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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자아는 자신을 파괴한다 | ARTLECTURE

웅크린 자아는 자신을 파괴한다

-역사가 지루한 사람들을 위한 지적인 그림책 3. 프랑스 대혁명-

/Picture Essay/
by 안노라
웅크린 자아는 자신을 파괴한다
-역사가 지루한 사람들을 위한 지적인 그림책 3. 프랑스 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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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누가야,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부(富)의 엘리베이터가 가능했던 시대에 산 덕분에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었던 우리가 이제는 누군가 오를 사다리를 걷어차 버린 세상을 만들었나 싶어 혼란스럽구나. 인과관계가 분명치 않은 세상에서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어. 오지랖은 넓으나 할 수 있는 일은 별반 없다는 자괴감이 드네. 엄마처럼 풀 죽었나? 베란다 유리창 밖, 바람 한 점 없는 폭염에 축 늘어진 나뭇잎조차 그려놓은 정물 같구나. 색종이 오리듯 가위로 매끈히 잘라 액자에 넣어도 되겠어. 맹렬한 햇빛에 기절한, 저 박제된 잎들에게 선풍기라도 틀어주면 좋겠어. 뜨거운 열에 덴 세상에 손바닥 그늘이라도, 부채 바람이라도 일으켜 초록이 푸르르 떨며 일어나는 모습이 보고 싶네. 누가야, 이렇게 숨 막히는 오늘이 며칠이지? 아, 7월이 한 주 남았네. 이 뜨거운 오후에 오늘보다 더 뜨거웠던 1789년 7월 14일의 아침을 이야기해 줄까? 땅이 경련을 일으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던 바로 그날!

화가 미상 <바스티유 감옥 지휘관 뢰네가 호텔로 끌려가는 순간>



하늘을 향해 치솟는 연기가 격동의 시대임을 증거 하지. 지붕으로 난 창엔 불길이 일렁이고 돌바닥 위에는 총검과 장창으로 서로를 겨눈 군대가 보여. 요새의 도개교에 프랑스 근위대와 파리 민중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구나. 그림 오른쪽을 봐. 바스티유 감옥의 지휘관이었던 베르나르 레네 드 뢰네(Bernard Jordan de Launay,1740~1789)를 끌고 가는 장면이야. 역사의 전환점이 된 프랑스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지. 전제 정치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7월 14일은 현재 프랑스의 건국기념일이야.


18~19세기 유럽은 매일매일 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역사적인 날들이 이어졌단다. 특히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구체제)이라 불리는 1789년 이전의 프랑스는 쓸데없이 주변 국가의 전쟁에 참견하고, 사치스러운 왕실 파티를 여느라 국가부도를 맞이할 정도로 경제 파탄에 직면했어. 그 이면엔 2%에 불과한 성직자, 귀족 계급이 전 국토의 40%에 해당하는 토지를 갖고 부와 명예를 독점한 사회적 편중이 큰 이유였단다. 욕망은 부패를 먹고 자랐고 베르사유 궁엔 시대의 악취가 진동했어. 98%의 평민들은 무거운 세금과 부역, 연이은 흉년에 최소한의 부끄러움도 가리지 못하는 비루한 삶 속에 던져졌지.


누가야, 혹여 오해는 하지 마. 과거의 한 지점과 지금을 절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으니까. 많은 차이가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시대의 저울 위에 당대 인간의 삶과 가치관을 올려 볼 필요는 있지. 그런 의미에서 젊은 너희들이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으다)'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무리한 대출을 통해 집을 사는 것도,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것도, 주식에 월급을 털어 넣는 것도, 눈에 보이는 사회적 한계를 돌파해 보려는 몸짓에 다름 아니라고 한 말을 이해해.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이 쉽게 돈을 벌려고 한다고 폄하하지만 그건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존엄을 유지하는 인간으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했지? 시대의 차이가 크겠지만 당시 프랑스 평민들이 외쳤던 "자존(自尊)"이 지금 너희들의 말하는 "자립(自立)의 목소리일 거라 이해해.  



<루이 16세>


<마리 앙투와네트>

 


이들의 왕이었던 루이 16세에게 거리의 돌바닥으로 내몰려 쥐들에게 삶을 파 먹히고 있는 평민들은 보이지 않았어. 그의 나쁜 시력은 베르사유 궁의 텅 빈 곳간만 보였단다. 1787년, 절약이나 검소라는 말은 알지 못했던 루이 16세는 누대(屢代)로 면세 특권을 누렸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과세하는 세제개혁안을 제시했어. 누가야, 이건 완전히 고양이 목에 방울 달 기지 않았겠니? 특권에 익숙한 이들 중 누가 세금을 내려했겠니! 이윽고 국고가 바닥나 국가 지불정지 상태에 이르자 제3계급인 평민을 포함시키는 삼부회를 통해 과세 개혁안을 통과시키려고 했구나.


이번에도 귀족과 성직자들은 계급을 대표하는 신분별 표결을 주장했고 평민들은 머릿 수 표결을 원했지. 신분별은 1: 1: 1이지만 머릿 수 표결을 하면 1:1:2 가 될 수 있었거든. 하지만 머리수 표결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평민 대표들은 자신들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걷을 수 없다며 독자적으로 '국민의회'를 결성했단다. 반발하는 평민들에게 분개한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해산을 명했구나.


1789년 6월 20일, 제3계급인 부르주아 중심의 평민들은 테니스 코트에서 국민의회 해산에 불복하는 서약문을 작성해.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라고 하지. 60여 년에 걸친 프랑스혁명의 발화점이자 개인의 인권을 찾아가는 대서사의 시작이지.



자끄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

 


'제헌 국민의회'를 구성한 평민 대표들은 프랑스 헌법 제정에 착수했어. 그런데 이에 당황한 왕당파가 무력 제압을 시도하기 위해 군대를 모은다는 소식이 바람에 실려왔지 뭐야. 글쎄, 그게 사실이었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린 격이라고 이미 '혁명'이라는 바싹 마른 짚에 '무력진압'이라는 불온한 불씨가 떨어졌구나. 활활 타오른 이들은 아까의 그림에서 보듯 전제정치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어. 그곳에 무기고가 있었거든.


당시 이들의 잠을 빼앗아 불면의 어둠을 밝히게 하고, 쪼그라든 심장을 폭포처럼 펌프질 한 건 장 자크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었단다. 루소는 차분히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했어. 불평등한 사회에 저항하는 그의 낮은 목소리는 마른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이었지.


"...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들을 엄숙한 선언을 통해 명시하기로 결의한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국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 1789년 8월 26일, 프랑스 인권선언 중-


1789년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문은 이후 프랑스 헌법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 주춧돌이 되었단다. 신 앞에 양의 피를 담는 제기처럼 철철 흐르는 피를 담은 혁명을 통해 이들은 신분제도를 타파하고 동등한 신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쟁취했구나. 하지만 신의 아들도 먹어야 사는 법! 기상 이변으로 밀 수확량이 급감해 빵값이 폭등했어. 이제 실크 햍을 쓴 남자들이 아니라 앞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베르사유 궁을 향해 걸었어. 그녀들은 가슴을 열어젖히고 젖이 아닌 피를 짜내었구나. 루이 16세는 쫓기듯 파리 튀를리 궁으로 숨었어.





(위) 1791년 헌법을 만들기 위해 협력하는 삼(3) 신분 / (아래) 1791년 프랑스 헌법



그나마 이때는 온건한 혁명파들이 주도했단다. 시민군들은 자유주의 귀족이었던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했고 현재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혁명의 깃발로 삼았구나. 이들은 여러 분야에 걸쳐 사회 개혁을 실시했는데 드디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했어. 사법부를 개혁했고 조세제도도 바꾸었지. 열정은 있으나 숙련도는 부족한 인턴처럼 이들은 거친 솜씨로 생살을 잘라 고름을 짜내고 그 위에 소독약을 발랐어. 비명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지. 때로 나중을 위해 아예 뼈를 부러뜨리는 방법도 서슴지 않았어. 귀족들은 부러진 다리를 절름거리며 해외로 도망갔어. 이런 폭풍에도 개혁(改革)은 쉽지 않았구나.


루이 16세에겐 건강한 다리도, 그 다리를 대신할 지팡이도 없었어. 그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나라, 오스트리아로 몰래 피신하려 했지만 국경 앞에서 민중들에게 발견되었단다. 왕과 왕비는 헐떡이며 달리는 마차보다 빠른 속도로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 냈어. 프랑스 내에 전제정치에 대한 반감은 커져갔고, 이런 사태가 몰고 올 파장에 겁을 먹은 이웃나라들은 자국의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했지. 제 꼬리를 문 도마뱀처럼 역사는 알 수 없는 곳으로 굴러갔구나.


혁명의 에너지가 고군분투한 끝에 2년 뒤인 1791년 최초의 근대적 프랑스 헌법이 제정되었단다. 이 헌법의 결과로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어 입법의회가 구성되었어. 의사당 내에서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온건파인 푀양파가 오른쪽에, 공화제를 주장하는 자코뱅파가 왼쪽에 앉게 된 것이 온건파를 '우파'로, 급진파를 '좌파'로 부르게 된 시작이란다. 역사란 참 재미있지. 지금까지도 국회 의사당에서 좌파니 우파니 하는 걸 보면.


어쨌든 이 헌법은 1년 만에 폐지되었어. 쉽게 말해 돈이 있는 남성에게만 투표권을 허락했거든. 예나 지금이나 돈은 많은 걸 구부리고 휘어지게 하지.




정의의 여신 디케



흔히들 '법의 정신'을 나타낼 때, 정의의 여신 '디케'를 호명해. 그리스 신화의 무수한 여신들이 손에 꽃을 들고 있다면 디케는 검을 든 여신이야. 한 손엔 옳고 그름의 무게를 재는 저울과 또 한 손엔 그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그 누구라도 심판하는, 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있어. 또 선입견이나 편견에 흔들리지 않는 공정한 판결을 내리라는 의미에서 두 눈을 가리고 있지. 그녀는 인간의 계절과 시간, 운명을 관장하는 네 자매 중 하나로 디케의 로마식 표기는 유스티치아(Justitia)이고, 정의라는 영어 단어인 Justice의 어원이기도 해.


누가야, 그럼 재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니? 문헌으로 나타난 최초의 재판은 신화 속, 그리스 아레오파고스에서 열린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전쟁의 신 아레스에 관한 판정이야. 포세이돈의 아들인 할리로티오스는 아레스의 딸 알키페를 겁탈하려고 했다가 아레스에 의해 살해돼. 포세이돈은 아들을 죽인 아레스를 아테네 법정에 고소하지. 팽팽한 논리로 맞선 두 신의 송사(訟事)에서 올림포스 12 신은 아레스에게 무죄를 선고한단다. 딸의 순결을 보호하려던 아버지의 행위를 정당방위로 인정한 거지.


이 최초의 재판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던져. 죄를 지은 신에 대해 신들이 모여 재판했다는 것은 신조차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엄정한 준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숭배하는 신들을 재판정에 세운 그리스인들은 사회나 국가가 누군가의 선의나 은혜나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평무사한 법률에 의해 다스려져야 한다는 민주정의의 사상적 토대를 구현하려 했던 것인지도 몰라.  


너희들이 무엇보다 '공정'한 제도를 우선시하듯 말이야. 참고로 우리나라 법의 날인 제헌절은 1392년 7월 17일에 건국한 조선왕조의 영속성을 잇고자, 1948년 7월 17일에 <헌법>을 공표한 거란다.



윌리엄 해밀턴 <1793년 10월 16일에 처형된 마리 앙투아네트, 1794>



마녀의 솥단지에서 새로운 '혁명'의 재료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 유럽에선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국경을 넘었어. 왕조의 권력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던 주변 국가들이 프랑스혁명 사상인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자국에 퍼질까 염려하며 전쟁을 통해 혁명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야. 왕과 왕비가 자국을 침략한 오스트리아나 프로이센과 내통했다고 믿은 의용 시민군들은 '라 메르세예즈'를 합창하며 파리로 모였어. 그리고 노래가 채 끝나기 전, 왕 루이 16세 가족은 모두 탕플 탑에 갇혔어. 루이 16세는 1793년 1월에, 두 손이 묶인 채 퇴비 수레에 실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 10월에 단두대에서 처형돼.


이제 혁명은 급진적이고 과격해졌어. 대다수의 국민들은 인권과 생존이 보장되는 자유로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단다. 루이 16세 처형으로 프랑스는 유럽의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고, 외부의 위험은 내부에 엄격한 통제를 가능하게 하지. 드디어 급진적이었던 자코뱅파가 하층민의 지지를 고 권력을 장악했어.


자코뱅 파는 토지 무상 분배를 통한 하층 시민들의 힘을 모아 공화제를 수립하려고 했어. 혁명재판소나 공안 위원회 같은 기관에서 매일 심사가 열렸고 기요틴이라 불리는 단두대 아래엔 발목까지 피가 차 올랐지. 그들은 근면하고 성실하게 반대파의 목을 잘랐어. 그간 정당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울분이, 억눌렸던 것들에 대한 파괴적 복수가 광범위하게 분출했단다. 그리고 이때 자코뱅파의 지도자였던 장 폴 마라의 암살이 있었구나.



자끄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그 해는 유난히 더웠어. 1793년 7월 13일, 나날이 광폭해 가는 사회의 그늘에서 가녀린 여인이 사뿐히 걸어 나왔단다. 그녀의 이름은 샤를로트 코르데이(Chariotte Corday, 1768~1793), 온건한 지롱드 파를 지지하는 여인이었지.


열성적으로 반혁명 분자를 색출해 내고 꾸준한 인내심으로 단두대의 칼날을 갈았던 장 폴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가 집무를 보고 있던 욕실에서 칼에 찔린 채 발견되었어. 마라는 파리의 하수구에서 보낸 혁명의 시간들로 인해 피부병을 앓고 있었기에 욕실에서 집무를 보다 여인의 방문을 받게 되었거든. 칼은 정확히 마라의 폐를 관통했어. 피가 붉은 분수를 만들며 솟구쳤지. 평화로운 프랑스를 위해선 마라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 여인은 칼을 쥔 손에 망설임이 없었고 죽음의 신은 지체를 허용하지 않았지.


소박한 나무 상자 위에 떨어질 듯한 편지와 잉크병, 그리고 하얀 깃털이 달린 펜이 마라의 전부였어. 세속의 얼룩은 자끄 루이 다비드의 붓이 지워버렸지. 그는 잔인했던 마라를 약자에 대한 자비심을 가진 혁명의 순수한 순교자로 프랑스 국민에게 돌려주었어. 환상은 진실을 오염시켰고 몇 조각 남은 온전한 기억들도 지하실에 갇혔단다. 세상은 핼러윈 파티 같았어. 호박 등을 든 마녀처럼 잘린 목을 든 확고한 신념가들이 음습한 거리를 배회했어.  



프레리알 봉기(1795.5.20-상 퀼로트 투쟁을 묘사)



누가야, 너의 실망에 대해 아직도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어. 섣부른 위로가 변명이 될까 봐 두렵기도 해. 얼마 전 고시원에서 고독사 한 젊은 친구의 컴퓨터에서 이력서가 100여 장이 발견되었다고 했을 때, 엄마도 울컥했단다. 홀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쓰고 지우고 제출하고 낙담했을까! 그 친구도 행여 상속해 줄 재산이 없는 부모를 원망했을까? 사회 어디에도 내가 앉을  의자가 없다는 건 시속 300km로 자존감이 추락하는 거니까. 세상에 홀로 내팽개쳐진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하니까. 아무리 자신을 펴 보려 해도 꾸깃꾸깃한 자아의 주름은 더 깊게 파이게 될 거야. 18세기 말 프랑스 국민들도 이렇게 웅크리고 쭈그린 끝에 자기 파괴적이 되었던 것 같아. 하지만 터널에도 끝이 있단다.


테르미도르 반동이라고 해. 네가 퇴근 해 돌아오면 프랑스혁명이 어떻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는지,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누가 실천했는지, 무엇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자존을 회복했는지 들려줄게. 어서 오렴. 시원한 수박화채를 해 놓고 널 기다리마.


PS : <마리 앙투와네트>라는 영화가 있네요. 오해가 많았던 그녀를 다소 따뜻한 눈으로 바라본 짧은 장면이 있어 올립니다. 감상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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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노라_음악과 문학과 역사의 숨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풀며 엄마와 딸이 알콩달콩 수다 중입니다. 6월에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도서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