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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술은 가끔 물이 된다. | ARTLECTURE

살다 보면 술은 가끔 물이 된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 호안 미로-

/Picture Essay/
by 안노라
살다 보면 술은 가끔 물이 된다.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 호안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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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그가 사다리를 타고 가려던 곳이 어디였는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그가 당도한 곳엔 어둠, 지루함, 비난, 배고픔, 절망은 없었어. 그는 비참을 견디고 자신의 캔버스 위에 가볍고 활기차고 건강하고 희망찬 세상을 만들었지.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자신이 처한 현실에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세상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어....


오빠 친구 민기 알지? 왜, 엄마 생일에도 왔던 애. 어젯밤, 그 애를 만났대. 중학교 친구였으니 십여 년이 넘었겠구나. 민기가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가 심사위원인 비대면 면접을 봤다면서 장황하게 설명해 주더래. 엄마는 옛날 사람이어서인지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면접을 본다는 게 너무 낯설어. 그런데 그 면접 내용 자체가 얼마나 숨 막히고 무서웠는지 아직도 심장이 발랑 발랑 뛴다. 엄마가 면접 봤다면 벌써 탈락이야. 떨려서 키보드도 잘 누르지 못했을 것 같아. 면접을 봐야 하는 네게도 도움이 될 테니 오빠 얘기 전해 줄게. 일단 가슴을 진정시키는 그림을 먼저 보여줄게. 


 너, 이 그림 본 적 있니?



호안 미로 <달을 향해 짖는 개, 1926>



  

동화책 속에 들어온 것 같지. 무한하고 아득히 펼쳐진 공간에 먼 곳을 바라보는 개와 알라딘의 마법 양탄자처럼 붉은 방울을 단 희고 창백한 달이 있어. 화면 왼쪽엔 까마득한 사다리가 있네. 사다리의 끝이 닿은 곳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몰라. 우주 너머든, 상상 너머든 사다리는 지금의 이곳과 아직은 닿지 못한 미지의 공간을 연결하고 있지. 개와 사다리 사이에 숨겨진 '그리움, 향수, 불안, 동경, 외로움, 설렘'등은 어둡고 깊은 공간 속에서 웅크리고 있어. 그런데도 슬프거나 우울하기보다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느낌을 줘. 화제는 '달을 향해 짖는 개'지만 그림 속 개는 달을 보고 있지 않아. 개와 달은 똑같이 사다리를 보고 있어. 아니, '그 너머'를 보고 있구나.


  

이 그림을 그린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는 스페인의 자랑이자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야. 대체적으로 그의 그림은 어린아이가 몽당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처럼 단순하고 명확해. 색은 밝고 형태는 자유롭지. 선과 색과 형태가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알맞게 어우러져 묘하게 낯설면서도 익숙한 친밀감을 줘. 마치 검색어 순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단어를 모아 한 편의 발랄한 시를 쓴 것처럼 말이야. 그가 만든 공간은 왕따도 없고 리더도 없이 각자의 자유로운 경험과 주체적인 느낌이 완성해 나가는 예술 교실이지.





  

마음이 좀 편안해졌으니 사다리의 계단을 오르고 있는 민기에 대한 얘길 해 줄게. 너희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군대를 가거나 취직을 하는 건 모두 인생이라는 사다리의 다음 계단을 오르는 일일 테니 말이야. 

  

AI면접은 원하는 시간, 비대면 면접 프로그램에 접속 후 카메라를 빙 둘러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시키는 일로 시작했대. 그리고 컴퓨터에서 면접 문제가 출제됐지. 예를 들면 풍선을 최대한 크게 불도록 하는 거야. 터지면 0점이야. 어느 시점에서 터질지 모르니 터지기 직전, 최대의 크기가 언제인지를 판단해야 하는 거지. 너무 빨리 멈추면 점수가 작을 테고 욕심을 부리다 늦으면 풍선이 터져 버리겠지. 상황에 따른 판단력, 위험에 대한 보수성, 문제를 해결하는 추진력 등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여. 문제는 높은 점수만이 아니라 이 판단을 할 때마다 걸리는 시간, 수정 횟수, 무의식적으로 나타내는 인간의 표현까지를 컴퓨터가 모두 점수로 환산한다는 거야.  

  

카드 뒤집기 게임도 있는데 사과는 100점, 포도는 1000점이래. 사과 카드를 열 번 뒤집어야 포도 하나와 같지. 그럼 사람들은 가장 포도처럼 보이는 카드를 찍겠지. 하지만 포도로 알고 뒤집었을 때, 포도가 나오지 않으면 0점이야. 뭔가 잘못을 했거나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을 때의 표정과 그것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체크해 일관성, 거짓, 회복탄력성 등에 대한 점수를 매기는 거래. 엄만 다시 심장이 벌렁댄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기가 숨 가빠. 이제 과거의 경험이란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 싶어. 

  

엄만 풍선의 최대 크기가 지름 30cm였다면 15cm 정도부터 안절부절, 조마조마했을 거야. 그리곤 20cm쯤에 그만 stop을 눌렀겠지. 포도인 줄 알고 뒤집은 카드에 사과가 나왔다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다시 집중하는데 한참 걸렸을 거야. 그럼 엄마는 직장생활에 적당하지 않은 사람일까? 엄만 이십여 년을 한 직장에서 직장인으로 성실히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소심하고 추진력이 부족하고 남의 의견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



호안 미로 <무제, 1953>

  



느루야, 오빠의 얘기를 듣고 나서 이제 우리의 삶에 이런 그림이 가능한가 묻고 싶다. 무엇이지 모르는 그림, 아무런 목적도 의도도 없는 그저 인간의 무의식과 내면을 그리는 그림말이야. 저 빨간 동그라미는 해일까? 동그라미 아래 있는 모형은 별 같아. 해 아래 반짝이는 별은 우리의 상식밖에 존재하지. 수묵화처럼 번지는 검은 선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네. 길을 잃은 목동이 별에게 물어보듯 말이야. 이성의 아무런 간섭 없이 원시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작품을 느끼고 상상하기를 바랐다는 생각이 드는 이 그림의 제목은 <무제>야. 작품에 대한 최소한의 안내도 하지 않은 거지. 그저 "네가 느껴 봐. 무조건 네가 옳아." 하는 말이 들려. 

  

호안 미로는 "너 자신을 믿어." 하는 것 같아. 하지만 느루야, 엄마가 성장할 때도 지금의 너희들도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게 현실 아니니? 누가 그러더구나. 학창 시절 내도록 병아리처럼 닭장 안에서 사육해놓고 스물이 넘자 갑자기 독수리처럼 날아보라고 주문한다고 말이야. 어떻게 늘 암기만 하던 머리가 갑자기 창의적이 되냐고!

  

오빠의 심장에 전류를 흘려보낸 건 이 AI면접 내용도 있지만 그걸 전하는 민기의 말이었대. "너도 조금 있음 면접 볼 거 아냐.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하는 거니까 미리 이런 유형의 문제에 대해 연습해 보고 가." 하더라는 거야. 듣는 엄마의 눈시울마저 뜨거웠구나. 이 도시는 고등학교도 비평준화였어. 너네는 고등학교를 가는데도 시험을 봤지. 시험을 치를 때마다 누군가는 붙었고 누군가는 떨어졌어. 사회의 평가는 주로 승자의 노력과 재능에 집중하지. 그런 경쟁 속에서 친구를 걱정하고 함께 잘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애틋했는지 아직도 뭉클하다. 민기는 귀한 아이더구나. 그 아이가 사회에서 말하는 명문대에 다니지 않지만 오빠의 친구라는 게 누구보다 자랑스럽다.  

  

어제 오빠는 민기의 마음에 감동했고, 청춘의 배고픔과 외로움도 절절히 공감되더래. 그래 술이 물처럼 들어갔다는구나. 하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을 가야 하고, 군대를 다녀와야 하고, 졸업을 하기 전 취직을 해야 하고, 그 사이사이 재수생의 시절, 취준생의 시절이 간절기처럼 끼여 있으니 어찌 스스로 초라해지지 않겠니? 




호안 미로 <농장, 1921~22>



  

그런 오빠랑 민기를 보고 이 그림이 생각났어. 미로가 사랑하고 또한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작품 <농장, 1921~22>이야.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농장 풍경이지. 미로는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이 <농장>에 매달렸어. 그것도 파리에서 연 전시회에서 단 한 점도 팔지 못하고 다시 고향으로 온 시기였으니 당시 그의 마음은 두엄 밭이었겠지. 그는 매일 아침, 몬트로이그의 시골 농장에서 보드랍거나 마른 흙, 꼬물거리는 달팽이, 바람에 서걱대는 옥수수 잎 등을 세심히 관찰하고 가장 카탈루냐다운 표정을 잡아내려 했어. 

  

하얗고 동그란 달이 떠 있으니 지금은 밤이겠지. 농장은 고요해. 나뭇잎조차 침묵하고 있어.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유칼리나무는 땅과 하늘의 주인이야. 미로는 화면 곳곳에 건축적인 설계를 숨겨 놓았는데 전면의 고랑은 기하학적으로 분할되어 있지. 화면의 양쪽을 구성하는 삼각형과 사각형이 조화를 이루고 중앙엔 마름모꼴을 한 붉은 타일이 있어. 타일 뒤 발자국을 따라가면 물 긷는 우물터가 나와. 시선을 잇는 건 우물 뒤 제자리를 돌며 방아 찧는 노새야. 오른쪽 수탉과 토끼, 염소는 자연의 생명력을 의미하겠지.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들이니까. 채소와 곡물들은 제자리 없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음으로 이질적인 선명함을 드러내. 그는 농장에 있는 이미지들을 제각각의 표정으로 묘사했어. 모두 주인공처럼 말이야. 

  

그건 실패를 견디기 위한 처방이었지. 제각각 모두 주인공인 카탈루냐의 자연을 바라보며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자신을 확인했고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단다. 그 자신감을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던 세기적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야. 어느 화랑도 구매하지 않아 파리의 한 카페에 전시되어 있던 이 작품을, 마침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파리에 있던 헤밍웨이가 우연히 보고 반해버렸단다. 뒷이야기로는 헤밍웨이가 돈이 부족하자 출판사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선결제를 부탁해 거금 5000프랑을 들여 구입했다고 해. 작품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예술가의 자존감을 북돋운 이 일이 미로에게 큰 힘이 되었지.  

  

혹 누군가는 "왜 남의 인정을 받으려고 해." 또는 "남 신경 쓰지 마."라고 말하지만 엄마는 다르게 생각해. 인간이 사회 속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데 타인의 인정은 자존감 형성에 큰 요소야. 사회적 평가가 그를 이름 지우는데 어찌 신경 쓰지 않고 살 수 있겠니? 그렇기에 어떤 비난에도 날 믿는 사람이 하나만 있으면 자살은 하지 않는다고 하잖아. 사려 깊은 친구의 진심 어린 인정은 인생을 살아가는 든든한 버팀목이지. 오빠와 민기가 서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게 크나 큰 힘이 되듯이.




호안 미로 <어릿광대의 사육제, 1924~1925>



  

오빠는 동영상 수업 마치고 아르바이트 갔단다. 엄마가 예전처럼 직장을 다닐까 싶은 때가 오늘 같은 날이야. 오빠의 빈 책상을 보며 위로 삼아 이 그림을 찾아본다. <어릿광대의 사육제, 1924~25>는 미로가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 그린 작품이야. 

  

먼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형상이 있는가 살펴보자. 중앙에 악보가 있네. 댄스화를 신은 음표에 맞춰 여럿이 춤을 추고 있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파이프를 물고 있는 어릿광대야. 보라색과 붉은색의 분장을 한 얼굴에 긴 수염이 악보에 맞춰 휘날려. 전통적으로 어릿광대를 상징하는 격자무늬 옷에 어울리지 않게 표정은 우울해 보여. 어릿광대 앞에는 개미의 몸통과 나비의 날개를 가진 생물이 주사위 위에 있지. 잠들지 않는 눈, 춤추는 아메바, 실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 테이블 위의 물고기가 개연성도 통일감도 없이 펼쳐졌어. 모두 비현실적이지. 오른쪽 상단의 창은 열려있구나. 창살 없는 푸른 하늘엔 검은 태양과 뾰족한 에펠탑이 있네. 에펠탑인지 어떻게 아냐고? 미로가 말해주었거든. 배고픈 파리에서 허기진 창을 열면 매일 에펠탑이 보였다고. 

  

이 그림을 그리던 시기, 그는 배고픔과 싸우고 있었어. 하루 종일 건포도 한 줌을 먹거나 빵 한 덩이가 고작이었어. 껌을 씹으며 배고픔을 달랜 적도 많았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경기는 나빴고 그림은 팔리지 않았거든. 게다가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에게 배고픔은 더 쓰리게 오는 법이지. 그가 허기에 지쳐 선잠을 자면 스스로도 환상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무한히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이 펼쳐졌대. 그는 빵 대신 물감을 사 꿈속 풍경인 이 그림을 그렸어. 화면 왼쪽에 <달을 향해 짖는 개>에서도 보인 사다리가 있구나. 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맛난 음식이 있을 거라는 즐거운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꿈을 스냅사진처럼 옮겨 놓았을까? 




호안 미로 유네스코 벽화 중 <달 혹은 밤, 1955~58>

   


  

그가 사다리를 타고 가려던 곳이 어디였는지는 모르지만 마침내 그가 당도한 곳엔 어둠, 지루함, 비난, 배고픔, 절망은 없었어. 그는 비참을 견디고 자신의 캔버스 위에 가볍고 활기차고 건강하고 희망찬 세상을 만들었지.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또 자신이 처한 현실에 고개 숙이지 않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세상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어. 


  

그는 고집스러웠고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어. 그는 환상이 가득한 <어릿광대의 사육제>를 기점으로 당시 화단의 거센 바람이었던 입체파와 야수파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룩하게 돼. 상형문자처럼 실체의 본질적 특징을 압축한 기호와 상징의 세계를 구현하지. 그건 초현실주의와는 또 다른 결을 갖는 부분이야. 유네스코 벽화작업을 비롯 회화, 판화, 조각, 도자기 등 자신의 상상을 극대화시킨 작품을 계속 창작했어. 양 눈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오로지 나만의 예술세계를 구현하겠다는 고집이 새로운 영역의 문을 열은 거지.


  

느루야, 인간이 보던 면접을 AI가 대행한다면 평가하는 지표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겠지. 의심할 여지없이 아빠 찬스, 엄마 찬스 모두 없을 거야. 대신 고효율을 내는, 우수한 사원을 모델로 설정한 평가기준이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겠지. 개인의 특성은 무시될 수도 있어. 예측컨대 태도를 측정하는 정성평가는 미약해지고 능력을 평가하는 정량평가는 세밀해질 거야. 아직은 엄마도 어떤 기준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할는지, 공정하다고 느낄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바라건대 자기를 믿고 자신의 평가기준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호안 미로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꾸준히 그 길을 걸었으면 좋겠구나. 그 길을 걸을 때, 격려하고 응원하는 친구가 있으면 더욱 좋겠구나. 오십이 넘어 엄마가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았듯이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것이 인정받는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 그런 사회를 우리가 만들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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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안노라_역사를 그림으로 푸는 안노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