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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Creed, Work No. 850, Tate Britain, 2008
인터벌 러닝의 방법론
러닝 운동을 해왔거나, 기본적인 체력 증진을 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이라면 인터벌 러닝의 효과에 대해 자주 들어봤을 것이다. 인터벌(interval) 러닝은 말 그대로 전체 운동 프로그램 내에서 ‘구간’을 설정하고, 구간마다 고강도의 달리기와 저강도의 빠르게 걷기를 교차 반복하는 신체 훈련이다. 인터벌 러닝은 고정된 프로그램이라기보단 하나의 방법론으로, 어떤 신체 능력의 향상을 목표하느냐에 구간의 강도와 반복 횟수를 세부적으로 다르게 설정하여 훈련 가능하다.
달리기의 속도는 강도와 직결되고, 강도는 곧 산소를 소모하는 호흡과 연계되며, 이는 최종적으로 달리기의 지속을 결정한다. 이 트레이닝의 핵심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낮은 강도의 ‘불완전한 휴식기’를 취하는 것이다. 고강도의 질주에서 산소를 소모한 후 완전한 휴식이 아닌 불완전 휴식을 거치고, 다시 고강도로 움직이는 방식이 최대로 섭취할 수 있는 산소량을 점진적으로 증가시킨다. 이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달리기 속도, 다리 근력 등이 향상되지만, 가장 주요하게는 전신의 심폐 지구력이 향상되는 것이다.1) 그리고 이 글은 이러한 신체 훈련의 메커니즘으로 오늘의 미술이 트레이닝하기를 제안하는 글이다. 인터벌 러닝과 마찬가지로 각기 다른 속도의 사건들이 모여 구성되는 전시와 각종 전시 연계 행사들은, 즉 오늘의 미술은 어떤 달리기 하고 있는가?
단거리 질주를 끝낸 전시와 그 이후: 순환율 높은 팝업 전시들과 각종 행사
전시는 순식간에 지나가는 단거리 질주다. 아주 빠르게 정해진 시간만큼 달렸다가 끝이 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전시의 단위를 시공간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말하자면 모든 행사(event), 경기가 그러하듯 전시 역시 끝이 예보된 한 번의 사건이며, 줄곧 그 생명은 그것이 대중에게 오픈되는 시간만큼을 행사의 시간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약속된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길 종료하면 전시는 일차적으로 마무리된다고 보는데, 여기서 이 종료가 마침표가 아닌,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전시의 쉼표로 이해하면 어떨까. 전시라는 사건을 보는 시각을 잠시 변경해보자. 우리가 관람자로서 공간에 들어가 전시를 볼 수 있는 기간의 앞-뒤 타임라인을 다른 참여자의 시점에서 확인해보자는 말이다.
포스터에 명시된 전시 기간은 관람을 열어두는 기간이지 전시의 유일한 생존 시간이 아니다. 관람 공개의 전시 기간 앞뒤로 전시 만들기에 참여한 여러 역할의 사람들은 문 닫힌 미술관/공간 안에서 자신의 업무를 맡아 한다. 작가는 전시를 위해 작업을 설치하고 철수한다. 큐레이터는 작가를 돕거나 진행 전반을 감독한다. 그 외에도 전시 이후 출판물을 발행하는 편집자, 설치를 돕는 기술자, 미술관 혹은 전시 공간, 갤러리의 시설관리인, 촬영 기록 사진가들 등 많은 이들이 명시된 전시 기간의 앞과 뒤의 타임라인에서 자기 일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큐레이터의 시점에 접속해 보기로 하자. 하나의 전시를 만들기 위해 큐레이터는 몇 연 단위로 전시 주제 선정을 위한 개인 연구, 리서치의 타임라인을 갖는다. 그리고 실무를 진행하며 전시를 실현화하기 위한 로드맵을 하나씩 밟아간다. 이 타임라인은 관람객의 속도보다 훨씬 느리다. 또 다른 예시로 전시의 리플렛은 어떨까? 종이 리플렛은 전시가 끝난 이후 어느 관람자의 방 한구석을 30년간 차지할 수도, 전시가 끝난 후에 곧바로 폐기장에서 소각되어 곧바로 사라질 수도 있다.
이렇게 같은 전시에 접속했던 여러 다른 이들이 맞이하는 경우의 수는 다양하다. 이 다양하고 다중의 시점과 속도, 행위가 모이는 전시와 그 이후를 생각해보면, 전시가 단 한 번의 일시적 행사이기 이전에 나를 포함한 무수한 존재들이 각자만의 속도와 행위의 강도를 가지고 동시에 접속하는 장소임을 알게 된다. 관람자 혹은 큐레이터 뿐 아니라, 전시에 참여한 다양한 관계자들, 전시가 작동할 수 있도록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아 수행한 물건과 건축물 등등 모두가 이 장소에서 모였다가 흩어진다. 모였다가 흩어진 이후, 그리고 전시가 종료된 이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서 발생한다.
오늘날 한국 동시대 미술에서 필자가 보는 문제적인 상황의 순환의 중심에는 질주하는 전시와 그 이후에 대한 고민이 전시 만들기에 반영되지 못한다는 순환 축이 있다. 빠르게 전시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있다. 전시라는 형식(format)이 다양한 경로로 확산하고, SNS의 발달과 물질문화의 가속화에 연동된 전시의 소식이 빠르게 유통되는 동시에 잊히는 주기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이에 더해 ‘현대’ 미술관을 비롯한 미술계 내 여러 (유사) 제도에서는 미술의 담론이 사회과학 쪽 이론들과 습합(習合)하며 고도화되는 한편, 다른 한 쪽에서는 전시가 수적으로 급증하는 양극화를 보인다. 작업 하나에 너무 많은 배경과 맥락, 개념과 담론이 망령처럼 따라붙거나, 일종의 ‘팝업 스토어’와 ‘쇼룸’처럼 전시가 높은 강도의 자극을 빠르게 쏟아버리고 사라져버린다. 결과적으로 단기간에 치고 빠지는 전시들이 성취하는 성과는 남는 것 없이 텅 비어버리는 한편, 미술이 담론의 보충제, 이론 전개를 위한 인용 ‘물(物)’로 굳혀지는 가속의 양극화. 여기에서 전시 만들기의 본질이 사라지고 있다.
‘전시 만들기’에 대한 고민의 실종과 ‘파라큐레토리얼’의 등장
미술이라는 장르가 지속해 온 전시라는 형식은 미술은 미술이게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시 만들기에 대한 고민이 지금 이곳에서는 어쩐지 실종되어 자주 보이지 않는다. 전시 만들기를 고민한다는 것은 전시의 주제나 내용을 고민하는 것을 넘어서 그 만드는 행위와 방법에 대한 고민을 의미한다. 담론과 개념에 의탁하는 작업의 증가와 가속화된 망각에 따른 극적인 양분화의 상황 속에서 전시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오래되었음에도 낡지 않는 질문들은 쉽게도 증발하곤 한다. 이는 총체적인 문제이며, 다만 여러 이슈가 엮여 만들어진 총체적인 문제일수록 수동적이고 낮은 공격성을 보이기에 덜 가시적이다. 여기서 오늘날의 미술이라는 신체는 점진적인 트레이닝을 행해야 하는 것이다.
전시를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을 누적해 온 곳이 ‘큐레토리얼’의 영역이다.2) 1960년대에 서구권에서는 개념 미술이 등장한 이후로 결과적인 물질로서의 미술 대신 그를 만드는 과정에서의 이해와 행위가 더욱 중요해지기 시작했었다. 그에 따라 전시 개념과 그 방법론에도 변화가 필요했으며, 몇몇 선구적인 큐레이터들은 전시 만들기의 새로운 모델과 방식들을 고안하고 실험하기 시작했다. 더욱 혁신적인 실험을 위해 큐레이터들은 기관을 벗어나 ‘독립’을 하여 ‘독립 큐레이터’라는 영역이 개척되기 시작했고, 그들은 새롭게 정해진 주제와 경로를 벗어나 열린 데이터베이스로서 전시를 볼 것을 권유하였다.3) 이와 더불어 1990년대에 이르러 독립 큐레이터들이 제도와 기관 뿐 아니라 지역과 국가를 벗어나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교류와 지식이 미술에 유입되기 시작한 영향도 크다.4) 이 배경이 지금의 미술이 담론 친화적인 도구로 기능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그다음으로 비엔날레의 다양화와 함께 전 지구적으로 공유하는 담론의 영역이 점차 미술에서도 중요해지자 ‘전시 만들기’가 확장하면서 강의, 워크숍, 스크리닝, 퍼포먼스 등의 행사들이 전시와 연계된 조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전시 만들기를 뜻하는 ‘큐레토리얼(curatorial)’이라는 단어 앞에 ‘para-’가 붙으며, 기존의 큐레토리얼을 둘러싼, 전시에 나란히 있는, 그로부터 확장된 영역과 그 기획을 부르는 ‘파라큐레토리얼(para-curatorial)’이 등장한 것이다. 파라큐레토리얼은 작품 창작과 전시 제작만큼이나 전시를 둘러싼 담론과 사유의 틀이 중요하고, 그를 전시와 독립적이면서도 병렬적으로 관계 맺는 행사들과 함께 그려져야 한다는 인식에 기반한다.5) 이에 관해 큐레이터 폴 오닐(Paul Onil)이 아도르노의 ‘성좌(Konstellation)’ 개념을 인용해 파라큐레토리얼을 이해한 이후로 이 별자리 그리기로서의 전시에 대한 제안이 충분한 대안으로 소개되곤 한다.6)
하지만 이 글은 여기서 한 차례 더 나아가 생각한다. 기존에 동시대 미술과 관련된 글들을 읽어온 이들에게는 이 (파라)큐레토리얼, 전시와 그 주변부 만들기의 행위가 ‘별 그리기’와 같아야 함을 말하는 내용에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 직렬적이지만 개별적인 네트워크를 그리는 일은 그래서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곧 별을 그리는 것인가? 필자는 이에 특히 전시 만들기에 대한 질문들은 대안적 담론으로서의 형태로 화석화되는 순간 그 유효함을 잃으며, 그것이 계속해 활성화되면서 두드려져야 함을 주장한다. 큐레토리얼은 전통적인 방식의 지식화, 정적인 이론화의 작업으로 포섭하는 순간 그 유효한 어떤가를 잃는다. 이에 이 질문들을 손에 들고 몸을 움직여 가장 동적인 행위로서의 트레이닝, 훈련을 하자는 것이 이 글의 취지이다. 특정한 단어에 멈춰있는 동시대 미술의 어떤 질문 앞에서, 효과 좋은 운동과 훈련 방법을 빌려 와 트레이닝 하자는 제안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미술의 인터벌 트레이닝: 전시는 체력의 싸움이다? 교차/반복하는 빠른 이벤트와 느린 이벤트
“미술관에서 전시 외의 각종 프로그램이 급증한 것은 다양한 이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이려는 노력이기는 한데, (중략) 강연, 심포지엄, 퍼포먼스 같은 프로그램이 전시라는 ‘느린’ 이벤트에 구두점을 찍어 나가는 ‘빠른’ 이벤트라고 본 것이다. 긴 호흡, 분산된 박동을 흘러가는 전시에 교란적인 진동을 짧지만 집중적으로 일으키는 사건들이다.”7)
처음으로 돌아가 인터벌 러닝을 떠올려보자. 하나의 전시가 자신의 짧은 질주를 끝낸 후에도 새로운 구간들을 맞이하며 달린다면, 지금의 동시대 미술이 이 인터벌 트레이닝한다면 우린 무엇이 향상될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전시가 끝난 후 1년간 천천히 전시 도록이 만들어졌고, 도록이 출판된 후 그 도록에 관한 토크가 하루 간 열린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전시가 마무리된 이후 1년간 진행된 느린 출판은 질주 이후 완전히 몸을 내버려 두지 않고 심박수를 유지하며 걷는 “불완전한 휴식기”에 해당한다. 그 느린 호흡과 낮은 강도의 출판 과정 동안 또 다음의 질주를 할 호흡이 채워진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하며 불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전시에 대한 대화와 내용이 새롭게 발견되고 재구성된다. 그리고 책에 관한 토크가 열리는 하루 동안은 또 고강도의 달리기가 진행된다. 이러한 구간의 반복에는 언젠가 끝이 있더라도, 이 훈련을 수행한 이들에게 사유의 근육, 고민의 심폐지구력, 협업의 균형 감각의 훈련이 몸에 남게 된다.
기본적으로 전시는 준비해 온 모든 산소를 소모하며 질주하느라 짧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전시에 참여한 여러 존재들의 각기 다른 속도들을 이해하고 달리기를 새로운 속도로 지속한다면, 고강도 구간 앞뒤에서 질주의 순간을 위한 호흡이 축적되며 새로운 현재가 생성된다. 이 달리기를 하며 산소섭취량이 늘어난 신체는 하나의 전시를 더 멀리, 끊이지 않고, 새로운 곳으로 밀고 나아가 볼 힘과 체력을 갖게 된다. 즉, 전시 만들기의 실천과 고민의 총량이 넓어지면서 심폐지구력이 높아지는 만큼 전시는 빠르게 소멸하고 사라지지 않고 중요한 질문과 과제들을 다음으로 넘겨줄 여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트레이닝을 통해 미술이라는 신체의 여러 종합 운동 능력은 다양한 의미로 향상되고, 한 번의 물리적인 시공간적 사건으로 이해되던 전시의 본질이 새로운 경로로 되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2010년대 중반 동시대 미술의 파라/큐레토리얼 사례들
이처럼 전시가 새로운 속도로 호흡을 내뱉으며 뛰기 위해선 다음의 다른 속도로 뛸 구간을 설정해야 한다. 다음 구간으로 전환하는 시점과 그 방법 설정에 있어 파라/큐레토리얼이 작동한다. 왜냐하면 단거리 질주의 전시로부터 시작된 엔트로피가 계속해 재구서되기 위해선 그것이 보존되고 유포되는 방안들이 고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8) 여기서 이 방안들은 실질적으로 오늘날 파라큐레토리얼의 차원에서 일컬어지는 출판물, 담론 유포로서의 심포지엄, 감각과 기억의 촉발로서의 퍼포먼스 등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방안들은 다음의 구간을 책임지며 전시 이후의 시간을 만든다. 그렇다면 방안은 실질적으로 어떻게 전시의 다음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9)
이러한 질문에서 참조할만한 “트레이닝”을 행한 사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가져온 사례들은 모두 2010년대 중후반 시기 한국 동시대 미술의 몇가지 파라/큐레토리얼 사례들이다. 이렇게 2010년대 중후반의 미술 현장에 주목하는 것은 이 글이 쓰인 현재의 2024년 시점에서 그 달리기가 여전히 유효한지 살피기 좋은 적당한 시차를 가진 과거가 2010년대 중후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례 1.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전시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전시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 《막후극_Afterpiece》(인사미술공간, 2015) |
전시 《막후극_Afterpiece》의 포스터 @인사미술공간
해당 전시는 2015년 3월 27일부터 5월 1일까지 인사미술공간에서 진행된 기획전으로 작가 김민애, 김진주, 이수성, 이정자, 파트타임스위트이 참여한 기획전이다. 이 전시의 기획에서는 전시라는 일회적인 행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행위가 마주하는 불완전함에 주목면서 이벤트가 끝난 후에 남은 작품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질문한다는 점에서 트레이닝의 사례로 가져왔다. 참여한 작가들의 작업 역시 이 질문에 함께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각기 다른 지점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로서 연동된 전시 혹은 구조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정해진 공간에서 잠시 열리고는 곧 사라지는 특성 때문에 (중략) 미술의 이야기는 기억과 기록을 참조한 담론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된다. (중략) 특정한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전시의 일회적 속성 너머에서, 임의적 선택과 자의적 기억을 통해 호출된 작업은 어떤 현장성을 지닐 있을까? (중략) 다양한 시점의 과거들을 참조 지점으로 설정한 Afterpiece 막후극 또한 막후에는 어떤 잠재적 과거로 기록-기억될 것인가.”6)
사례 2. 전시 이후의 잔여로서의 설치된 담론과 지속은 전시의 “지구력”인가 혹은 유행인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개인전 《세상의 모든 가능성(The parliament of possibilities)》(리움미술관, 2016) |
리움미술관에서의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 대담
이 전시는 2016년 리움 미술관에서 진행된 덴마크 출신의 올라퍼 엘리아슨의 개인전으로, 해당 전시는 예술이 닫힌 의미가 아니라 현재에 존재하며 늘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엘리아슨의 태도를 반영한 전시였다. 주목할 것은 이 전시를 둘러싼 기획으로 전시 이후 무엇이 전시가 아닌 형태로 남았는지, 전시 이후의 잔여들을 살피기 좋은 사례이다.
당시 올라퍼 엘리아슨은 자신이 철학적으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과 아티스트 토크에서 대담을 벌였다. 티모시 모턴은 21세기적 사유로서 생태와 자연, 객체의 네트워크에 관해 주목하는 연구자로서, 국내 번역서로는 『하이퍼객체』(2024), 『실재론적 마술』(2023) 등이 있다. 특히나 팬데믹을 기점으로 국내 예술계에 소개되고 확산한 신유물론와 함께 언급되는 학자이다.
여러 이유를 종합하였을 때, 필자는 2016년에 리움미술관의 해당 대담이 국내 연구자들에게 티모시 모턴을 알리는 거의 최초의 채널이었을 것으로 이해한다.10) 새로운 사상의 최전선에 있는 영미권의 철학 및 담론이 국내로 유통되기 위해서 국내 연구자들이 번역의 필요가 있음을 인지하는 검증의 시간과 물리적인 번역, 편집과 출판 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때 티모시 모턴이 리움에서의 대담이 계기가 되어 국내에 2016년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이라면 모턴의 주요한 저서 번역본들이 국내에서 2023-2024년 시점에 출판된 이 시기도 함께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로부터 동시대 미술과 함께 그것이 반영한 철학이 담론이 수입되어 국내에 소개되고 확산하는 속도와 시차를 해당 사례로부터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전시와 함께 ‘수입된’ 담론의 유행과 확산 역시 전시 이후의 잔여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사례 3. 과거의 전시를 재색인화하기 위해선 무엇/누구를 불러와 어떤 요청을 건네야할까? 《커넥트 1: 스틸 액츠》(아트선재센터, 2016) |
전시 《커넥트 1: 스틸 액츠》의 토크 프로그램 포스터(좌) @아트선재센터
전시 《커넥트 1: 스틸 액츠》의 토크 프로그램 중 ‘정서영과 김현진의 대화’ 현장 사진(우) @아트선재센터
2016년 아트선재센터에서 8월 27일부터 11월 20일까지 열린 해당 전시는 1998년 개관 이후 20년 간의 아트선재센터의 과거를 현재화하려는 기획 하에 진행된 파라/큐레토리얼 사례이다. ‘과거의 전시는 어떻게 다시 현재의 것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전면에 내세운 이 기획은 ‘아트선재센터‘라는 기관이 정지하고 다시 움직였던 타임라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아트선재센터는 과거 시설 보수를 위해 2005년 봄부터 2006년 가을까지 한번 ‘정지’했었고, 다음으로 2015년 겨울부터 2016년 여름까지 정지했었다. 해당 전시가 보여주는 큐레토리얼은 이 두 번째 보수 공사가 끝난 이후의 시점에만 가능한 기획을 시도한 점에서 인터벌 트레이닝의 구간 전환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시 제목의 단어들을 빌려 설명하자면, “스틸”한 휴식기 이후, 다시 고강도의 “액츠” 구간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과거의 “커넥트”를 시도하며 기관의 역사와 소장품에 대한 재색인화 작업을 수행한 큐레토리얼인 것이다.
이 큐레토리얼에서 눈여겨 볼 만한 트레이닝은 과거 전시를 현재로 불러오는 과정에서 이전 전시들을 재집합하는 이유가 설득력있으며, 주제와 기획 형식이 서로 교차되는 지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해당 전시에서는 2004년 김소라의 《안타르티카》, 2000년 정서영의 《전망대》, 1998년 이불의 《이불》, 세 개의 전시를 당시 전시 ‘책자’의 필진과 함께 연계해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러한 방식은 책자의 필진 역시 작가나 작품과 동등한 전시의 구성원이라고 인식함을 보이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고 증언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전시 만들기의 트레이닝에 있어 해당 기획이 중요한 참조 점인 이유이다.
생생한 과거를 들려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 역시 과거 저 시점으로부터 현재 어떠한 시차와 거리감이 생겼을 것을 안다. 그 시차를 극복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 멀어진 거리를 활용하여 우리가 함께 벌였던 과거의 사건을 재색인하자. 어떤 지점에서는 확장해보자. 이러한 맥락의 요청이 이 기획의 태도로서 작동하고 있다. 이렇게 당시 전시의 필진들은 대담자가 되어 새로운 대화를 생성하고, 다시 한번 더 《커넥트 1:스틸 액츠》의 전시 후 도록의 필진이 된다. 이에 더해 함께 진행된 ‘예술 살롱’ 프로그램과 퍼포먼스를 같이 살펴보면, 과거 전시 주변부의 것들을 현재 전시의 가운데로 들여오면서 새로운 기획을 만드는 방법론의 실천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큐레토리얼과 파라큐레토리얼의 반복적 교차를 통한 전시 만들기의 사례로서 주변이 곧 중심이, 중심이 곧 주변이 되어 새로운 다음을 생성하였다는 점에서 여러 의의를 남긴 기획 사례라고 본다.
새로운 파라/큐레토리얼 트레이닝에 대한 제언
파라/큐레토리얼의 맥락에서 지금까지 실천되고 적용된 것들 외 새로운 주변이 기획의 가운데로 들어올 여지는 언제나 열려있으며, 그러므로 잠재적이다. 최근에 한국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전시 만들기의 “파라-”로서 자주 보이는 것이 디제잉 행사이다. 이에 관해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파라큐레토리얼의 ‘아킬레스 건’은 말과 생각, 개념만이 있다면 무엇이든 전시와 함께 제시될 수 있다고 구조를 열어두는 확장성이다. 여기서 이 확장성을 남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첫째로 전시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고 이것이 다른 방안으로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명확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가 명확지 않다면 죽지 않고 굳이 다시 부활하는지 모르겠는 좀비에 불과하다. 내가 손에 든 이것이 왜 지속어야 하고, 재생되어야 하며, 저 멀리로 유포되어야 하는가? 이를 말 대신 기획으로 설득할 줄 아는 것 역시 이번 글의 트레이닝이 목적으로 하는 훈련 대상이자 향상을 기대하는 능력 중 하나다. 주의할 것은 파라큐레토리얼의 요소가 전시의 주제나 목적에 무조건 동기화되거나 그에 수렴하기만 하면 안된다는 점이다. 혹은 함께 있는 전시를 그저 명분으로 전락하게 만들면 안 된다. 그 구조가 설치된 최초의 창발 동력이 전시이기에 그 주변부의 것들이 전시와는 다른 속도와 강도로 움직이되, 하나의 유기체로서 함께 행위 하는 일부임을 망각해선 안 될 것이다.
전시는 끝난 이후가 시작이다. 이 문장은 우리를 달리게 하는 트레이닝의 주문이자 훈련의 장소이다. 주문에 따라 호흡에 집중하며 다음의 구간을 설계하고 맞이할 것. 이것이 어느덧 2020년대의 중반을 맞이한 지금 시점에, 이번 트레이닝의 특훈이다.
각주 김홍화, 「마라톤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한 훈련의 기본 원리 고찰」, (석사학위논문, 경산대학교, 1999), 10-14. 이 글은 큐레토리얼을 말하고자 전시의 만들기에 초점을 둔 글이기에, 창작이나 기획을 업이나 활동 영역으로 삼지 않는 관람의 차원을 제외하고 있는 것으로 표면적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전시 만들기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전시의 보기, 관람자의 수용과 참여와 깊게 결부 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 본 연속 기고 중 한 편에서 해당 관람의 차원에서 가능한 트레이닝 역시 다룰 예정이며, 관련한 담론으로는 ‘큐레토리얼민주주의’에 대한 다음의 글에서 구체적으로 확인 가능하다. 김성호, 「큐레토리얼민주주의: 관람자의 창작을 견인하는 큐레이팅」, 『예술과 미디어』 20:1 (2021): 39-68. 이 시도들이 연속될수록 작가의 존재가 무색할 정도로 큐레이터의 역할이 정도 이상으로 중앙화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마치 큐레이터가 전시의 모든 주권을 소유한 ‘일인자’로서 모든 창의성과 저자성을 가진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에 대한 비판들로, 이에 관해서는 전시가 ‘다중적 저자성(multiple authorship)’을 갖는다는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견해를 살펴볼 만하다. 권혁규, 「1990년대 이후 큐레이팅의 확장에 관한 논의들: 동시대의 역사적 징후로서 큐레토리얼」, 『서양미술사학회』 58 (2023): 7-28. 김성은, ‘비판적 근육, 안무적 지대’, 『큐레토리얼 사이와 변주』, 국립현대미술관 저(국립현대미술관, 2019), 180. 권혁규, 「카트린 다비드(Catherine David)의 담론적 큐레이팅을 통해 본 90년대 이후 큐레이팅의 전환」, 『현대미술학』 26:2 (2022):41-64. 7) 위의 글, 180-181. 8) 서울시립아카이브 레퍼런스 라이브러리, 윤원화, ‘출판과 전시의 시간적 관계에 관한 노트’ 9) 윤원화,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 (미디어버스, 2017) 10) 여기서 『하이퍼객체』 책에 대한 소개 글을 보면 “세계적으로 호평 받는 작가”인 엘리아슨이 자신의 주요 전시회마다 대담을 나누기 위해 모턴을 태우고 전 세계를 비행했다는 것과 그가 2016년 리움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를 연 바 있다는 정보가 소개되어 있다. 교보문고, 『하이퍼객체』 책 소개글 중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461469 |
사진 출처 《막후극_Afterpiece》의 포스터 이미지 현재전시 | 전시 | 프로그램 | 인사미술공간 (arko.or.kr) 전시 《커넥트 1: 스틸 액츠》의 토크 프로그램 포스터 이미지 커넥트 1: 스틸 액츠 - 아트선재센터 (artsonje.org) 전시 《커넥트 1: 스틸 액츠》의 아티스트 토크 중 ‘정서영과 김현진의 대화’ 현장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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