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ndscape- 창덕궁 후원
박병일 작가의 수묵풍경이 주는 담담함이 좋은 이유는, 우리가 무심히 걷는 이 도시의 이야기를 가장 서정적인 방법으로 펼쳐내기 때문이다. 홍매화를 시작으로 살구나무와 산수유가 만발한 성정각의 봄, 부용정 옆 푸른 소나무의 여름, 붉은 단풍이 비치는 관람정의 가을, 그리고 화면 가득 눈 덮인 옥류천의 겨울로 재창조된 창덕궁 후원에는 바람이 일고, 그 미풍은 넓은 화폭을 오가며 완벽한 파노라마를 이룬다.
그는 최근 숨_토피아 전시에 창덕궁 후원을 14m의 대작으로 구현해 냈다. 숨토피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세계-현재 우리의 사회 안에 존재하는 현실화된 유토피아적 장소-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 ‘숨의 공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물론 작가가 제시한 장소는 우리에게 숨_토피아적 장소일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의작업이 주변에서 조우한 것들로부터 파생되었듯이, 우리 각자의 숨_토피아도 너무나도 당연하게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작가는 상기시키는 듯하다. 일상에서 만나는 장소에 대해 새롭게 질문하고 낯설게 바라보는 것을 통해 늘 마주했던 그 공간이 이제 숨-토피아로서 기능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과 마주한 시간은 작가의 힘을 실감케 하는 경험이었다.
작품에 대한 호감은 작가에 대한 관심과 상상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작가와 작업은 얼마나 닮아있을까? 그가 바라보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궁금해졌다. 오롯이 물과 먹으로만 만들어 낸 풍경들이 태어나는 곳,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박병일작가 작업실-
Q. 최근 전시주제가 숨_토피아(sum_topia) 이였죠? 저는 그 전에도 작가님 그림을 보면서 ‘도시 속 무릉도원’의 느낌을 받았거든요(웃음). 숨_토피아는 무슨 의미일까요?
전시 제목인 <숨_토피아>는 두가지 의미로서의 숨과– 들이쉬고 내쉰다는 의미의 숨, 라틴어로 ‘있다’, ‘존재하다’라는 의미인 숨(sum)- 이상향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의 합성어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세계를 말합니다. 일상에서 숨의 공간은 어디일까요? 저는 도시를 둘러싼 산들, 고궁들 그리고 거리 곳곳에 심어둔 가로수 등 도심 속 자연의 공간을 숨의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제 작품 속에는 이러한 공간이 비워 둔 여백으로 나타나죠. 저는 이 숨의 공간이 우리 자신만의 유토피아가 되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주제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Q. 그렇다면 작가님 작업에서 숨(breath)은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요. 숨(breath)이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breath’는 숨 혹은 호흡의 의미로 빌딩 숲으로 빼곡한 도시의 숨통을 트여주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여백은 동양 미학의 백미로 채움의 번잡함을 포용하죠, 저는 숨 막히는 도심 속에서 그 여백을 찾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빌딩숲 사이사이를 작은 굵기의 ‘여백 선들’로 처리했죠. 하지만 전통 산수화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 작품을 본 많은 분들이 먹색이 편안하고 따듯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작품 속의 담담한 먹색 기운과 현대 도시의 시끄러운 요소들을 중화시키는 여백 표현이 도시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떻게 공감하느냐에 따라, 낯설어질 수도 혹은 친숙해질 수도 있는 것이겠죠. 삶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삶의 장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곳이 곧 유토피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런 장소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가 바로 숨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landscape-테헤란로
Q. 그렇다면 작가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landscape 연작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도시의 풍경은 저에게는 일상의 공간입니다. 삶의 터전인 동시에 감정과 시선을 이끄는 풍경들이 전부 보여지기 때문이죠. 옛 문인들이 산수자연을 바라보며 심미체계를 담았던 것과 같이 저는 도시 서울의 풍경을 보며 사유하는 것이죠. 현재 인왕산 중턱에 살고 있어 그곳을 걷다 보니 인왕산 일대를 담은 풍경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저도 그랬지만 조선시대 겸재도 그러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웃음) 늘 지나다니며 무심코 바라보니 교감이 더해지고 익숙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화폭에 담게 되는 것 같습니다.
landscape-63빌딩 / landscape-롯데월드타워 / landscape-삼성동
Q. 도시의 랜드마크를 주로 작업하셨는데, 최근 창덕궁 후원을 14m 대작으로 그리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갑작스러운 코로나19로 인해 마땅히 갈 곳들이 없어졌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랜드마크적 공간을 찾아다니며 지금까지 작업을 해왔는데 이런 공간들이 없어진 거죠. 그래서 고민하게 되었고, 도심 속 숨의 공간이면서 여백이 많은 장소는 어딜까 생각하다 찾아낸 곳이 궁이었습니다. 다행히 서울의 궁은 입장 제한은 있었지만 문을 닫지는 않아서 자주 찾는 장소가 되었죠. 특히 창덕궁 후원은 서울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에요. 창덕궁의 후원은 영문명처럼 정말 시크릿 가든이더군요.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산중 같은 곳이었습니다. 후원을 관람하고 문을 나오면서 들리지 않던 도시의 소음이 갑자기 터져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던, 숨겨졌던 존재들을 드러냄으로써 자연의 미감에 대한 인간의 감성 뿐 만 아니라 숨-토피아로서 궁이 간직한 다양한 사유를 시각적으로 풀어 보고자 했습니다.

Q. 작품 속 이미지가 물에 비쳐 반전되는 의도가 무엇인가요?
작품에서 전통적인 수묵화를 그리는 이유와 함께 현대수묵화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창덕궁후원을 그리다 관람정의 연못 반영이 주는 이미지가 여러 의미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에 계절의 변화가 그대로 반영되기도 하지만 미세한 파장의 변화에 따라 달리 보이는 점을 관찰하게 되면서 작가의 심상을 투영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반영을 작품에 넣게 되었습니다. 특히 향원정의 경우는 마침 공사중이라서 상상을 더욱 극대화 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의 윗부분은 원형의 장소로써, 정지된, 각인된, 기억된 공간이라면 아래 반영으로 표현된 부분들은 현재의, 미래의 작가적 심상이 투영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landscape-향원정
Q. 작품에 대해 듣다 보니 제작 방식이 궁금해집니다.
저는 ‘느릿느릿 걸으며 스케치하기’야말로 자연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감상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작품 제작 과정 역시 서두르지 않습니다. 우선 스케치해 온 풍경을 보며 현장에서의 여러 감흥들을 떠올리고 정리된 기억들을 바탕으로 화면의 밑그림으로 구성합니다. 그리고 점의 형태로 붓을 운용하여 동일한 형태로 반복해서 그려나갑니다. 수많은 점들이 쌓여 도시풍경이 되고 산수풍경이 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물의 표현을 기존의 세로획에서 가로획으로 변화를 주니 작업과정을 찍어놓은 영상에서는 마치 프린터가 이미지를 복사하듯 점의 표현이 마치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단위인 픽셀처럼 보이더군요. 그리고 행위에서도 기계적이고 반복적 노동이 마치 저의 삶과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림 노동자의 삶이랄까요.(웃음)
Q. 작가님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자신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향은 말 그대로 누구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 같아요. 저의 작품이 각자의 기억과 추억을 환기시키는 장치가 되어 내적인 관찰의 시간, 자신만의 유토피아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를 희망합니다. 제가 기꺼이 화구를 들고 나가 풍경을 담는 이유입니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 작가로서의 꿈을 말씀해 주세요.
그림으로 놀 줄 아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제가 먹과 화선지로 표현하고 있는 풍경을 통해 ‘수묵으로 사유하는 매력’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저는 좋은 작업,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어떻게 보냈느냐에 따라 결과도 바뀌어진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모여 결국 온전한 저를 만들어 가겠죠?
박병일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매일 겪게 되는 반복적 일상 안에 숨겨진 소소한 특별함에 대해 말하는 하나의 장치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한발 물러서서 관조하듯 ‘같음’ 안에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들이니 그의 작품이 도시의 회색숲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어울러져 더욱 조화롭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작가소개: 박병일작가는 동국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일상풍경에 내재된 심미적 공간 표현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breath>이라는 주제로 내가 살아가는 도시 공간속에서 숨의 공간 찾는 작업을 하였고, 2011년부터 현재까지<Landscape>시리즈의 작업을 진행중이다. 화선지 위에 수묵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있으며, 도시건축물을 표현하는 블록형태의 미점준을 사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발전시켜왔다. 서울, 부산, 베이징에서 11회의 개인전을 하였으며 현재 코로나19로 변해버린 우리들의 삶의 공간에서 보여지는 여러 경험들 또는 사건의 풍경들을 수묵으로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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