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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온라인] | ARTLECTURE
  • 광희문, 수구문, 시구문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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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소개

광희문(光熙門)은 한양도성의 동남쪽을 지키던 문으로, 숭례문(崇禮門)과 흥인지문(興仁之門) 사이에 건설되어 조선시대 도성의 동쪽 밖으로 드나들던 백성들의 주된 출입구였습니다. 백성의 삶과 밀접하게 닿아 있는 문이었기 때문에 한양도성의 다른 어떤 문보다 많은 별칭으로 불렸던 문이기도 합니다.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는 의미로 광희문이라 명명하였으나 수구문(水口門)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불렸고, 구한말에는 ‘시체를 옮기는 입구(屍口門)’라는 험악한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6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차례 훼철의 위기를 넘기며 버텨온 광희문에는 문의 여러 이름만큼이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각각의 이름에 얽힌 광희문의 특징과 역할,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도성의 동남쪽 작은 문(小門), 광희문의 역사와 변화상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동남쪽 소문(小門), 광희문을 세우다

 

1396년(태조 5) 광희문은 도성의 동남쪽 소문(小門)으로 건설되어 흥인지문과 개천(開川)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돌로 쌓은 육축 위에 단층의 목조 문루를 세웠는데, 중층 문루를 가진 숭례문, 흥인지문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창의문, 혜화문 등 도성의 다른 단층 문루들과 비슷한 규모이다. 문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시대 광희문은 일반 백성들이 주로 사용하던 문이었다. 도성 동쪽으로 나가는 왕의 행차는 대부분 흥인지문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광희문으로 드나들었던 경우는 드물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했을 때 한양으로 진격해 온 적군을 피해 남한산성 피난에 나섰던 왕의 가마(大駕)가 광희문을 통해 나갔던 일이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

 

 

 

무너지고 옮겨지다

 

1711년(숙종 37) 2월 광희문 개축改築 공사가 시작되었다. 광희문의 관리를 맡았던 금위영(禁衛營)에서 공사를 담당하였으며, 이듬해 4월까지 육축을 다시 쌓아 홍예문(虹霓門)을 만들고 좌우 문짝을 새로 달았다. 그러나 문루는 추후에 조성하는 것으로 미루었다가 8년 뒤인 1719년(숙종 45) 2월, 비로소 완성된 문루에 편액을 새로 써서 걸었다. 일제강점기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퇴락한 광희문은 192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훼철이 결정되어 문루가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인 1966년에는 퇴계로 연장공사로 육축만 남은 광희문의 철거가 결정되었다가 보류되었고, 주변 성벽의 일부가 철거되었다. 1975년, 광희문의 육축을 해체하여 원 위치에서 남쪽으로 15m 옮긴 자리에 이전·복원하고 멸실되었던 문루를 새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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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문, 물길이 만나는 곳


광희문의 또 다른 이름은 수구문(水口門)이다. 『태조실록』에 “동남은 광희문이니 속칭 수구문이다(東南曰光熙門俗稱水口門)”라고 기록함으로써 수구문이 광희문의 또 다른 이름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도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開川이 오간수문五間水門을 통해 성 밖으로 빠져나가고, 남산에서 발원한 남소문동천(南小門洞川)은 이간수문(二間水門)으로 흘러 성 밖에서 개천과 합류하는데, 광희문의 위치가 이 두 수문과 가까워 수구문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광희문은 본래의 이름보다 수구문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이로 인해 1457년(세조 3)에 세워졌다가 1469년(예종 1)에 폐지된 남소문 南小門을 광희문으로 혼동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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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문으로 불리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 및 도성 주변에 묘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도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성 밖으로 내보내야 했는데, 도성의 동쪽에 무덤을 조성하기 위한 대부분의 장례 행렬이 광희문을 통해 나갔다. 제대로 된 장례 행렬만 나갔던 것이 아니어서 길에서 죽은 연고 없는 시신이나 처형된 시신도 이 문 밖으로 버려졌다. 이에 광희문은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屍口門)이라 불렸다. 조선 후기 광희문 주변은 몰래 묘지를 쓰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였고, 고종 연간에 이르면 인접한 구릉에 묘지가 빼곡히 들어찬 모습이 되었다. 특히 1902년 광희문 밖에 일본 거류민을 위한 화장터가 생긴 후 광희문 밖 일대는 ‘신당리 공동묘지’라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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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례 풍경 속 광희문


시구문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광희문은 과거 우리 조상들의 장례 풍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상·장례 절차를 소개하는 영상과 함께 관련 고문헌, 그림, 상여장식 등의 유물이 함께 소개된다. 관람객들은 이를 통해 광희문을 통해 드나들었던 옛 장례 풍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Accepted  2021-04-13 11:43

*This program is subject to change by the Organizer's reasons, so please refer to the website or the Organizer's notice for more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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