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선혜영
화면 위에서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는 인물들이 , 마치 바다 밑에 잠긴 오래된 풍경처럼 웅얼거린다. 색과 형상은 완전히 응결되지 않았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스러지고 , 사라진 자리 위로 다시 피어오른다 .
마자 루즈닉의 회화는 기억을 하나의 고정된 사물처럼 다루지 않는다 .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침식되고, 지워지고, 다시 떠오르는 흐름 속에 존재한다 . 화면을 스치는 붓질은 잃어버린 과거를 붙잡으려는 손짓이자 , 동시에 그것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감각을 품고 있다.

Ukazanje II, 2019, oil on canvas, 177.8 × 152.4 cm
2019년작 Ukazanje II 에서는 이러한 감각이 수면 아래로부터 서서히 드러난다 .
저 깊은 곳에서 서로를 부르는 듯한 존재는 명확한 경계도 , 뚜렷한 표정도 없다 .
그들은 과거의 기억인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예감인지 알 수 없이 흐릿하다 .
이 회화는 관객을 심연으로 이끄는 복원의 여정을 열어 놓는다 .
침식된 기억의 파편들 사이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선명히 자신의 상처를 더듬게 된다.
개인적과 집단적 사이 , 기억의 층위
루즈닉은 보스니아 전쟁의 유년기 기억과 이주자의 정체성을 드려내지만, 그것이 단지 개인의 이야기로 머무르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회화가 '시간' 자체에 대한 사유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림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흐름이 아니라 , 기억과 감정, 무의식이 겹쳐진 다층적인 공간이다 . 과거는 현재를 잠식하고 , 현재는 과거를 다시 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누구의 기억인가?", "기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 "망각은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라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루즈닉의 인물들은 단지 개인적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기억을 끌어들인다. 구체적 형상보다는 색과 감정의 레이어를 통해 , 기억이 어떻게 비물질적인 감각으로 각인되는지를 보여준다 . 기억은 고정된 기록이 아니라, 감각적 흔적이며,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정동의 층위다.
Deep Calls to Deep, 2023. Oil on canvas, 254 × 381 cm
밝은 색조를 사용하 는 2023년작 Deep Calls to Deep 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캔버스 위를 따스하면서 고독하게 감돈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기이한 불안을 품고 있다 . 관객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인물 , 이상하게 분할된 색체의 하늘, 흐릿하게 녹아든 배경 속 그림자는 유년기의 이미지와 감정이 뒤섞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한 장면의 멈춘 프레임 속에 수많은 시간의 층위가 스며들어 있다.
루즈닉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얼굴을 갖고 있지만 , 그것은 구체적인 개별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얼굴의 윤곽을 번지게 하고, 표정을 흐릿하게 만들어 개인의 경계를 지운다. 이로써 인물들은 하나의 집단적 무의식, 공동의 기억 속 존재로 변모한다. 관객은 각자의 경험과 감정으로 그 빈 곳을 메워야 한다. 루즈닉은 기억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을 살아내는 방식을 제시한다.
루즈닉의 회화에서 '기억' 은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시간의 감정적 잔류물이다 . 그녀의 작업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무너지고, 감정과 이미지가 뒤엉킨다. 회화는 직선적 시간의 재현이 아니라 , 감각의 몽타주이며 감정의 충돌이다.
루즈닉은 말한다. “나는 내 기억을 사실처럼 재현하지 않는다 . 나는 그것이 내 안에 남긴 감정의 흔적을 그릴 뿐이다.” 이 말은 그녀의 작업 전반을 이해하는 열쇠 일수도 있다. 루즈닉에게 기억은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 속을 떠도는 감정의 색 채이며, 과거의 환영이 현재를 물들이는 방식이다.
이러한 기억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집단적 경험과 연결된다. 그녀의 회화에는 가 족의 얼굴, 여성의 몸, 유령처럼 겹쳐진 존재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전쟁과 망명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몸이 기억한 상처, 공동체가 끊어진 자리에 남은 감정, 그리고 이름 없이 사라진 존재들을 호출한다. 루즈닉은 감정과 기억을 하나의 개인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사회적 층위 속에 놓으며 , 가장 주관적인 것이 시간과 사 건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루즈닉은 회화를 통해 시간의 층위를 병치시키며, 잊혀져 버린 것들과의 조우를 가능하게 한다. 기억은 고정되지 않고, 이미지도 안정적이지 않다. 회화는 잃어버린 시간의 흔적을 구성하는 유 령 같은 매체가 된다.
회화의 호흡, 부유하고 스며드는 시간
루즈닉의 회화에서 색 채는 단순한 표면이 아니다. 색은 기억의 물성과 운동성을 대신한다. 블루, 브라운 같은 색조들은 서로를 침투하고, 스며들고, 때로는 경계를 허물면서 화면 위를 부유한다. 형태를 흐트리고 다시 형성하는 이 과정은 마치 기억 속 이미지들이 명료함과 흐릿함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양상을 닮아 있다. 루즈닉의 캔버스는 종종 바랜 필름처럼 희미하고, 색 자체가 기억을 흡수하고 토해내는 현상처럼 움직인다. 그녀의 회화 속 색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함께 호흡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적 매개 이다.
Truth Seekers, 2019, oil on canvas, 177.8 × 152.4 cm
2019년작 Truth Seekers 에서도 그러한 회화적 호흡을 느낄 수 있다. 구체적 형태를 잃어버린 인물들은 서로를 향해 기울지만, 그 움직임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몸짓은 기억 속을 부유하는 이름 없는 존재들처럼 보인다.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들은 마즈 루즈닉이 풀어놓은 개인의 역사와 기억의 이야기들이 회화의 호흡 속에 감각의 파편으로 남아, 각자의 이야기로 전위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한다.
루즈닉이 다루는 색은 정지된 이미지 보다는 그것은 끊임없이 침잠하고 솟구치며, 흐르고, 다시 사라지는 움직임이다. 그녀의 붓질은 시간의 호흡을, 감정의 진동을, 그리고 잊혀져 가는 것들의 마지막 흔적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화면 위에서 색들은 단단히 고정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흔들리며 흩어진다. 이는 고정된 의미를 제공하는 대신, 관객 스스로 그 흔들림 속에서 감정의 편린들을 건져 올리게 만든다.
루즈닉의 회화는 정지된 사 건이나 고정된 기억의 재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억과 감정, 시간이 부유하고 스며드는 거대한 호흡이며, 사라진 것들과 아직 이름 붙 일 수 없는 감정들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녀는 색과 형태를 통해 잊히는 것들과 아직 기억되지 않은 것들 사이의 모 호함들을 캔버스 위에 새긴다. 루즈닉의 회화 는 그 렇게, 과거의 파편이 되어 흐르고,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다.
침잠과 피어오름의 경계에서
루즈닉은 자신의 응 축된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가 동시에 진실일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한다: 탄생, 폭력, 고통, 고뇌, 기쁨, 공감 등. 2023년작 The Past Awaiting the Future/Arrival of Drummers 에서 그녀는 이러한 복 합적인 시간적 경험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융합시킨다.
The Past Awaiting the Future/Arrival of Drummers, 2023. ,oil on canvas, 252.73 × 384.81 cm
작품 속 인물들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서, 그 존재 자체로 모든 감정이 교차하는 지점을 형성한다. 인물들의 발이 암시하는 움직임은 각기 다른 감정과 상태를 중첩시켜, 시간의 흐름을 직선적으로 이어지지 않게 만든다 . 그 시간들은 겹치고 스며들며 흐려지며, 과거와 미래는 구분되지 않는다 . 관객은 화면을 천천히 거닐며 다양한 시간의 조각들이 하나로 통 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과 그로부터 생성되는 상징적 이미지는 루즈닉이 시간과 기억 , 감정의 복잡한 얽힘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풀어내는지 보여준다.
루즈닉은 회화를 통해 잊혀진 것들, 말해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애도를 수행한다. 그녀의 작업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 기억의 순간들을 지층처럼 축적하는 회화적 시도이다. 기억은 그녀에게 하나의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라 , 끊임없이 사라지고 새로 움트는 여정이다. 루즈닉의 회화는 침과 피어오름이 동시에 일어나는 장이다. 지워지듯 사라지고 응축되는 동안 무 언가는 또렷이 떠오른다. 망각은 파 괴가 아니라 변형이고, 상실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관객은 루즈닉의 그림 앞에 멈춰 서며 묻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얼굴은 누구였던가?" 그러나 대 답은 없다. 오직 부유하는 색들 , 스러진 몸짓들, 희미한 속삭임들만이 있을 뿐이다 .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기억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목소리들과,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과, 이름 붙 일 수 없는 상실들과 마주하게 된다.
루즈닉의 회화는 기억을 복원하려는 의도에 앞서, 기억의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조용하고도 완강한 용기이다. 그녀의 붓질은 하나의 긴 여정이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풍경들, 서로 스며들며 희미해지는 얼굴들, 언젠가 잊혀질 자신의 기억들을 마지막으로 껴안으며 걷는 길. 그리고 그 끝에서 우리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기억들의 웅성거림을 조용히 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