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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서 천천히 걸어야 하는 이유 | ARTLECTURE

전시장에서 천천히 걸어야 하는 이유

-하얀 방이 되기까지-

/Insight/
by 학연
전시장에서 천천히 걸어야 하는 이유
-하얀 방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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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공간은 이제 관람되기보다 읽히는 대상이 되었다. 전시 공간은 여전히 하얀 입방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작품은 그것이 위치한 모든 맥락들을 인식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예술은 이 구조를 항상 시험해왔고, 작품은 벽에 걸리면서도 떨어져 나가거나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미술관에 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낮추고 걷는 속도를 줄인다. 누가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작품을 얼마나 오래 바라봐야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잘 모르는 작품 앞에서는 어색하게 자리를 옮기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아주 흔하다. 많은 사람이 미술관에서 긴장하거나 스스로를 점검하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 이유는 그 공간에 있다. 전시장 공간은 예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기준을 제시한다. 예술 비평가 브라이언 오도허티(Brian O’Doherty)의 책 하얀 입방체 안에서(Inside the White Cube)에서 이 하얀 공간이 만들어진 연유와 역사를 살펴보자.

 


 


오도허티는 흰 벽으로 사방이 막힌 전시 공간을 화이트 큐브라고 부르며 현대의 교회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고요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게 되는 침묵 또는 낮은 음성의 대화, 절제된 몸짓, 느린 발걸음은 종교적 예식과도 같은 인상을 준다. 이곳에서 관람자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다른 이들의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인다. 결국 이 공간에서 부피를 차지하고 있는 관람자의 신체는 여기 있지 않으면서 여기 있는 투명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전시 공간은 언제부터, 왜 이렇게 변했을까?

 



 

이전의 회화는 액자를 반드시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그림 속 세계의 편집(framing) 된 일부를 보며 그림에 미처 담기지 못한 세계를 제각기 상상한다. 벽에 걸린 회화는 창문과 같이 기능했던 것이다. 풍경화를 예로 들자면, 철저한 원근법 아래 그려진 풍경은 바깥으로 계속해서 뻗어나간다. 그렇게 이곳과 다른 세계를 일부 편집하여 이 공간 안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회화는 우리가 있는 지금 이곳과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림에게 액자는 더 이상 필요치 않아졌고 그렇게 그림과 벽 사이의 관계가 달라진다. 아울러 회화 평면은 고도로 정제되고, 정제되었기에 민감해진 작품들은 전시장 안에서 서로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각자가 충분한 공간을 차지해야 했다. 이에 최적의 공간이었던 화이트 큐브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된다. 흰 벽, 말끔하게 마감된 바닥, 작품을 향하는 조명, 창문이 없는 구조. 외부 세계와는 별개가 된 듯한 전시장 내부의 시간이 따로 흐른다. 작품의 감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을 배제하여 가장 단순한 공간에 도달했다.

 

 

이 구조에 반응한 예술가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외부의 맥락과는 동떨어진 중립적이고 깨끗한 공간을 지향하는 화이트 큐브가 어떠한 새로운 권력 구조를 만들어냄을 발견했다. 오도허티는 이에 대해 화이트 큐브가 지녔다고 보는 명확한 중립성은 환상이며, 대신에 보편적 사상과 가정을 담는 집단을 상징한다고 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과 벽 간의 긴장 관계를 드러내는 회화를 탄생시켰다.

 

윌리엄 아나스타시(William Anastasi)의 작품 « West Wall » 은 갤러리의 한쪽 벽을 촬영하여 그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실크스크린 인쇄한 다음 해당 벽에 설치한 것이다. 최대한으로 단순화한 듯한 공간과 벽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요소들, 그리고 이 벽 자체의 기능을 들여다보도록 했다.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는 집 안에 있는 여러 개의 방을 연결하여 « Merzbau »라는 설치 작업을 만들었다. 이것은 감상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구조였다. 관람자는 그 안에 들어가 방향을 잃고 벽과 천장, 바닥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에서 공간 전체를 안과 밖이 뒤집힌 하나의 조각처럼 경험하게 된다. 이는 흰 벽 앞에 선 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전통적인 감상 방식과는 전혀 다른 체험이다.

 

이외에도 많은 설치, 퍼포먼스, 개념 미술 작품들은 작품이 전시되는 방식 자체를 질문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작업들은 공간의 중립성을 믿지 않았다. 공간은 언제나 특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고, 예술가들은 그 질서를 드러내거나 교란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다시 공간을 상상하기

 

공간은 이제 관람되기보다 읽히는 대상이 되었다. 전시 공간은 여전히 하얀 입방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작품은 그것이 위치한 모든 맥락들을 인식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예술은 이 구조를 항상 시험해왔고, 작품은 벽에 걸리면서도 떨어져 나가거나 외부 공간으로 확장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도래와 함께갤러리 공간은 더 이상 중성적인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갤러리 벽은 미학적상업적 가치들이 삼투현상을 통해 교환되는 얇은 막이 되었다이 하얀 미술관의 벽면에서 전율하는 분자들의 움직임은 감지할 수 있게 되었고따라서 관계의 역전이 좀 더 진행되었다갤러리의 벽은 미술작품에 동화되고 미술작품은 해방되었다미술은 벽 없이 어디까지 가능할까이 질문이 갤러리의 신화화 정도를 결정하게 된다갤러리의 흰 벽이 어느 정도나 작품의 제거된 내용을 대치할 수 있을까맥락은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작품 내용의 많은 부분을 제공해 준다전시공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아주 주요한 논쟁점으로 70년대 미술의 단점과 함께 장점이 되었다.

하얀 입방체 안에서(Inside the White Cube)』 95


참고문헌

브라이언 오도허티, 하얀 입방체 안에서(Inside the White Cube), 김형숙 옮김, 시공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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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학연_예술과 사람과 세상에 진심을 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