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Facebook

Artlecture Twitter

Artlecture Blog

Artlecture Post

Artlecture Band

Artlecture Main

세계와 나 사이 | ARTLECTURE

세계와 나 사이

-에피메테우스의 마흔한 번째 질문-

/Picture Essay/
by youwallsang
세계와 나 사이
-에피메테우스의 마흔한 번째 질문-
VIEW 90

HIGHLIGHT


나와 세계 사이에 핸드폰이 있다. 우악스레 아우성치는 이 기계는 손과 한 몸이 되어 모든 것을 물리치고 몸을 독점한다. 혹시 세계를 장악하기 위한 어떤 음모의 도구가 아닐까 의심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오래된 이야기 속에는 세계와 우리 사이에 책이 있었고, 영화가 있었으며, 신문이라는 12면짜리 종이가 있었다. 많은 작가가 신문이라는 매체에 달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이유와 방식으로 그들은 신문을 붙잡는다. 지우고 오리고 긁으며 신문에 매달린다. 지금의 내게서 핸드폰을 지운다면 세계와 나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최병소, <무제 0231211>, 2023)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이라고 했다. 베를린에만 수천 개가 있다고 한다. 나치에 의한 희생을 일상 공간에 끼워 넣은 역사적 기억의 작업이다. 그는 자꾸만 걸음을 되짚게 만드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 같은 작가다. 심야의 심심한 문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작가를 처음 보았다. 구석에 한가득 쌓아둔 모나미 볼펜 깍지들과 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 그 존재를 과시하던 신문이 그의 주변을 메우고 있었다. 그저 가성비 좋은 도구로 작업한다며 껄껄 웃던 작가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리고 이름도 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SNS 카드 뉴스에 그의 부고가 올라왔다. 생소해진 이름, 그러나 익숙한 볼펜, 먹먹한 어둠. 살비듬처럼 올라온 수피樹皮 형상이 그 이름을 다시 불러왔다. 시간은 연신 탑을 만들고 또 다시 그 이름을 가뒀을 무렵, 목적 없이 찾아간 갤러리에서 다시 마주쳤다, 최병소.

지나간 하루의 종이 위를 내달리는 꼭꼭 눌린 펜 자국을 바라보며, 반복되어 쌓이는 일상의 단단함을 마주했다. 앞뒤를 잊은 채 손에 힘을 주며 일어서는 하루를 보았다. 새카맣게 타서 어떤 양분養分도 남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불쏘시개로 서 있겠다는 결연한 흑칠이었다. 만지고 싶었다. 쓰다듬어 결을 재워 눕히며 다독여주고 싶었다. 고단함이 바람처럼 서성였다.




 (성능경, <난센스 미술>, 1989, 신문 구두약)



미술관 벽 위로 검게 늘어진 휘장처럼, 줄 선 창문처럼 검은 사각형이 구석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바닥에는 크지 않은 까만 상자 하나가 놓여있다. 신발 한 켤레를 넣을 수 있을까 싶은 속 깊은 상자. 매일 생사를 걸고 전투를 치른 기사가 성으로 돌아와 그저 한 번의 지친 숨을 몰아쉬고 매일 밤 뒤집어쓰던 <어둠의 상자 -어슐러 르귄 단편 >를 닮았다. 모든 것을 감추지만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어둠, 끝없이 반복해야 하는 무한전투의 운명.

한 인간의 뜨거운 발을 품었던 신발 위를 미끄러지며 핥던 검은 구두약으로 작가는 신문을 꼼꼼하게 메웠다. <난센스 미술>은 단색화가 장악하고 있던 당대의 미술계를 향한 단단한 한 걸음이다. 으스대며 어깨를 휘젓는 허세를 향해 일상의 고됨과 나날의 성실함으로 다져진 작가가 보내는 커다란 웃음이다. 우리의 언어는 빈곤해서 우스운 것이 아니라 허세를 떨어서 우스운 것이다. 는 통역해야 할 외계어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으로 곱씹어 번역되는 곁엣말이다.

 


 

(수미 카나자와, <신문지 위의 드로잉>, 2025)



무대의 장막처럼 너울지는 어둠 위로 별들이 무수하게 반짝인다. 도대체 어디서 온 빛일까, 다가가면 10B로 칠해진 신문 위의 은하銀河. 반들거리는 흑연이 너울지는 면을 따라 일렁거리며 빛을 발한다. 군데군데 신문 기사들이 희뿌윰하게 드러나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을 만들며 빛을 발한다. 한 줄의 기사가, 한 면의 광고가, 지난날의 날씨가 과거로부터 당겨져 미래를 향해 날아가 빛을 뿌린다. 재일교포 3세인 작가는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만들어진 세상에 던져져 새로운 은하계를 찾는다. 신문 속에 세상의 모든 빛이 담겨있다. 매일의 나날을 채우던 작은 사건 사고들이 차곡차곡 쌓여 짙어진다. 하루의 시간은 반복되는 흑연 밑으로 쌓이며, 지치지 않는 지층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로 빛이 떠돈다. 세상의 별들은 그렇게 태어났다.

 



성능경, <신문읽기>, 1976)



한때 신문의 여기저기가 사라지던 시절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독재 시절에도 신문은 지워지고 뜯겼다. 한 장 종이가 뭐라고 권력은 그토록 집요하게 간섭했을까. 그런 폭력으로 만들어진 텅 빈 자리가 그들의 잘못을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들어올리기도 어려울 만큼 너덜너덜한 신문을 들고 마주한 얼굴이 어쩌면 더 민망하고 부끄럽지는 않았을까. 신문의 모든 활자를 다 읽는 것도 아니고, 다 믿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그악스럽게 굴어야 했을까. 오히려 눈에 띄는 부재를 통해 존재의 강렬함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진정 몰랐을까.

 


최병소, <무제 0241029>, 2024



세상과 나 사이에 핸드폰이 끼어들기 전 신문은 일상과 살을 부비던 면이었다. 그날의 일들을 기록하고 지난 일들을 곱씹고 미래의 희망을 노래하고 닥쳐올 불행을 예고했다. 어떤 작가는 핍진한 수행修行의 노동으로 종이의 식물적 본태本態만 남기고 전부를 지워나갔다. 어떤 작가는 그물처럼 신문을 도려내 물고기가 아닌 생각의 상처를 건져 올렸다. 또 어떤 작가는 세상의 모든 소식이 담기는 그릇에 시간을 한 획씩 눌러 딤아 깊은 밤하늘을 창조했다. 어둠이 짙어서 빛은 더욱 빛났다.

대학 3학년, 나는 인천행 전철에서 신문을 팔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전철의 신문팔이는 낯설지 않았기에 용기 있게(!) 팔았다. 심지어 첫날엔 신문값도 모르면서 팔았다. 하나의 전철에 두 명의 신문팔이가 없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호된 값을 치르며 배웠다. 그때 나의 신문은 다른 이들보다 먼저 동이 났다.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여도 덜컹거리는 전철 칸에서 목소리를 돋우며 신문을 팔던 내가, 퍽이나 안 돼 보였나 보다. 그들은 기꺼이 조간을, 석간을, 스포츠 신문을 사주었다. 누구는 그 신문을 꼼꼼히 읽을 작정이었고 누구는 안쓰러운 마음에 바닥 깔개라도 할 요량으로 신문을 사주었다. 무거워지는 동전과 가벼워지는 하루가 맞바꿔졌다. 어떤 신문을 읽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기도 했다. 신문을 펴면 생겨나는 품 안의 삼각 공간은 오롯이 그/그녀의 영토였다. 사설과 만평, 그날의 운세를 헤아리며 하루의 녹진함은 풀어졌다. 다 읽은 신문을 반듯하게 접어 뒷사람을 위해 머리맡 위 칸에 올려 둘 때, 그 따스함으로 하루의 잘못은 용서받았다. 하찮은 종이, 일상의 보잘것없음으로 우리를 극진히 감싸던 구겨진 신문지는 내가 쓰지 않은 그날의 일기였다. 그들과 나 사이에 신문이 있었다. 매일의 글자가 박힌 신문의 행간을 읽으며, 쓰이지 않은 진실을 상상하던 우리가 있었다. 세계와 우리 사이에 신문이 있었다. 그래서 예술은 신문을 사랑한다.


all images/words ⓒ the artist(s) and organization(s)

☆Donation: https://www.paypal.com/paypalme/artlec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