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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 | ARTLECTURE

당신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

-에피메테우스의 열 번 째 질문-

/Artist's Studio/
by youwallsang
Tag : #죽음, #사유, #타인, #자연, #풍경
당신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
-에피메테우스의 열 번 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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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노승복, <풍경이 된 몸 BODYSCAPE>, 디지털 비디오 설치, 8분36초, 2017
생생화화生生化化 2017 이면 탐구자 展(2017.12.15.~2018.3.25.), 경기도미술관

색채와 형태로 감정을 그려내고, 본적 없기에 존재 또한 의심되는 세상을 눈앞에 펼치고, 마치 그것들이 지금까지 우리 곁에 계속 있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굴어도 더 이상 놀랄 일이 아니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만들었고, 존재를 의심케 했던 것들의 의심도 거둬갔다. 부정하는 것을 일부러 드러내고, 외면하는 것을 집요하게 꺼내기도 한다. 모두에게 평등한 죽음은 타인을 통해서만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죽어가는’ 자신은 마주할 수 있지만 ‘죽음’을 맞이한 자신만큼은 바라볼 수 없다. 예술이 추측으로 가늠할 수 없는, 지나친 상상으로 불편해질, 절대 마주할 수 없는 풍경을 마주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풍경이 된 몸>, 디지털 비디오 설치, 836, 2017


 

“...시작한 지 얼마나 됐어요?”


전시장의 영상 작품은 언제나 제때를 맞추기 힘들다. 종일 전시장에 머무르는 도슨트조차도 매번 같은 장면만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관람객이 언제 불쑥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영상 앞에서 일시 정지하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 자체 짜깁기(!)’로 영상을 이어보게 된다. 리모컨을 소유하지 못한 영상 관람은 상영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들여야 한다. 미술관은 편히 보라고 의자를 내어주지 않고,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볼 시간을 주기보다는 다른 작품과의 동선을 고려해 서로 방해하지 않고 잘 피해 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영상의 구성 의도와 상관없이 관람자의 등장 시간에 따라 영상은 시작이 아닌 곳에서 재현된다. 이런 불편함을 무릅쓰고 영상을 처음부터 공들여 감상하는 관람객을 만나면 도슨트는 조용히 뒤 켠으로 자릴 옮긴다.



 <풍경이 된 몸>, 디지털 비디오 설치, 836, 2017


 

병풍처럼 둘러선 5개의 화면으로 경기도 안성의 배밭이 펼쳐진다. 50여 년의 시간을 넘기며 일구고 가꿔온 풍경은 바람 소리 하나 없이 적막한 가운데 느리지만 뚜렷한 차이를 보이며 계절을 통과한다. 흙냄새가 질펀하게 풍기는 땅의 어딘가로 연둣빛 싹들이 밀려오면 세상은 빈틈없이 꽉 들어찬 생명의 그릇이 된다. 낮은 배나무들이 흰 꽃을 매달고 무심히 견디면, 한 알 한 알의 열매들이 시간 속에서 영글며 그 사이사이로 숨골을 틔우듯 사람들의 환한 얼굴이 지나간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면서 세상은 하나로 비벼져 반짝거린다. 그러다 계절이 돌아 하얀 천으로 덮은 듯 세상이 둥글게 묻히면 어스름한 윤곽 위로 자연의 구경꾼이 살금거리며 지나간다. 땅이 민낯을 드러내고, 바람골이 트여 듬성하게 결을 흩으면, 모든 높낮이가 수평으로 다듬어져 불쑥한 언덕들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풍경이 된 몸>, 디지털 비디오 설치, 836, 2017



그것은, 느닷없고 갑작스레 솟아오른 무덤이다. 이름을 잃고 땅이 되어 아직은 그 흔적을 채 지우지 못한 무연고자의 무덤이다. 과수원 주인은 타인의 무덤에 손대기를 삼갔고, 이름 없는 무덤을 그대로 둔 채 땅을 일궈 과수원을 꾸렸다. 산 자들이 다지고 일군 땅은 조금씩 밟혀 아래로 낮아지고, 죽은 자의 육신은 그대로 남아 아무 노력 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봉긋하고, 두리뭉실하며, 뜬금없는 자국들이 그렇게 풍경 속에 자릴 잡았다. 산 자는 움직이고 죽은 자는 붙박혀 서로를 보듬는, 삶과 죽음이 맞닿은 풍경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자신의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자유로이 그리고 기꺼이 쳐다보지 못한다. 다만 자신이 죽을 가능성을 때때로, 혹은 마지못해, 흘긋 쳐다볼 수 있을 뿐이다.

-<죽음과 죽어감 On Death and Dying>,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창비

 

<풍경이 된 몸>, 디지털 비디오 설치, 836, 2017


 

의 풍경 속에서 관람객들은 취한 듯 유쾌한 얼굴을 보인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다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얼굴이다. 그러나 찬 바람의 계절이 닥쳐와 거둬간 생명의 자리들만이 바스락거리는 풍경을 마주하면, 차마 쳐다볼 수 없어 하나둘씩 자리를 뜬다. 더구나 불쑥 솟은 무덤의 이야기마저 듣고 나면 마지못해라도 쳐다볼 마음조차 사라지는 듯하다. 젊음은 너무 멀어 감각되지 못하고 늙음은 너무 가까워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죽음은, 말이 되지 못한 무형無形의 유형流刑이다. 볼 수 없는, 보고 싶지 않은,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러나 눈물 나는, 결코 내 것이 아닌, 아니고픈.



 아나 멘디에타, <실루엣 untitled from the Silueta series>, 1980

 


내 몸에 기반을 둔 작업은 풍경과 여성의 몸 사이에서 대화를 가져온 것이예요. 내 몸이 자궁(자연)에서 찍혀져서 나왔다는 사실에 나 자신은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내가 하려는 예술은 우주에 나를 합치려는 결속력에 의해 재배치되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아나 멘디에타, 대지-, 조각. 퍼포먼스, 1972~1985> 카달로그

-<예술에서 위안받은 그녀들>, 유화열, 예술문화, 2011

 

대지와 몸은 오랜 태곳적부터 하나의 의미로 서로 묶여왔다. 위대한 탄생의 신이며 죽음과 재생을 관장하는 지모신은 대지의 어머니로 추앙받아 왔고, 서구의 기독교도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으며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아나 멘디에타(1948~1985)의 경우 지모신과 자신의 신체 사이의 교감을 주제로 여성의 몸을 대지와 동일시했다. 대지는 그녀의 흔적을 받아들이고 치유하며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생명현상의 총체적 기반이다. 상처는 대지 위에 각인되고 드러나 무한한 자연의 힘으로 치유되고 재생된다. 노승복의 <풍경이 된 몸> 또한 대지에 스며든 흔적으로서의 신체에 관한 영상이다. 어쩌면 이미 수많은 몸들로 이루어졌을 땅에 관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곳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며 시간이 흘러 이름도 없이 납작하게 누워있을 땅이다. 그저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워 점점 굴곡이 사라지는 자신의 몸뚱이를 탄식 없이 바라볼 장소다. 바람이 돌아눕던 허리께가 낮아지고, 비가 고이던 다리 사이가 평평해지며, 불쑥 올라왔던 가슴뼈가 갈려 나가는 자리다. 대지에서 찍혀져 나온 생성물로서의 신체-아나 멘디에타-와 대지에 더해져 풍경을 이루는 신체-노승복의 <풍경이 된 몸>-. 매 순간 더해지고 빼지는 대지의 가감加減 사이에 인간이 있다.

 

생은 죽음을 먹으며 자란다. 수확의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죽은 자의 처소가 자릴 잡고 있지만 왁자한 소리들에 부딪혀 죽음은 또 저만치 멀어져 간다. 매일 끌어안고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리 떼어 둘 수도 없는 것. 영상 속의 대지는 신체의 굴곡을 껴안고 평평하게 삶을 다지고 있다. 내가 결코 볼 수 없는 것, 화려한 묘석도 잊히면 돌무더기에 불과한 시간의 위용 앞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보며 그 의미를 톺아본다. 어느 한갓진 겨울날,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갈 고라니의 발가락이 날카롭지 않기만을 바라며.


“...이제 끝난 건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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