼 문을 닫게 되었다.
스웨덴 작가 닐스 베리옌달(Nils Bergendal)은 안데르손의 수리점에서 처분을 기다리던 고물 카메라 더미에 눈길이 갔다. 장인이 은퇴하고, 가게가 문을 닫으면 고장 난 카메라들은 고철로 폐기 처분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베리옌달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그저 고철처럼 보이는 잔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거대한 카메라 더미를 집으로 들고 온 그는,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2], (카메라) 고고학 조사를 시행했다.

카메라 산업의 역사
"고장 난 카메라 백과사전(A cyclopedia of broken cameras)"이라는 부제가 붙은 『After Exposure』(Nils Bergendal, morän, 2021)는 킥스타터 펀딩을 거쳐 정식 출간한 책이다. 작가는 고고학 조사의 결과물을 200쪽짜리 책으로 엮었다.
베리옌달은 잔해 더미에서 한 점, 한 점 꺼내 올린 카메라에 자기 이야기를 찾아주었다. 정성스레 고장 난 카메라의 초상사진을 찍고, 제조사의 역사와 모델에 얽힌 뒷이야기를 꼼꼼하게 조사했다. (삼성 AF Zoom 1050 모델을 소개하면서 1938년 대구에서 국수와 건어물 장사로 출발한 삼성의 역사를 설명하는 식이다) 카메라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생산된 모델이고, 특징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또 시장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했었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했다.
덕분에 62점의 카메라 사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지난 70여 년 동안 카메라 산업계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알 수 있다. 목차 첫머리를 장식한 아그파(Agfa)와 라이카(Leica), 포익틀랜더(Voigtländer)부터 시작해 무섭게 성장한 펜탁스(Pentax)와 캐논(Canon), 니콘(Nikon) 같은 일본 제조사들, 파산 위기에서 극적으로 부활한 핫셀블라드(Hasselblad)와 어느샌가 세계 최대 규모의 카메라 회사가 된 소니(Sony)까지 수많은 변화를 거쳐온 산업의 역사가 세월을 따라 펼쳐졌다.
작가의 조사 기록과 나란히 함께 남겨 둔 장인의 한마디는 각각의 카메라가 지녔던 내밀한 특징은 무엇이었는지 훔쳐보는 재미도 준다. 문제가 생기면 고치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는 몇몇 모델부터 일부러 험하게 다루지 않는 한 고장 날 위험이 없었다는 니콘 카메라들까지 수십 년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기계에 대한 통찰이 몇 줄의 코멘트에 녹아있다. 그뿐만 아니라 긴 세월 수리점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까지도 살짝 엿보게 해 준다.[^3]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개인적으로 꼽는 명작인 일본 만화 <카우보이 비밥>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는 오래된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모험을 다룬다. 주인공 스파이크와 제트는 우주 방방곡곡을 뒤져 비디오테이프 플레이어를 찾으려 하지만 2071년, 지구를 떠나 태양계를 떠도는 인류에게 그 기계는 박물관 유물보다도 구하기 어려운 신세다.
두 주인공은 어렵게 VHS 플레이어를 찾았지만, 당연히 이들의 모험이 쉬울 리 없으니, 테이프의 재생 방식이 VHS가 아닌 베타[^4]라서 내용을 확인하는 데 실패한다. (다행히 에피소드 마지막에는 결국 또 다른 플레이어를 구해 테이프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짧게는 2~30년에서 길게는 5~60년을 훌쩍 넘겨 버린 낡은 필름 카메라 또한 언젠가는 비디오테이프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될지 모른다. 오래된 카메라를 쓰는 사람도, 또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사람도 모두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박물관 한편에서 백 년 전의 기계 유물(혹은 20세기 공학의 산물 정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유리 진열장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 같다.[^5]

스며든 기억
바디에는 곰팡이가 피었고, 스킨에는 갈색 손때의 흔적이 남았다. 고리에 달려 있던 가죽 스트랩은 끊어졌고, 금속 셔터 날에는 녹이 슬었다. 미러는 깨져 버려서 더 이상 세상을 보여주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며 부서진 카메라 안에서 튀어나오는 부품도 바뀌었다. 전자회로 기판이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고, 색색깔의 전선이 복잡하게 이어진다. 작은 자동초점 P&S 카메라는 바디 전체가 기판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카메라 중에 살아 있는 건 하나도 없다. 장인의 수리점이 문을 닫으며 예비 부품으로 쓰일 기회조차 사라져 버려, 실처럼 가늘게 남아있던 숨마저 끊어진 채 폐기 처분이라는 최후를 맞았다. 그래서 베리옌달이 남긴 카메라의 초상은 그들의 영정사진이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상상의 나래를 편다. 어디에 부딪쳤는지 험하게 찌그러진 카메라를 보며, 혹시 사진가와 함께 세상을 떠돌며 인간의 슬픔을 바라본 건 아니었을까? 흙먼지 가득한 전쟁터의 포연이 기계에 배어있는 것만 같다. 페이지를 넘겨 비록 폐기물 신세가 됐지만 여전히 영롱한 빛을 반사하는 렌즈를 마주한다. 이 렌즈를 거쳐 세상에 남게 됐을 아름다운 순간을 그려 본다. 혹시 연인과 함께 류블랴나의 언덕에서 바라봤던 빛 내림을 담지는 않았을까?
렌즈가 떨어져 나간 카메라 중앙의 검은 심연이 블랙홀처럼 시선을 빨아들인다.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자리에 남은 건 어둠뿐이지만, 그 어둠을 밝혔을 셀 수 없는 찰나를 멋대로 상상한다. 고장 난 카메라에 스며있던 시간의 기억이 조금씩 흘러나와 내게로 오는 듯하다.

생의 마지막 커튼콜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커리어 마지막 무대를 열정적으로 끝마친 노배우가 다시 한번 무대로 올라가고 있다.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관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키스를 보내며, 작은 극장이 터질 듯한 커튼콜로 노배우의 마지막을 배웅한다.
책 속 카메라의 초상은 화려했던 생애를 마무리하고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하기 전, 마지막으로 올라선 커튼콜 무대다. 자신이 맡았던 가장 중요한 역할, '노광'을 충실하게 '끝마친'(After Exposure) 기계에게 남은 건 고철이 되는 것뿐이다.
잠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한때 쇠락한 도시로 불렸던 스웨덴 말뫼는 더 이상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다. 다양한 개발 프로젝트를 통해 적극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산업을 육성하고, 다수의 기업과 학교를 유치한 말뫼는 이제 지속가능한 도시 모델의 상징으로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6]
어쩌면 말뫼처럼 낡은 카메라 또한 시대를 넘어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게 될 수 있을까? 몇 해 전부터 불어온 레트로 열풍은 새로운 필름 카메라 매니아를 불러 모았고, 코닥은 파산했지만, 소규모 생산자들이 독특한 필름을 출시하며 시장을 이어가고 있다. 나도 몇 년째 미뤄두었던 자가 현상을 얼마 전에 다시 시작했다.
물론 예전 같은 영광의 시대가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의미 있는 규모의 생산과 소비 활동이 이어진다면 필름과 낡은 카메라 또한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일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꿈꿔 본다.
---
[^1]: 조선소를 상징하던 초대형 크레인이 단돈 1달러에 팔려 갔을 때 노동자들이 흘린 눈물은 '말뫼의 눈물'로 알려지기도 했다.
[^2]: 킥스타터 펀딩 페이지: https://www.kickstarter.com/projects/trip35/after-exposure-a-cyclopedia-of-broken-cameras
[^3]: 물에 빠진 자이스 이콘(Zeiss Ikon) 카메라가 수리 불가라는 증명서를 발급받은 한 손님은 보험사로부터 새 카메라로 보상받은 뒤, 안데르손에게 위스키 한 병을 선물했다. 반대로 어떤 때는 보험금을 신청하려고 일부러 망가트린 것이 분명한 카메라를 들고 온 손님도 있었다.
[^4]: 소니에서 만들었던 베타 방식은 VHS보다 품질이 뛰어났지만, VHS의 가격과 물량 공세에 밀려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5]: 다만 최근 읽은 SF 소설에서 떠오른 미래를 대입해 보면, 장인의 카메라 수리 지식을 주입받은 휴머노이드가 어떠한 카메라든 고쳐주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이 상상의 현실 가능성은 과연 그만한 수익성이 있느냐의 문제겠다.
[^6]: https://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64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2/artlectu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