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건 항상 재밌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가 모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고, 몇몇 종교들이 제시하는 종말론, 휴거론에서 나아가 사람들은 그 이후를 상상하게 됐다. 공룡이 멸종됐듯 우리에게도 언젠가 그런 일이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 등장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이 세계관은 단순히 소설이나 공상과학영화를 넘어, 게임이나 예술작품의 세계로 넘어왔다.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좀비 아포칼립스, AI 아포칼립스 등 다양한 세부 장르를 만들 수 있으나, 오늘 이야기할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그것들보다는 더 귀여운(?) 내용이다.

<Rbnks, They tryin ta tire me!>

<Rbnks, The hand that feeds>

<Rbnks, A ship like this can make you lose a little bit of hope>
'Rbnk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디지털 아티스트 'Ruben Kos'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을 기반으로 그곳에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익숙한’ 것들을 배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특징이라고 한다면, 배경은 사막이나 외딴곳이다. 그곳에는 건물이 하나 있는데, 웬걸? 어디서 많이 본 것들이 있다. '구글(Google)', '페이스북(Facebook)', '레고(Lego)' 등 유명 회사의 로고와 상징부터, ‘슈퍼마리오((Super Mario)’, ‘미키마우스(Mickey Mouse)’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들도 눈에 띈다.

<Rbnks, Keep Your Chin up and Your Expectations Down>

<Rbnks, Last year I was a trainwreck, now I'm just a mess>
그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에서 한때 자본주의의 상징이자 현대 문명의 상징이었던 것들은 건물의 재료, 혹은 그것을 꾸며주는 부속품으로 남아있다. 여기서는 어떤 거창한 의미를 찾지 않더라도 괜찮다. ‘자본주의가 결국 몰락할 것을 그린 거다’, ‘현대 문명의 상징을 볼품없게 만듦으로써 그 본질을 비꼰 거다’ 등의 화려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낯선 곳에서 익숙한 것을 만났을 때 환희를 이 작품에서 느끼면 좋을 것 같다.

<Rbnks, Go promote yourself and tattoo it on your butt>

<Rbnks, Trust the power within>

<Rbnks, Eternal consumption Engine>
세상을 우울하고, 나 말고는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끝없이 고독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에서 저런 건물들을 만난다면 마치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아프리카 여행 중에 곤란한 일을 겪었을 때 만난 한국인 정도? 그게 나에게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마음의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작품으로 봤을 때는 약간의 유머러스함까지 느껴진다는 사실이 디지털 작업들을 더 좋아하게 만들어준다.
Rbnks의 인스타 팔로워는 11월 10일 기준 11만 7천 명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이 작품들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다. 기분 전환 혹은 공부를 위해 전시회를 직접 찾는 것도 좋지만,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이맘때 집에서 그의 작품을 하나 띄워두고 술 한잔하며 감상하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