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전부였던 중세 시기를 거쳐 그 이후 과학이 어느 정도 발달한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신체는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신체는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고 고귀한 정신이 인간의 정수라는 인식이 팽배한 시기도 있었지요.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신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초기 버전은 독일 한 의사가 치료법을 위해 그린 인간의 목차가 기재된 논문입니다.
<Wound Man>, 15세기 추정 (출처: https://publicdomainreview.org)
사람의 신체 곳곳에 각종 무기가 꽂혀있고 텍스트가 함께 적혀있습니다. 흩어져있는 문구들은 수술을 하나의 기술로써 구체화했고 부위별 특정 치료법을 나타냅니다. 당시 의료계에 중요한 지식이자 기록이었던 셈이지요. 한편으로는 치료할 거리로써 부상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X-ray는 1890년대 중반에 건강 진단 장비로서 도입이 되었습니다. 이온화된 방사선에 신체를 노출해 X-ray가 뼈를 통과하며 사진의 판 위에 기록되는 이미지입니다. 이어 전자현미경의 도입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경지까지 볼 수 있게 되는 신체와 세포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관행에 따라 바라보았던 신체를 새로운 인식적 틀로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좌) 도로시 호지킨 기념 우표, (우) Vitamin B12 3d Molecular structure
도로시 호지킨(Dorothy Mary Crowfoot Hodgkin)은 X-ray 선회절법에 의한 생체물질 분자구조 연구를 통해 페니실린과 비타민12의 결정구조를 밝혀내면서 신진대사에 대한 작용을 규명해냈습니다. 당시 고전적 방법만으로는 더 이상 크고 복잡해지는 분자의 구조를 확인할 수 없던 시기에 호지킨은 엑스선 결정학이라는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여 그 한계를 뛰어넘었던 것입니다.
(출처: http://indexgrafik.fr)
영국의 디자이너와 아티스트가 모여있던 The Festival Pattern Group은 호지킨의 구조결정체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에 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벽지, 직물, 실내 용품, 넥타이 등에 그 패턴이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크리스탈 구조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아방가르드한 패턴이 1950년대 디자인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디자인과 과학 사이의 상호관계가 풍부하고 생산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바입니다.
보는 것을 통한 지식은 시각을 현실화하는 기술이 가장 효과적이었고, 이러한 시각 기술에 대한 수요는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두드려졌습니다.
디지털 전환은 과학과 의학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주로 텍스트를 중심으로 화면에 보이거나 출력하는 것이 전부였던 컴퓨팅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그래픽으로 렌더링하는 데 더욱 능숙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과학, 건강 및 의학에서 시각 효과의 역할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임신 후 태아의 상태를 확인하는 초음파 사진이 의학적, 과학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문화적, 감정적, 도덕적 심지어 지역적인 의미까지도 갖게 된 것처럼요.
김한겸 <Sea of Cloud> (출처: 갤러리 류가헌)
의사이자 작가인 김한겸은 인체의 모든 것은 모두 피사체라고 말하며 최초로 세포 현미경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현미경 속 세포, 조직, 결정체를 포착하여 상상하는 세계를 입혀 작품을 만드는데 이것은 주로 제거된 암, 종양, 염증 같은 조직의 세포들이고, 간혹 발굴된 미라의 간에서 찾은 기생충 알을 사용할 때도 있습니다. 아주 작아서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 몸의 일부를 최소 12배에서 4,000배까지 확대하여 작품을 만듭니다. 현미경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세계를 이미지로 구현하여 새로운 감각을 확장하고, 현대의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여 예술 영역에서도 하나의 모티프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소리를 발생시킵니다.” 생명과 소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즉 소리는 생명체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세포가 만들어내는 소리를 채집하고 편집해서 음악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작가가 있습니다. 작가 Psients는 생명의 가장 기본단위인 세포, 그중 우리에게 익숙한 효모가 내는 미세하고도 풍부한 소리를 전자 신호로 바꾸어 이를 다시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의 형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연주가 가능한, 살아있는 음악 재생장치가 되는 셈이지요.
Psients – EP <Signal> (출처: 작가)
특수 제작된 바이닐 레코드 안에는 음원으로 활용되는 효모가 배양되고 있습니다. 전시 동안 세포가 증식되는 형태, 변화하는 색깔도 하나의 관람 포인트였습니다. 작품 공간에는 마치 심장박동과 비슷한 질감과 박자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세포의 패턴을 모티브로 하는 프로젝션 영상 빛이 조응하여 또 다른 미생물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Psients x Jeffrey Kim <Signal>(2022), 파라다이스 아트랩 페스티벌 (출처 : 작가)
과학적 이미지는 우리의 인식적 틀이나 문화적 맥락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특히나 최근에는 점점 과학적 이미지가 예술과 혼재되고 있습니다. 과학적 이미지는 실재를 포착하는 객관적인 기계로 기능함과 동시에 인간의 시각을 확장하고, 인식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인간의 신체가 도구가 아닌 완전한 생명체로서 순환하고, 생산하고, 의식하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나아가 신비하고 위대한 소우주임을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