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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장커(Zhang Ke Jia), <강호아녀>(Ash Is Purest White) | ARTLECTURE

지아장커(Zhang Ke Jia), <강호아녀>(Ash Is Purest White)

-흘러가는 시대는 초라한 뒷모습을 남긴다-

/Art & Preview/
by 박정수

지아장커(Zhang Ke Jia), <강호아녀>(Ash Is Purest White)
-흘러가는 시대는 초라한 뒷모습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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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사회의 변화 속에서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향방 또한 극단적인 상층부와 하층부로 갈라졌다. 마을을 주무르는 인맥과 폭력적이지 않은 위법으로 수완을 챙길 것이냐, 아니면 변화한 세태를 부정하고 폭력을 일삼다가 사회의 구석으로 격리되느냐가 1990년대 갈림길에 선 '강호아녀(조직에 속한 남자와 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를 다룬 시대극을 지아장커 감독이 <강호아녀>라는 신작으로 펼쳐낸다.

“동이 트면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유령들은 교회 무덤으로 돌아갑니다. 자살로 십자로에 묻힌 사람들과 물에 빠져 죽은 저주받은 영혼들은 동이 트면 그들의 비참한 모습이 들킬까 두려워 이미 구더기들의 소굴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빛을 피한 자들이니 영원히 검은 이마를 지닌 밤과 어울려야만 합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1990년대,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전통적인 계획경제 제도에서 시장경제로의 대전환을 이룩한다. 시장경제로의 전환 이후 중국은 대대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뤘으며, 개인은 본인의 능력을 통해 더 많은 부를 취할 수 있었다. 한편 급격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은 도시, 지역 간의 빈부격차를 낳았고, 개인은 국가 대신 기업, 조직에 헌사하게 되었다. 또 대도시에서는 도드라지지 않지만, 낙후된 작은 도시에서는 특정한 카르텔이 지방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경제개방 이후 마을을 지탱하던 사업들이 대도시로 유출되자, 이에 낙후된 지역의 인민들은 필연적으로 조직의 경제활동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한편 이러한 조직은 불법 범죄 활동을 일삼다가 90년대 이후 재빠르게 기업화를 시도한 사례가 많아서, 국가와는 별개로 자신들만의 위법적인 규칙을 설정하였다. 물론 범죄 활동에 대한 엄격하고도 준엄한 처벌 정책인 '엄타'에 의해 카르텔들은 폭력을 전면에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들만의 룰은 일련 남아있었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 불법, 폭력을 일삼던 조직들의 경우 90년대에는 대체로 온건한 방향으로 회유하였지만, 한편 이 같은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여, 2001년 3.16 특대 폭탄 테러와 같이 분란을 일삼는 조직도 있었기에, 이 같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향방 또한 극단적인 상층부와 하층부로 갈라졌다. 마을을 주무르는 인맥과 폭력적이지 않은 위법으로 수완을 챙길 것이냐, 아니면 변화한 세태를 부정하고 폭력을 일삼다가 사회의 구석으로 격리되느냐가 1990년대 갈림길에 선 '강호아녀(조직에 속한 남자와 여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역사를 다룬 시대극을 지아장커 감독이 <강호아녀>라는 신작으로 펼쳐낸다.     





1970년 산시성, 휀양 출생의 지아장커 감독은 중국 6세대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의 작품 초기, 2000년대에는 왕 샤오슈아이와 함께 현실에 밀착한 사실주의로 중국을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스타일이 바뀐 2010년대 이후에는 로우예, 디아오 이난 등과 함께 사회 비판적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장르 영화의 문법에 결합했다고 평가받곤 한다. 어쩌면 이러한 전향이 그가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존경하는 선배 감독인 5세대의 천카이거와 닮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아장커가 좋아하던 <황무지>의 리얼리즘의 경우 그의 다큐멘터리 작품들이나 <스틸 라이프>, <24 시티> 등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을 접목한 리얼리즘 픽션에서 나타난다. 그는 롱숏 및 익스트림 롱숏을 사용하여, 공간 속에 놓인 인물들을 조망한다. 그의 작품에 항상 기용되는 부인 ‘자오 타오’를 제외한 대다수의 배우가 비전문 배우들이기에, 그들의 실제 삶과 배역은 분간이 어렵다. 지아장커는 실제로도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과 경험을 숭고하게 여겼으며, 그들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밝힌 바 있다. 어렸을 적 철도 근처에 살았던 지아장커는 왕래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던 유년기의 기억을 다큐멘터리의 시선이나, 픽션에 등장하는 소시민들의 초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연출에서 포착되는 바는 격동적인 90년대의 변화다. 인민들 스스로가 원치 않은, 국가가 강제로 집행한 폭압적인 변화, 이에 저물어가지만 그런데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잿빛 초상들을 담아낸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로 이러한 리얼리즘 대신, 장르적인 드라마로 변화를 선언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패왕별희>를 기점으로 대중 친화적이다 못해, 선전적인 영화만을 만들던 천카이거의 변절이 연상되곤 한다. 특히 <산하고인>의 마냥 낙관적으로 그려지는 미래는, 그간 문제들을 고발하고 드러내던 지아장커의 치열한 의식이 퇴보했다는 평가를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대중적인 색채로 선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역사, 사회에 한해선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이 역력하다. <천주정>에서는 중국의 발전 속에서 생겨난 부패와 문제점들을 느와르, 무협극의 색채로 버무려낸 작품이다. 허무맹랑하고 가상적인 폭력을 보여주던 장르 영화의 문법은 지아장커의 손에서 대단히 현실적인, 인민의 삶에 맞닿아 있는 폭력이 되고, 무협극을 연상케 하는 카메라 구도는 이에 대항하여 영웅화된 인민들을 포착하는 양식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장르적인 문법, 무협극으로의 전환은 개혁개방 이후 그가 즐겨봤다는 <영웅본색>, <첩혈쌍웅> 등 홍콩 영화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역사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 <산하고인> 역시 미래 파트가 비판받긴 하지만, 과거와 현재에 있어선 서구가 형성해놓은 세계원리에 무작정 승차하려는 역사적 폐해가 고발된다. 이러한 지아장커는 여전히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이어간다. 본 작품 <강호아녀>에서도 지아장커는 중국의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를 관통한다. 지아장커는 자신이 어렸을 적 우상으로 여겼던, 조직의 '강호'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 평범하다 못해 초라한 아저씨로 변해버렸던 자전적인 시선과 기억을 옮겨오고자 한다. 그는 부득이한 좌절과 실패를 겪은 사람들의 인생에도 존재하는, 지금은 초라하지만 한때는 거대했던, 주체성을 지탱한 그 힘을 밝히고자 한다. 지아장커는 이러한 강호의 시대를 총 3막 구성을 통해 펼친다. 이는 그의 바로 전작인 <산하고인>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구성을 취했던 것과 유사하다. 본 작품의 3막 구성은 개혁 개방이 막 시행되던 90년대, 경제개발의 명암이 드러나던 2000년대, 그리고 2017~18년의 오늘날을 담으며 한 세기의 번성과 쇠퇴를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구성의 1막에서, 흡사 어린 날의 지아장커가 바라봤을 법한 일상의 풍경을 다큐멘터리적으로 구현한 숏과 2막에서, 통계상으로는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이를 위해서 희생되고 소외된 사람들의 초상을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여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하는 건조하고 담담한 기록으로 구현한다. 이를 통해 전문 배우들이 기용되어 초기 색채가 거의 사라진 <산하고인>이나, 소시민들의 삶을 구현하긴 했지만 중화권 장르의 색채가 더욱 가미되어 영웅을 그려낸 <천주정>에서, 현실의 거울을 자처한 초기 스타일로 회귀하고 있다. 대체로 긴 호흡을 지향하는 시퀀스나 롱테이크, 때때로 활용되는 핸드헬드도 현실의 흔들림과 잘리지 않은 시간을 일부 구현하며 리얼리즘을 강화한다. 이렇게 대체적으로는 지아장커가 최근 물색하는 장르적 색채에 초기 스타일을 뒤섞어 리얼리즘과 생생한 역사성을 고찰하려는 듯 보이지만, 아예 전면 2000년대의 연출로 회귀한 것은 아니다. 바로 전작 <산하고인>에서 탐구한 화면비의 전환이 본 작품에서도 활용된다.     


<산하고인>에서의 화면비가 웨스 앤더슨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처럼 시대성을 지칭하는 양식이었듯이, 본 작품에서도 시간을 드러내는 양식이라 할 수 있지만, 거대하고 보편적인 시대성 대신, 보다 개별적이고 미시적인 상황에 집중하며 화면비 전환을 사용한다. 일단 영화의 시작은 1.33:1이다. 지아장커는 도입부에서 버스를 타고 있는 비전문 배우들의 초상을 이제 막 잠에서 깬, 순박한 아이의 눈동자로 바라본다. 잠에서 처음 깨서 보게 된 풍경은 다름 아닌 강호가 지배하는 작은 마을의 풍경, 그 좁다란 화면비에 강호의 기억은 꽉 빽빽하게 채워지고 기억돼 아이의 인생 전반을 좌우하리라. 이윽고 1.33:1에서 2.35:1로의 전환이 일어난다. 1.33:1이 조직 구성원들이 탑승한 버스라면, 2.35:1은 조직 사회를 넘어선 더욱 거대하고 널따란 세계다. 이윽고 2.35:1에서 1.88:1의 화면비로 축소되어 차오와 빈이 몸담은 황홀하고도 감각적인 조직 사회를 포착한다. 하지만 길게 지속하지 않고, 이윽고 똑같은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낙후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차오를 비출 때, 2.35:1로 확장되어 사용된다. 조직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진, 흡사 지아장커 유년기를 투영한 듯한 1.33:1의 시선, 이러한 지역의 폭력 조직들이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보다는 널따랗고 보편적인 1.88:1의 화면비, 하지만 더욱 거대한 변화가 2.35:1의 화면비로 물밀듯 닥쳐온다. 그리고 1.88:1이나 1.33:1의 화면비론 돌아가지 못한다. 이러한 화면비 변화는 초반부에 집약되어 나타나, 개혁개방과 엄타 정책이 활발해진 이후에는 아예 2.35:1로 고정된다. 그리고 본 변화는 <산하고인>과 달리 그 전환을 쉽게 의식하기가 어려운데, 어쩌면 이는 강호아녀들의 운명과 닮아있다.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변해버린 현실, 이러한 시대상 속에서 이전에 추구해왔던 것을 고집하려다 도태되고 유령이 되는 그 현실이 말이다. 이러한 화면비는 단순히 시대성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을 지칭하기도 한다. 좁은 화면비는 버스 안, 술집, 기지, 등 조직 구성원들만이 놓인 실내에 상응했다면, 넓은 화면비는 조직보다 거대한 마을, 도시, 국가, 세계를 담아낸다.   




   

이처럼 영화는 안과 밖의 대비가 도드라지며 이를 통해 '그들만의 세상'에 갇혀있는 조직의 쓸쓸한 퇴락을 지켜본다. 영화의 전체에 거쳐서 차오는 비교적 외부로 향하는 자요, 빈은 내부에 놓이는 자다. 1막에서 차오는 고향을 방문하여 아버지를 찾아가고, 2막에서는 빈을 찾아가는 자라면, 빈은 대체로 그녀를 기다리며 실내에만 놓이는 모습이 대다수다. 차오는 황홀하고도 쾌락적인 조직 세계에 마냥 파묻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변화도 똑똑히 목도한다. 차오의 고향은 석탄 산업으로 각광받았던 마을이지만, 석탄에서 석유로의 전환 및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체제로 이행되고, 국유화에서 민영화됨에 따라 마을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협받는다. 차오는 여전히 마을에 남은 아버지의 쓸쓸하고도 초라한 뒷모습과 마주한다. 그래서 빈에게 권총 사용법을 익히고, 실제로 이를 발사하며 엄타하는 시대와 다른 방향으로 조직의 구성원으로 거듭나지만, 더 이상 조직이 이전 같을 수 없음을 깨닫는 인물이랴. 하지만 빈은 다르다. 언제나 자신을 보스로 떠받들어주는, 휘황한 조명이 반짝이고 술과 춤에 도취할 수 있는 내부에만 놓여있다. 어쩌면 이렇게 내부에만 갇혀있는 조직의 퇴락은 예견된 것이리라. 다만 그 내부에서도 변화는 목도되고 있다. 구성원들은 더 이상 의리를 추구하는 조직의 규율이나 이전 시대의 도덕에 따라 진실을 고백하지 않는다. 물신화, 배금주의에 의해서 한 개인의 선함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극의 초반부, 빚을 진 구성원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더 이상 조직의 규율이랄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제 역할을 못 한다. 돈은 그 모든 가치를 자신의 발아래에 둔다. 이렇듯 영화의 안과 밖의 대비는 시대성을 드러낸다. 이전 시대는 나름의 낭만이 있었고, 돈이 전부는 아니었던 시대다. 빈의 보스는 새로운 시대에 발맞춘 사업을 진행함과 더불어, 효율이나 합리성에서 벗어난, '그저 좋아서' 무용수들을 기용하여 춤을 배운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는 최후까지 이러한 꿈을 실현하라는 듯, 인생의 결말을 무용수들이 발랄하게 장식한다. 하지만 자본에서 잠시 이탈하여 나름의 꿈을 꾸던 보스는 죽어 장례식을 치르고 있고 여기에 참석한, 이전 시대를 상징하는 전족을 하고 가마를 탄 여인은 이제 늙어서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져간다.     


이전 시대의 쓸쓸한 추락은 장례식, 죽음, 퇴장이라는 이미지로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새로운 시대는 보다 직접적으로 명시되고 있다. 당시 중국 정부가 실시한 엄타 정책이 바로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공안은 치안 유지, 질서 확립을 위해 불법적인 총기 소지에 처벌을 강화했다. 이에 총기를 버려야 한다는 대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시각적으로도 그렇다. 빈이 시가를 자르기 위해 조직원들에게 칼을 빌린다. 하지만 모든 조직원이 칼을 내놓아 첩첩이 쌓인다. 흡사 새로운 시대에 맞춰 이전 시대, 폭력의 잔재인 칼을 반납하듯이… 물론 마냥 정부에 의해 과거와 현재가 단절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앞서 1.33:1의 화면비 내에서 어린아이가 눈을 뜨자마자 강호들을 봤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시대가 변화하고 있어도, 그들의 뇌리에 돼야 할 대상, 넘어서야 할 대상은 곧 강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보스나 빈은 이러한 청년들에게 전복의 대상으로 여겨져 보스는 사망했고, 빈은 혼자서 잘 상대하다가 결국 숫자에 밀려 궁지에 내몰리고 만다. 조직을 제패하고자 하는 청년에게 중년으로 접어든 빈은 정복의 대상이요, 이에 맞서 총을 발사한 차오는 공안이 체포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러나저러나, 시대의 변혁기에 선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해도 좌절의 시간만이 기다린다.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은 전시된다. 교도소에 갇힌 차오는 능동적으로 볼 수 없다. 철창에 갇혀서 교도관, 면회객, 민중들만이 그녀를 선택해서 볼 수 있고, 차오는 그녀가 바라본다는 것에 선택권이 없다. 그녀는 바라보는 존재가 아닌, 바라보기를 당하는 존재다. 엄타 정책을 거스르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3막에서도 이러한 감시는 더욱 곳곳에 자리한다. SNS를 통해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고, 누구나 손에 든 스마트폰으로 도처를 촬영할 수 있으며, CCTV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감시당하지 않는 나는 어떻게 행동해도 좋다, 진정 자유롭다. 하지만 감시당하는 나는, 그 감시의 주체가 바라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 나의 행동 일거수일투족은 단속되어, 그들의 시선대로 규정되고 교육된다. 1막과 2막에서의 변화가 곧 조직을 넘어선 국가의 시선 강화요, 돈에 의해서 모든 것이 좌우되고, 심지어 일자리를 위해 부부까지도 갈라놓는 돈의 시선이었다면, 3막에서는 일상 곳곳에 더욱 치밀하게 자리한 시선을 오늘날의 변화한 시대성으로 지아장커는 진단한다. 





이렇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시대상에서 우리는 춤을 추고, 진정 내가 바라는 사랑이 가능할까. 2막에서의 사랑이 돈에 좌우됐다면, 3막에서 사랑의 불발은 이러한 시선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오직 1막에서 그들은 어떤 외부의 시선에도 굴하지 않는 사랑을 펼쳐냈다. 그리고 빈과 사랑하는 차오는 언제나 '나비'가 옷에 수놓아져 있었다. 중국에서 나비는 영원, 불멸, 금술의 상징이다. 차오는 빈과 변치 않는 사랑을 꿈꿨으리라. 언제나 채도가 쨍하고 따스했던 차오의 복식, 하지만 차오는 빈을 위해서 기꺼이 총을 발사하며 희생하고, 그 이후 그녀에게 봄은 도래하지 않는다. 교도소와 겨울의 차갑고 흰, 삭막하고 무감한 색채, 한때 영원함을 바랐던 그 순간은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 싸늘히 식어버린다. 영화는 이처럼 영원한 꽃을 바랄 나비가 바란 소망의 불발을 담아낸다. 2000년대 지아장커가 탐구하던 소재가 싼샤 댐 건설로 인해 거주지와 일자리, 그리고 사람들을 잃어버린 소외된 인민들이었다. 본 작품에서도 경제발전으로 인해 한때 나비가 꿈꿨을 영원의 불발을 꼬집는다. 내가 스스로 변화를 선택했다면, 이는 나를 탓하면 되리라. 하지만 영화 속 변화는 언제나 외부, 타인의 개입으로 일어난다. 2막의 도입에서 차오는 검은 옷을 입은 한 여인이 신분증과 돈을 도둑질해버려, '자신'을 잃게 된다. 한때 가족들에게, 조직원들에게 돈을 기꺼이 내줄 수 있었던 넉넉한 차오는 이제 일면식도 없는 결혼식에 참석하여 천연덕스럽게 밥을 먹는 처지로 뒤바뀐다. 이처럼 많은 것이 뒤바뀌었다. 차오가 빈을 위해서 선택한 인의는 자본에 의한 배신으로 뒤바뀌며, 몇몇 조직은 기업으로 선회했고, 엄타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폭력은 세 치 혀와 사기로 뒤바뀐다. 이러한 현실 속 차오는 일부 적응하듯 하면서도, 이에 적응하지 못해 '유령'으로 전락한다. 과거에 기록된, 먼지가 낀 자신의 신분증을 되찾고 벗겨내는 데 집중한다. 2막에서 현재의 변화에 의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이주민들과 달리, 과거를 향해 서성거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차오의 시선과 발걸음은 이들과 반대다. 자신을 배신하고 새로운 연인을 사귄 빈을, 핑계를 구실삼아 불러내며,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고자 한다. 현재의 정사는 돈이 좌우한다. 그녀가 발전소에 가기 위해서 고용한 기사는 자신의 아내가 돈을 벌기 위해 떠나가 못 본 지 오래되었다며, 그녀에게 정사를 요구한다. 더 이상 진정으로 좋아서 관계 맺는 사랑과 성교는 허상이다. 하지만 유령에게 의의를 찾을 수 있다면 이러한 부조리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이러한 자리에서 차오는 언제나 자취를 감추고 신속히 사라진다.     


이는 3막에서 빈도 마찬가지다. 돈을 벌기 위해 차오를 배신 했지만, 작금에 모아놓은 돈도 없고 심지어 하반신은 마비되었다. 현재에 타협하여 차오를 배신했던 빈은, 더 이상 현재에 집중하기 어려운 듯 과거의 고향과 차오에게 되돌아간다. 그리고 보스로서 자신이 가장 찬란했던 그 시기에 사고가 얽매여있어, 현재에 줄곧 불화를 일으킨다. 유령이 된다는 것, 이는 더 이상 현재에 머물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에도 파묻히지 못해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불화와 어긋남을 일으키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유령은 순수한 사랑을 바란다. 그래서 빈은 CCTV나 SNS가 더 이상 자신을 추적할 수 없는, 미지의 머나먼 저편으로 떠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에서 CCTV에 기록되는 차오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시선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가 어디로 갔을까, 그립고 찾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진실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이러한 '순수'를, 화산의 고열에 의해 새하얘진 화산재와 같은 삶을 그들은 바랐으랴. 영화 속 변화란 이러한 순수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 아닌, 그 모든 행선지가 일자리, 돈에 의해 결정된다. 차오나 빈은 여기에 저항할 수도 없이, 무력하게 끌려갈 뿐이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라 해도 일자리를 보장해준다면 상관없으며, 빈이 회장의 여동생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이러한 시대의 필연이랴. 무엇보다 화산이나 화로에서 고열을 통해 불태워져서 순수해지는 재란 죽음의 순수, 불태워져 이전과 같지 않은 순수를 상징하지, 살아서의 순수를 가리키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이 바란 순수란, 그리고 영원이란 결국 살아서 불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중국에서는 <강호아녀>라는 제목을 붙여 시대성에 더욱 치중하였고, 이러한 제목을 고스란히 가져온 한국에서의 주안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미권에서는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이 같은 제목이 결국 타인과 외부라는 불순물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생전에 나의 순수를 추구하기 어려운 사랑과 그것을 보여주는 화산재의 하양에 집중한 제목이랴.      


이렇게 지아장커는 <산하고인>에 이어 다시 한번 사랑 이야기로 중국의 역사를 써 내려간다. 분명 <산하고인>과 유사한 지점들이 있다. 화면비의 변화도 그렇고, <산하고인> 3막의 낙관적인 기대나 희망을 품은 것처럼, 본 작품의 2막 끝자락에서 UFO 내지는 유성이 나타나 쇠퇴한 마을의 어둠에 빛을 밝힌다는, 최후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그렇다. 다만 <산하고인>에 비한다면, 화면비의 변화가 가질 수 있는 시대성, 속성을 더욱 폭넓게 고찰하고 있으며,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극에 원숙히 녹여냈다는 점이 본 작품의 발전이랴. 또한 <산하고인>의 태평하다 못해 선전적인 미래에 비한다면, 나름의 빛을 바라본 이후에도 좌절이 연속되는 <강호아녀>의 희망은 그리 태만하지만은 않다. 더욱이 1막과 2막은 오랜만에 지아장커가 스크린에 풍부하고도 상세하게, 20세기 후반부터 변화해가며 소외된 소시민들의 초상과 여가를 생생히 녹여냈다는 점에서, 그의 이름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작가적 색채를 다시 한번 맛볼 수 있었다. 또 1막과 2막이 소시민들의 초상이었다면, 3막에서는 SNS와 스마트폰으로 인물을 담아내며, 2000년대와 달리 매체를 통해 생생한 시대성을 담아낼 방법을 모색한다. 이렇게 <천주정>과 <산하고인>에서 지워져 버린 그의 서명은 본 작품에 이르러 재생되어가고 있다. 다만 <산하고인>에서처럼 여전히 뒷심이 부족하다. <산하고인>과 <강호아녀> 양자 모두를 관통하는 뒷심 부족은 현재, 미래를 다루며 발생하곤 하는데, 어쩌면 그만큼 지아장커가 고찰하는 동시대성이나 미래의 분석이, 과거의 치열한 탐구에 비한다면 태만하고 무관심하게 느껴진다는 방증이랴. 단순히 내용뿐만 아니라 안과 밖의 대비, 화면비의 전환, 숏의 중첩 및 설계 등 이미지 자체로도 매력이 없으니 말이다. 역사와 과거, 그 속에서 소외된 소시민을 바라보는 그의 사려 깊은 시선을 다시 한번 입증한 작품, 또 장르성과 균형을 유지하는 그의 최근 실험이 완성되어감을 느낄 수 있음과 동시에, 다만 여전히 현재와 미래를 다루는 그의 시선에 우려가 공존하는 작품, 어쩌면 그 또한 영화 속 유령들처럼 익숙했고 즐거웠으며 향수 가득한 과거에 파묻힌 망령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 글. 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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