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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 ARTLECTURE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 사람 fragile+blue - 에피메테우스의 스물일곱 번째 질문-

/Art & Preview/
by youwallsang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 사람 fragile+blue - 에피메테우스의 스물일곱 번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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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제주현대미술관 2023 지역 네트워크교류전 <자연 사람 fragile+blue> 展,
2023.11.3.~2024.2.25. 中
로와정(듀오 아티스트 노윤희+정현석)

여행길의 동반同伴은 신중해야 한다. 몇 번이고 들었다 놨던 카디건 한 장이 생존의 갈림길을 꽃길로 바꿀지 모른다. 어느 순간에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는 것처럼, 무엇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또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은, 자신의 판단만으로 싼 여행 가방에, 정말 꼭 필요한 것들만 들어 있을까. 중요한데 빠졌거나, 불필요한 짐은 없는 것일까. 2022년 제주현대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 로와정의 작품이 오는 2월 25일까지 <자연 사람:fragile+true blue> 展으로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중 로와정의 작품 앞에서 여행의 시간을 내려놓았다. 황망스런 기후의 변덕 속에서, 속을 끓이는 책 한 권과 곁들여진 냉랭한 작품이라니. 우리의 다짐이, 우리의 사유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맬 때, 바람에 눕는 눈발이 머리칼 속으로 차갑게 기어들어 와 헤집어진 속을 갈라놓았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들고 오른 비행은 땅을 밟은 뒤에도 독자讀者를 발자국 없이 떠돌게 했다. 숙소의 밤마다 작가作家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찾아와 멱살 잡이를 했고, 자신의 고통을 나눠주려 다 읽지도 못한 텍스트로 나의 게으름을 후려쳤다. 무엇을 보려 해도 피가 번졌고, 밖으로 나서려면 눈보라가 무릎을 잡아 세웠다. 바다 위로 흰 새떼처럼 눈발이 옆으로 눕고 뺨에 눈이 닿아 화끈거리면, 아직은 멀쩡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몸을 움직여야 했다. 기대했던 휴식은 책갈피에 끼여 도망치듯 날아갔다. 밤새 시달리다 눈을 뜨면 소설 속 풍경이 눈썹 끝에 펼쳐졌다. 흰 눈 밑으로 붉음이 스며드는 착각을 어느 정도 현실로 받아들였을 때, 잠시 바람이 멈췄다. 지금, 어서 지붕 아래로 숨어야 한다.

 


<wet and dry>, 2023, 풍경, 2채널 사운드, 사운드 편집-날씨, 설치에 따른 가변 크기, 12’11”, loop

 


숨어든 지붕 아래는 인적이 끊긴 폐허처럼 먹먹했다. 바람이 할퀸 팔다리가 슬로모션slow motion처럼 펄럭였지만, 다행히 보는 눈은 없었다. 차르르르- 금속의 맑고 깨끗한 소리가 복도 벽을 타고 지나간다. 바깥 날씨와 아무런 상관없는, 차분하고 깔끔한 소리. 바람에 산발한 머리를 이고 저절로 끌리듯 다가간 유리 벽 너머로 길쭉한 금속관이 팔다리를 나란히 내보이며 공중에 매달려 있다. 지붕 없는 하늘 아래에서는 미친 바람이 도망자를 찾아 들쑤시고 다니는데, 유리 벽 안은 딴 세상 풍경(landscape)처럼 수줍은 고갯짓으로 풍경(wind chime)이 소리를 낸다. ... 무언가 비틀렸다. 유리에 금이 간 듯 살짝- 빈방의 풍경은 소리를 지를 수 없다. 공기의 이동이 없는 빈방에서 풍경은 몸을 떨 수 없다. 그것은 성냥팔이 소녀가 그은 한 번의 불꽃 속 풍경처럼 짧고 서글픈 꿈을 닮았다.

 


<true blue>, 2023, 폐현수막, 테니스 네트, 네트 지주대, 1470X82X107

 


미술관을 가로지르는 테니스 네트에 매끈한 타일처럼 반듯한 파란 사각형의 글자가 달려 있다. 네트의 칸을 막고 있는 파란색은 마치 그물에 걸린 바다처럼 보인다. “TRUE BLUE” 단지 빙 둘러서 돌아가야 하는 번거로움만 있을 뿐 글자 외에 다른 건 없다. 네트의 이쪽과 저쪽을 둘러봐도 그것이 전부다. 비어있는 공간 위로 하얀 선과 네트만이 글자를 매단 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선은 경계를 만들고 네트는 대결 구도를 만드는데 누가 누구와, 무엇이 누구와 무엇을 상대하고 있는지 모호하다. 불분명한 상대는 전의戰意를 꺾는다.

 


<파도는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2023, 폐감귤상자, , 낚싯줄, 52X52, 12

 


제주에 흔한 감귤 상자다. 값싸고 튼튼한 플라스틱 상자에 밀려 볼품없이 방치되는 상자들을 모아 정사각의 화폭을 만들었다. 12개의 판은 미술관 벽을 따라 등을 기대고 서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투명한 낚싯줄로 이어진 글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선명한 못과 투명한 낚싯줄이 반듯한 글자를 만들고 있는데, 글자들은 활자중독자에게 해사한 손짓을 한다. 고정된 글자들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


냉정한 한 마디가 몸을 얼어붙게 만든다. '스스로그러한' 자연自然을 위한답시고 뭔가를 늘 도모하고 있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단칼에 잘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고래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거기서 떠다니며밤새도록.

아무 생각 안 해요.

그건 불가능해요.

왜요?

살아있으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할 순 없어요그야 그렇지만 고래는 인간이 아니에요.

그게 왜 달라야 하죠?

왜 같아야 하죠? 하지만 난 고래의 눈을 보고 그들이 생각하는 걸 알 수 있어요.

말도 안 돼요당신이 보는 건 당신 자신이에요-죄의식을 느끼는 거죠.

죄의식내가 왜 고래에게 죄의식을 느끼죠?

<빨강의 자서전> P169, 앤 카슨, 2016, 한겨레출판사


눈발이 덤벼드는 바깥과 적막을 방패 삼은 미술관은 서로 적대敵對하고 있다. 바람결에 나부끼며 살을 부비는 노래를 부르고 있어야 할 풍경은 어느 날의 한 소절 녹음만으로 무한히 되풀이된다. 소리의 기원이 됐던 시간과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의 시간이 비틀린 것이다. 청각(wet)과 시각(dry)의 불일치는 서로 등을 맞댄 자연과 인간의 관계처럼 보인다. 빈 테니스장에서 맞서고 있는 자연과 인간, 혹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태도 또한 그러하지 않을까.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감성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다는 파랗지 않았고, 바다는 진정으로 파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작별하지 않는다 것이 어찌 영원한 관계에 대한 말만이겠는가. 어느 하나와도 작별하지 않는 삶이란 제 무게에 짓눌려 결국엔 제 목소리를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말은, 제대로 된 작별을 위한 책임과 용기에 대한 다짐으로 먹은 독한 마음이리라.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독자에게 작가는 사력을 다해 다짐을 약속했을 것이다. 오래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파도가 무심한 존재라는 선언이라기보다 긴 생각 끝에 때를 지나치는 우리의 아둔함에 대한 파도의 의지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미술관 앞 카페 <우호적 무관심>은 이런 생각의 끝을 절묘하게 이었다. 우호적 무관심은 "배려"의 다른 표현일지 모르고, 파도의 냉정함은 그런 우호적 무관심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닐까 싶은. 우리는 그저 죄책감으로 키운 문제를 떠안은 채 제대로 된 다짐 없이 이른 포기와 회의감에 자신을 던져버리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래 생각하지 않는 파도는 쉼 없이 성실했고, 아직 드러나지 못한 시간들은 마지막 매듭 없이 바람에 나부꼈다. 뒤늦은 사람이 제주에서, 모진 마음으로 작별을 미루고, 모자란 생각으로 오래 파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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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youwall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