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라는 시스템 아래 작가와 작품의 숙명 중 하나는 가장 빛나는 ‘순간’과 ‘장소’가 유한하다는 것이다. 모두에게 선보이는 전시일정이 없을 때, 쓸쓸히 수장고로 갈 수 있는 작품은 그래도 형편이 좋다. 어떤 작품은 작가의 생전 동안 전시로 보이지 못하고 기록만 남아 후세에 특정 작가의 미공개 작품이라는 타이틀로 재발굴 되기도 한다. 장소특정적인 작품들은 작품이 놓이는 장소가 가진 맥락에 맞춰 제작되며 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된다. 그러나 그 장소의 맥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이해관계의 변화와 그곳을 직접 운영하고, 방문하고, 향유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따라 달라진다. 흡사 재난영화나 게임에서 부서지거나 파묻힌 자유의 여신상처럼 처음 작품이 의미하고자 했던 의도와는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좀 더 좁은 범주에서 살펴보자. 작가는 작품을 서로 다른 전시조건들 안에서 선보이고,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의 의도와 비교해 작품의 그 형태나 맥락은 조금씩 변형된다. 이렇듯, 현대미술은 전시 기간 중 작품으로 존재하기 위한 장소인 공간들 -전통적인 화이트큐브부터 블랙박스, 시한부에 놓인 건축물, 야외에 노출된 환경까지- 에서 선보여진다. 그리고 작품은 그 외의 시공간에서는 그저 일상 속의 오브제, 하나의 포장된 물질로 존재한다. 김진아 작가는 종종 안전한 갤러리를 떠나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 목욕탕, 여관, 운영 중인 버스터미널, 빈집 등 다양하고 어찌보면 가혹한 전시환경들에서 설치작업을 진행해왔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과정에서 작품이 전시되는 기간과 그렇지 않은 기간들의 간극을 예술가로서 ‘생존’하려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과 연결하며, 이를 기민하게 받아들였다.
특정한 ‘OO’로서 존재함이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작품이 존재하기 위해, 제작되고 완성되는 과정은 중요하다. 더불어 ‘어디서 어떻게 선보여질 것인가’라는 기획과 연출들은 많은 관계 속에서 진행된다. 다양한 전시장소들을 떠도는 작품들도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설치과정을 거친다. 특히 김진아 작가의 전시는 설치 및 퍼포먼스 등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는 특성을 지님으로, 새로운 환경에서의 설치과정은 작가에게 재제작과 마찬가지다. 이는 1)잠시 머물고, 2)정착하지 못하고, 3)다시 이동한다는 부분에서 현대미술에서 논의되는 ‘유목’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적응과정은 1부터 3까지 순차적인 하나의 현상으로 드러내기보다 2번 부분 ‘정착하지 못함’을 중심으로 한 수동적인 태도가 기저에 깔려있으며, 이는 언제든 이동할 준비를 하는 ‘행동’으로 연결된다. 그녀는 작가노트에서 ‘처음부터 정착이 불가능하다’는 무기력함을 전제로 선택이 아닌 강제로 이동해야하는 행위를 ‘방랑’이라 묘사한다.
<학습된 청구> (2015) ⓒ김진아 작가
이러한 관점에 집중한 첫 실험은 2015년에 <학습된 청구>라는 제목으로 진행한 퍼포먼스와 설치오브제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석사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청구전을 진행해야하고, 교내의 작업실을 비워야 하는 상황을 시스템에 의한 타의로 받아들였다. 퍼포먼스 기록 영상에서 볼 수 있듯, 그녀는 본인이 학습하고 경험해 온 틀-상자 안에서 나와 자신의 창작물과 도구들을 전시기간 내내 전시장에서 포장하며 그 과정을 전시했다. 작품들은 작업실에서 전시장으로, 그리고 어딘가 불특정한 장소들로 옮겨지기 위한 준비상태-포장된 상태에 놓인다. 작가는 이를 그대로 전시장에 놓음으로써, ‘정착하지 못함’이라는 상황과 그로 인한 무기력을 함께 드러냈다.
<방랑자의 농장>(2019) ⓒ김진아 작가
이 실험은 2019년 쓰시마 아트센터에서 진행한 그녀의 3번째 개인전의 주요 작품, <방랑자의 농장>에서 볼 수 있다. 이는 그녀의 2번째 개인전 《Ground, up, ready》에서도 선보였다. 수경재배시스템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조건들을 기반으로 전시 기간 중에 식물을 키울 수 있는 모듈형 설치작품이다. 이 작품에 집중해야할 요소는 ‘최소한의 조건’과 ‘모듈성’이다. ‘이 작품이 불특정한 장소에 놓인다’(향후 전시될 가능성이 있는 공간들)는 것은 이미 작품을 구상하는 단계부터 고려된 사항들이다. 그녀의 농장은 최소한의 환경이다. 작품으로써의 식물에게 발아할 수 있는 최소 조건-물, 붉은 빛-은 펌프와 LED조명을 활용해 제공된다. 그리고 <방랑자의 농장>은 물리적인 공간에 맞춰 구성이 변형될 수 있도록 파이프 유닛으로 이루어져있다. 전시에서 그녀는 짧은 시간동안 허락된 장소에서 자신의 작품을 펼쳐낸다. 또다시 이동해야 하는 무기력한 상황은 한시적인 자신만의 생태계를 구축하고 이를 다시 분해하는 작가의 ‘행동’으로 연결되고, 이는 ‘생존’에 대한 의미를 질문한다.
관련 작품 영상 링크
<방랑자의 농장>(2019) https://youtu.be/lkAW7DOOrYA?si=IqsY_S87ij1Ghzj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