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컬렉션
고흐 <귀를 자른 자화상> - 가장 유명한 자화상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바> - 생애 마지막 걸작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 현대미술의 시작
파란색과 갈색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오면, 벽면을 따라 세실리 브라운의 작품이 펼쳐진다. 앞쪽 갤러리로 들어서면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 식사> 습작이 눈에 띈다. 1863년 파리 살롱에서 거부당해 큰 스캔들을 일으켰던 그 유명한 작품의 대형 습작본이다. 원작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고, 이 습작은 마네가 1년 넘게 걸쳐 대형 캔버스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옆으로 외젠 부댕과 카미유 피사로의 부드러운 풍경화, 드가의 발레리나 조각품들이 전시장을 우아하고 고요하게 만든다.
Cecily Brown (born 1969), Unmoored From Her Reflection, 2021, The Courtauld, London | Photo: Ayla J Lim, 2024
Gallery view,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Photo © Ayla J Lim, 2024
안쪽으로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면, 고갱, 고흐, 세잔, 모네,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한 거장들의 작품이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의 눈을 반짝이게 하는 작품들 중 몇 작품을 살펴본다.
코톨드 갤러리 입구에서부터 보이는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은 단연 세계에서 유명한 자화상 중 하나일 것이다. 1889년 1월, 고흐가 병원에서 퇴원한 일주일 후에 그린 작품이다. 실제로 그는 왼쪽 귀를 자르고 붕대를 감았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려 오른쪽 귀가 붕대에 감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1888년 12월 23일 고갱과의 격렬한 논쟁 후 정신적 혼란 상태에서 벌어진 유명한 사건의 흔적을 화폭에 고스란히 담았다. 뒷편에 보이는 일본풍 우키요에가 인상적이다. 그의 표정은 차분함을 되찾았으나 어쩐지 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Vincent van Gogh(1853-1890), 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 The Courtauld, London | Photo: Ayla J Lim, 2024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는 1882년 작가 생애 마지막 해에 완성된 걸작이다. 실제 폴리 베르제르에서 일했던 수종이라는 바텐더를 모델로 한 이 작품의 가장 큰 수수께끼는 바텐더 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앞모습과 다르다는 점이다. 마네는 일반적인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했고, 반사상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켰다. 19세기 파리 밤 문화의 현실과 현대인의 소외감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미술의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림 속 어딘가 우울감에 빠진 듯한 바텐더의 지친 표정은 묘하게 현대적이면서 묘하게 매력적이다.
Edouard Manet(1832-1883), A Bar at the Folies-Bergère, 1882, The Courtauld, London | Photo: Ayla J Lim, 2024
사실 코톨드 갤러리는 세잔의 걸작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점은 참 귀한 일이다. 세잔이 평생 60여 점을 그리고 또 그린 ‘생트 빅투아르 산’ 연작 중 하나인<생트 빅투아르 산과 큰 소나무>가 이곳에 있다. 프로방스 지방의 산을 반복해서 그렸던 세잔은 산의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며 자연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화면 전경에 위치한 소나무와 풍경 뒤로 보이는 옅은 핑크와 블루의 산 사이로 공기가 숨을 쉰다.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은 총 5점으로 구성된 연작 중 한 점이다. 프로방스 농부들이 묵묵히 카드놀이에 집중하는 모습을 담은 이 작품에서 세잔은 인물들을 길게 늘이며, 마치 정물처럼 견고하게 구축했다. 불필요한 서사는 제거하고 형태와 색채의 본질만을 남기고자 했던 세잔의 평생에 걸친 묵묵하고 끈질긴 연구는 결국 미술사의 흐름을 혁신적으로 바꾸며, 피카소와 입체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Paul Ceznne(1839-1906), The Card Players, 1892-1896, The Courtauld, London | Photo: Ayla J Lim, 2024
2. 20세기 모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실험
로저 프라이, 바네사 벨, 던컨 그랜트, 영국식 모더니즘의 탄생
메인 전시장을 나서면, 블룸즈버리 그룹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20세기 초 런던 블룸즈버리 지역 고든 스퀘어 46번지에 모였던 이들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다니는 남성들과 킹스 칼리지 런던을 다니던 여성들로 구성된 진보적인 지식인 집단이었다.
Bloomsbury Group gallery signage, The Courtauld, London Photo © Ayla J Lim, 2024
Left to right: Lady Ottoline Morrell, Maria Nys (neither members of Bloomsbury), Lytton Strachey, Duncan Grant, and Vanessa Bell, Source: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우리가 잘 아는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 로저 프라이, 바네사 벨, 던컨 그랜트 등이 이 모임에 있었다. 로저 프라이는 그룹의 중심 인물로 미술 비평가이자 화가였고, 바네사 벨은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로 화가였으며, 던컨 그랜트는 바네사 벨과 평생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던 화가였다. 이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제약에 반대하며 영국 최초로 순수 추상 회화를 시도했고, 1910년과 1912년 포스트 인상파 전시회를 기획해 영국에 모던 아트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블룸즈버리 그룹 갤러리는 짙은 주황빛 벽면으로 칠해져 있는데 그림들과 위화감 없이 고급스럽게 어우러진다. 벽면에는 로저 프라이의 <니나 햄넷의 초상>(1917)이 걸려 있다. 프라이는 ‘몽파르나스의 여왕’이라 불렸던 자유분방한 예술가 니나 햄넷의 당당한 개선을 단순하고 모던한 감각으로 그려냈다. 그 옆에는 던컨 그랜트의 <정물 -저녁식탁>(1912년경)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식탁 위의 정물을 입체파 방식으로 재구성 했다. 1912년은 블룸즈버리 그룹이 제 2차 포스트 인상파 전시회를 준비하던 시기로, 피카소와 브라크의 영향이 그들의 작품에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Left: Roger Eliot Fry (1866-1934), Portrait of Nina Hamnett, 1917 Right: Duncan Grant (1885-1978), Still Life - The Dinner Table, c.1912 The Courtauld, London | Photo © Ayla J Lim, 2024
Roger Eliot Fry (1866-1934), Self-Portrait, 1928, Oil on canvas, The Courtauld, London
Chair with floral seatback, Seatback design attributed to Roger Fry (1866-1934) for the Omega Workshops Ltd, embroidered by Winifred Gill (1891-1981) or Vanessa Bell (1879-1961), 1913, Wool, leather and wood, The Courtauld, London. © The Courtauld
Photo © Ayla J Lim, 2024
로저프라이가 페도라 모자를 쓰고 정장을 입은 모습을 그린 1928년 자화상은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던 그의 품위를 담고 있다. 그 앞의 의자는 바네사 벨과 던컨 그랜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이국적인 꽃과 식물의 모티프가 수놓아져 있다.
바네사 벨의 <대화>(1913-16)은 창가에 있는 세 명의 여성이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대화를 하는 인물들의 배치와 풍경이 신선하다. 마치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는 것도 같고, 사회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을 본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고 한다. “당신은 정말 탁월한 화가에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 당신은 그 이상이에요. 풍자가이자, 인간 삶에 대한 인상을 전달하는 사람, 재치 있는 단편 소설가죠.” 이 작품에는 바네사 벨이 직접 그린 오리지널 액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Vanessa Bell (1879 - 1961), A Conversation, 1913-16 © Estate of Vanessa Bell. All rights reserved, DACS 2023, Photo © Ayla J Lim, 2024
블룸즈버리 그룹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들은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특한 영국적 감수성을 담아내고 있다.
3. 중세- 르네상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우골리노 디 네리오의 금박 십자가
보티첼리, 영국 유일의 종교화
크라나흐의 아담과 이브
블룸즈버리 그룹의 현대적인 작품들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면, 갤러리의 분위기는 또 달라진다. 코톨드 갤러리는 인상파 컬렉션으로 유명하지만,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기의 종교 회화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Gallery view,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Photo © Ayla J Lim, 2024
우골리노 디 네리오의 《기증자들과 함께 있는 십자가상》은 1320년경 작품으로 시에나 화파의 걸작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아래에서 무릎 꿇고 있는 기증자들의 모습이 경건하게 표현되어 있다. 금박 배경이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몸은 가늘고 우아하게 표현되어 있다. 14세기 초 이탈리아의 종교적 열정과 예술적 세련미가 한 화면에 담겨 있는 시에나 화파의 대표작이다.
Ugolino di Nerio(act. 1317-1327), The Crucifixion with Donors, 1317-27,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Photo © Ayla J Lim, 2024
보티첼리의 <삼위일체와 성인들>(1491-93)은 영국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보티첼리의 종교화다. 이 작품은 원래 피렌체의 회개한 창녀들을 위한 수녀원(Convent of the Convertite)을 위해 제작되었다. 화면 중앙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하느님이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 내려오는 삼위일체가 묘사되어 있다. 주변의 성인들은 경건한 표정으로 신성한 장면을 바라본다. 보티첼리 특유의 섬세한 선과 우아한 인물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루카스 크라나흐의 《아담과 이브》(1526)는 크라나흐와 그의 공방이 제작한 50여 점 이상의 아담과 이브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버전 중 하나다. 탐스러운 붉은 사과와 다양한 동물들의 정교한 묘사, 쑥스러워하는 아담과 당당한 이브의 대조적인 표현이 인상적이다. 사과나무 가운데 상단에서 구불거리며 내려오는 뱀은 화면을 가르며 유혹과 타락의 순간을 암시한다. 뒷편 틸블루의 하늘은 짙푸른 녹색과 올리브색, 붉은 빛의 사과와 우아하게 어우러진다.
Lucas Cranach the Elder(1472-1553), Adam and Eve, 1526, The Courtauld Gallery, London Photo © Ayla J Lim, 2024
코톨드 갤러리는 이처럼 작지만 각 시대의 대표작들을 엄선해 소장한 보석 같은 공간이다. 인상파의 화려함부터 중세의 경건함까지, 시대를 아우르는 예술의 흐름을 요점 정리하듯 정수만 뽑아 두었다. 작은 몸집으로 예술계 구석구석을 호흡하는 코톨드 갤러리. 묘하게 영국다운 클래식함과 우아한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