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비롯한 각종 생산 활동이 끊기고, 미술계 역시 폐쇄적이고 시니컬한 기류를 피할 수는 없었다. 5년 만에 개인전으로 복귀하는 작가 김주원은 전시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을 통해 회의적인 감정의 흐름을 이어간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담은 이야기를 특유의 영상 시놉시스의 구성을 통해 들려준다. 신작 영상과 함께 하나로 묶이는 전시 공간에는 작가가 경험한 시대적, 혹은 개인적 무용함이 한 공기로 흐른다. 전시는 어느 때보다 무기력에 대한 공감대가 높은 요즘, 강도 높은 관람에 대한 강박 없이, 같은 공기를 항유하는 무언의 공론장과 같았다.
1) 무기력한 손짓, 아카이브 인트로
전시가 열리는 두산 갤러리 초입의 윈도우 갤러리는 두산아트센터 전체의 입구이기도 하다. 이는 ‘쇼윈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번 ‘김주원 개인전’에서는 쇼윈도 안에 강한 앰프 사운드와 포스터를 설치해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이라는 메인이벤트로 관람자를 ‘호객’한다. 라디오 포스터와 절대 나른하지 않은 스테레오 사운드는 평화로운 갤러리 앞 노상 카페 테이블에 전시의 분위기를 끼얹는다. 마치 이 전시는 평화롭고 이상적이기보다는, 무기력하거나 더 현실적인 것이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바깥의 ‘호객 사운드’를 뒤로하고 입장한 실내에는 또 다른 기류가 흐르는데, 낮게 울리는 공사 소리를 배경으로 다 무너진 서류 파일과 스틸 이미지들이 흩뿌려진 채 관객을 마중한다. 〈실패한 다큐멘터리 #001(토치카 에디션)〉는 이번 전시와 동명인 메인 영상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을 압축한 하나의 아카이브이다. 작가는 평소 인테리어 현장 소장으로 일하며 현장 보수가 필요한 ‘하자 시설’을 모두 기록하곤 하는데, 이번 전시는 이 기록에서 출발한 총체적 아카이브이다. 무너진 아카이브 파일 더미 사이로 보이는 ‘보수 정보 자료’ 이미지는 마치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 현장 브리핑을 보는 듯 허망하다. 평화로운 낮과 어울리지 않는 쇼윈도의 사운드, 그리고 다 무너진 현장 자료는 신작 영상의 일부분, 그리고 영상의 기조를 잇는 전시 전체의 예고편과 같다. 전시장 안쪽, 커다랗고 어두운 스크린은 사운드에 적응해가는 관객을 인도한다.
김주원, 윈도우 갤러리의 〈탬포러리 보더 AM!〉 중 일부, 2020, TBAM 포스터 #001/#002, 폭스홀 라디오 포스터, 스피커, 앰프, 스테레오 사운드, 가변크기
사진: 주예린 (직접 촬영)
김주원, 〈실패한 다큐멘터리 #001 (토치카 에디션)〉 설치전경, 2020, 오프셋 인쇄, 아시아식 접지, 무선철, 145x195mm 사진 200부 한정인쇄
사진: 주예린 (직접 촬영)
2)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 4시간의 해체 프로세스
망가진 현장을 보수하고, 쓸 만한 새 공간으로 바꾸는 인테리어는 생활 밀접하며 가장 실용적인 분야 중 하나일 것이다. 처음 리뉴얼하는 현장을 답사한 후, 공사의 전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4시간짜리 영상 아카이브는 무용한 것이 쓸모를 찾는 장대한 대장정을 담을 것만 같다. 훌륭한 현장 기록 영상은 총 네 개의 파트로 나뉘며 각 파트는 공사의 진행 단계에 따른 최소한의 구분 단위로, 작가가 모은 수많은 기록 이미지와 영상의 조합이다. 파트의 구분 단위인 assemble 1-4의 시작은 모두 카메라가 켜지며 현장으로 향하는 여정의 시작을 담는다. 파트가 진행될수록 건설적인 모습을 찾아갈 것으로 기대되는 공사 공간은, 이상하게 점점 부서지며 해체된 모습으로 변해간다. 파트 1에서 4로 가며 해체되는 기록 영상은 ‘공사의 역순’으로 진행된다.
작가는 자신이 담당한 건물의 리모델링 전 과정을 뒤로 감아버린다. 무너지는 공간이 중계되며 ‘생활 가능한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인테리어 본래의 기능도 함께 무너진다. 분명하고 실용적인 인테리어 고유의 목적은 전시장으로 들어오며 전복되고, 관람자가 실용적 프로세스가 사라지는 과정을 목격하며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아이러니는 ‘무용하고 허망한 기류’를 형성한다. 김주원의 서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이 지점에 개입한다.
전시와 영상의 제목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은 김주원이 군 복무 시절 구상했던 글의 제목에서 가져온 것이다.”(1) 영상의 중간 등장하는 텍스트는 과거 본인이 구상한 소설의 설정과 구성을 재구성한 것으로, “2004년 GP의 통신병으로 근무하며 핵폭발 이후의 종말적인 세상을 담은 시놉시스”(2)를 포함한다. 군사 방어기지를 의미하는 ‘토치카’는 전시에는 적과 아군의 경계선 역할도 하며, 이곳에 머무르는 병사들은 “언제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죽음을 끝없이 기다리게”(3) 된다. 텍스트는 절망의 최전선에서 전쟁의 목적, 미래에 대한 계획을 모두 상실한 인물의 시각을 반영한다. 무기력한 소설 텍스트 위로 공사상황과 무관한 듯 보이나 어딘지 공허한 이미지, 그리고 8~90년대 록 음악이 교차하며 허망한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공사상황 중 발견한 ‘하자 있는 벽’, ‘구멍 난 천장’, 또는 ‘누군가 버리고 간 성모상’ 스틸 샷 위로 밴드 너바나(Nirvana)의 ‘Nevermind’가 흐르고, “오늘은 세상이 진짜 끝장난 것 같은 날씨입니다. 오, 눈앞의 풍경도 그렇습니다.”라는 텍스트가 병치되는 식이다.
*‘토치카(tochka)’는 ‘점’이라는 뜻을 가진 러시아어에서 유래하며, 각종 화기, 관측 장비 및 지위 시설, 거주 시설 등을 갖춘 군사 기지를 가리킨다.


김주원,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 (파트1-파트4〉 중 스틸 샷, 2020,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240분
사진 3, 4: 두산 갤러리 제공
사진 5: 주예린 (직접 촬영)
소설에 기반하고 음악을 얹어 분위기를 조성하는 영상은 얼핏 극적 구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영상 속에는 별도의 의도된 시간 순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4시간의 장대한 여정은 철저하게 ‘현실의 시간 역순’을 따라가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누구인지 또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영상에 등장하는 텍스트는 오로지 ‘무기력한 감정’을 자아내기 위한 것이며, 4개의 파트에는 기승전결이 없어 관람자가 어느 순간에 영상을 목격한다 해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부담 없이 흘러가는 각각의 텍스트와 음악, 그리고 이미지 뒤에서 작가는 소설가, DJ, 그리고 이미지 큐레이터로서 영상을 총괄한다.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의 구성은 일종의 실시간 스트리밍 비디오와 유사하다. 작가는 흘려보내며 편하게 소비하지만 나름 시대적 분위기를 빠르게 포착, 반영하는 비디오 채널의 호스트, BJ, 혹은 큐레이터의 모습으로 관객을 맞는다. 소설의 문체를 한 텍스트와 록 음악에 취해 ‘레트로 감성’이 오를 즈음, 현실의 공사장 소리가 감상을 치고 들어온다. 이 전시는 결코 ‘능동적이기 어려운’ 상황을 회피해 낭만을 찾으려는 시도가 아니며, 현실에서 일어나는 ‘무기력한 경험’과 감정선을 놓지 않는다. 추억 속 음악과 현실감을 깨우는 사운드, 그리고 힘이 빠지는 이미지가 모여 불편하지 않은 선에서 힘 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어두운 스크린, 낮게 깔리는 사운드는 메인 영상과 〈실패한 다큐멘터리 #001(토치카 에디션)〉를 한 흐름으로 묶는다.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은 높은 집중을 요구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철거의 과정을 함께하며 ‘동시대적인 고민과 무용함을 공유’하자는 작가의 제안이며 하나의 쉘터(shelter) 같은 공간이 된다.
적극성을 띠기 어렵고, 미술인들,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도 예외이지 않은 ‘고립된 시기’를 지나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최희승 큐레이터의 말을 빌리면, “침체된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한다. 현장 관람문화가 끊겨가는 요즘,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은 편안하게 ‘내려놓고’ 푹 한숨 쉬어보며, 현 상황을 돌아보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오랜만에 복귀한 김주원 작가의 개인전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은 10/21일까지 두산 갤러리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1)두산갤러리, 「《84번 토치카에서 보낸 1년》 전시 리플렛 중」, (두산갤러리 서울, 2020)
(2)두산갤러리, 위의 글, (두산갤러리 서울, 2020)
(3)두산갤러리, 위의 글, (두산갤러리 서울,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