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이 변했다’, (2024) 캔버스에 혼합매체, 155x120cm, ⓒ최희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를 겪고 있지만, 그 변화의 속도나 방향을 쉽게 체감하기 어렵다. 우리 삶에 있어서 ‘변화’라는 것은 급작스게 벌어지는 어떠한 일이나 시점에 가까울 것이다. 크게는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이나 우리가 일상을 보내는 집, 핸드폰과 같은 것들은 언제나 옆에 있을 것 같다가도,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갑작스레 내 옆에서 사라지고는 한다. 내게서 아주 멀리 있을 것이라고 느껴졌던 복권과 같은 커다란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작게는 어제보다 길어진 손톱이나 머리카락을 잘라내거나 냉장고에 보관하던 생수가 다 떨어져 새로 구입해 채워넣기도 한다. 그리고 매일 출근하던 길에 서있는 가로수의 수없이 붙어있던 낙엽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렇듯 ‘나’를 비롯해 ‘나’를 둘러싼 모든 형상은 끊임없이 유동하며 한 순간도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다. 작가는 이러한 크고 작은 변화를 모두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 이 사건들은 마치 한장의 사진을 찍는 행위처럼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나 마치 변화를 일으키는 듯 하지만, 사진은 그저 한 장의 이미지로 남아 존재하고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처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결국 잠깐의 변함이 없는 사건일 뿐이며 언젠가는 사라지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건들로 엮인 하루를 보내고 그 사건들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퍼뜩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어항 속에서 -12’ (2024) 캔버스에 혼합매체, 53x45.5cm, ⓒ최희준
‘하얀’, (2023) 캔버스에 혼합매체, 91x72.7cm, ⓒ최희준
작가는 양재천에서 시작한 야외 드로잉을 통해 물 속에서 반사되고 흐트러지는 장면을 포착하고 이후 물과 연관된 수족관과 바다와 같은 여러 대상을 탐색해 나갔다고 설명한다. 작품 속에서 시간은 계속해서 변형되고 해체되는 선과 색감의 흐름으로 표현하고 있다. 색과 선을 중심으로 표현되는 그녀의 작업에서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물성’이 없다는 점이다. 작업에서 물성이라는 것은 크게 수채화, 유화, 분채, 나무, 대리석과 같이 어떠한 물질을 가지고 작업을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는 ‘재료적인 것’과 작품에서 또렷한 물체로 그려진 대상이 무엇인지 알수 있는 ‘형태적인 것’ 두가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업에는 이 두가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묘한 색깔의 안개로 이루어진 배경 위에 다채로운 굵기를 가진 선들로 만들어진 모호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작업을 진행할 때 캔버스 위에 겹겹의 물감을 바르고, 그것을 긁어내고 그 위에 다시 얇게 물감을 바르는 방식을 반복해 시간의 흐름을 얇게 중첩 시키고자 했다. 아크릴 물감을 주로 사용하지만 마치 수채화나 동양화처럼 재료적 특징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 작가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마치 물감과 재료들이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얇은 층들이 촘촘하고 얇게 쌓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주로 풍경화를 소재로 삼는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화와는 상당히 다른 방향성을 띄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풍경을 볼때 나무, 돌, 건축물 등 사물들을 보곤 한다. 이처럼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사물들은 대체로 사람보다 큰 부피감을 가지고 있어 두텁고 다채로와 보이는 색감과 튀어나올 것 같은 명암에 익숙하다. 그러나 작가는 사물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물성보다 그것을 둘러싼 공기와 안개, 풍경이 반사되는 강물 표면과 같은 보이지 않거나 허상에 가까운 층을 잡아내고자 한다. 이에 물체의 부피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작품은 마치 셀로판지처럼 가벼우면서 투명한 풍경을 그려낸다. 그리고 나무인지 수초인지 구분되지 않는 형태의 무언가를 가진 풍경은 언제, 어디서 작가가 그렸는지, 어떤 날씨에 무엇을 보고 그렸는지 알 수 없는 모호한 풍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광경은 우리가 눈을 깜빡이는 아주 찰나의 순간에 마치 각막 위에 맺히는 풍경의 상을 캔버스로 얇게 붙여낸 듯하다. 얇아진 만큼 내구성도 약해진 듯한 이미지들은 조각 조각나 캔버스 위를 부유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선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녀의 작품에서 둥둥 떠다니는 풍경의 이미지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원근법을 파괴하고 다시점적인 레이어를 보여준다. 이는 작가가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을 보고 그려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 속에서 얇고 어렴풋하게 존재하는 순간 좋았던 기억들을 모아 만들어낸 가상의 노스탤지어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일시 정지된 이미지를 포착하는 최희준 작가는 흐트러지는 순간과 기억의 잔상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녀의 작품은 시간과 감각의 흐름 속에서 마치 손끝에서 부서질 듯 아련하고 흐릿한 변화를 담아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조용히 그 순간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모호하고 투명하게 그려진 그녀의 풍경은 현실을 넘어 기억과 감각의 또 다른 층위로 우리를 이끌고, 흘러가는 시간과 사라져가는 순간들의 의미를 잠시 멈춰 서서 되새기게 만든다.
최희준 Choi Hee Joon 작가의 더 많은 작품은 아래 SNS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Instagram ID: heejon.draw * 참고자료 최희준. 작가노트-수상한세계(24.10.01) 최희준, 작업노트-전시를 준비하며(24.08.28) * 전시정보 최희준. <수상한 세계>. 갤러리 그리다. 2024.11.01-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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