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 2007, 50*50, 장지에 채색, 성남문화재단 성남큐브미술관 소장
무성한 존재들 사이로 풀보다 더 선명한 푸르름이 끼어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기에, 무성한 야망 없이, 철저한 계산도 없이 그저 놓인 그 자리에서 수직으로 고개를 내미는, 찬란한 슬픔. 수더분한 초록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러본다. 호명되는 그 순간 사라지고 말, 짧고 덧없는 자리, <내 자리>. |
첫 눈길은 그랬다. 꼭 맞게 떨어진 정사각의 화폭 속에 빼곡히 자리 잡은 먹빛 풀. 아직 모르지만, 누구도 부르지 않은,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 조금은 거칠고 신산스러운 풀들을 바라보며 각각이 가진 다양한 질감에 눈이 머문다. 모든 색을 품었다는 먹빛 속에 정작 풀빛은 없고, 윤곽을 띄운 배경 속에 푸르름이 자릴 잡고 있다. 자국 하나 없이 발린 안료의 명징함이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화폭 위의 풀들은 경직된 듯 움찔거린다. 인간만이 저 속에서 잡초를 가려낸다지. "난 자리 죽는 자리"라고, 장소도 이웃도,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삶이라, 그럼에도불구하고 찬란할 삶이라. 생生의 전부를 오직 수직으로 세워 올린 의연함이라니. 돌려세운 눈길 끝에 숙연함마저 느껴진다. 젊음의 치기일까, 반항의 거침없음일까, 그도 아니면 눈물겨운 현실의 타격감일까. 멍처럼 여울지는 감상이 제자리에 오롯이 고인다.
<정주 공간_기약된 장면>, 2024, 60.5*72.5, 장지에 수묵 채색
시간이 흐른 뒤의 눈길은 어디에 머무르나. 제 이름을 부르는 식물들이 뒤로 물러서며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세밀한 먹빛의 붓질 위로 아삼삼한 더께가 낀 듯, 미간을 찡그려야 바로 보이는 햇살 속의 풍경처럼 풀더미가 눈부시게 흐릿하다. 한낮의 햇볕에 익어 눈보다 코를 먼저 자극하는 풀더미. 버스럭거리는 바람 한 점 없이, 고막이 울리도록 먹먹한 한낮의 풍경이다. 전경前景의 수풀은 알을 품듯 돌을 껴안고, 후경後景의 건물은 빛에 맞서듯 어깨를 벌린 채 열린 창문으로 푸르름을 슬며시 내보인다. 하얗게 부신 건물 뒤로 빼곡히 얼굴을 내민 무성함이 이 풍경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 이 모든 풍경 속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이 세계의 주인, 식물이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했던 순서대로 차곡차곡 화폭 위에 세계를 올린다. 먼저 식물이 자리를 잡으면, 인간의 것들이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뒤를 따른다. 손가락으로 곱게 으깬 분채는 아홉 번이고 열 번이고 붓 자국 없이 한 꺼풀씩 세계를 겹으로 감싼다. 마치 보호막처럼, 혹은 그 내밀한 속 고갱이의 비밀을 위한 가림막처럼, 주름 없이 세계를 감싼다. 인간의, 인간적인 것들을 아우르는 존재의 포용력에 자연이 고요히 스민다.
가려진 것들_그리고 마중>, 2024, 100*72.5, 장지에 수묵 채색
왕성한 수풀에 몸을 기댄 작고 좁은 집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인지, 기댈 곳이 없다면 스스로 무너질 한 줌의 신기루 같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진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사춘기의 소년/소녀처럼 수줍고 광포狂暴하다.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긴 집은, 덜 자란 아이의 육체처럼 빈약하고, 천진하지만 사악한 호르몬을 닮아 결말을 알 수 없는 미완성으로 남는다. 저 집을 나서는 아이의 손에 어쩐지 누군가를 해칠 것만 같은 -그것이 자신일지도 모르는- 불안함이 들려있을 것 같다. 인간은, 별생각 없이, 자신을 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니까, 자연과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무지無智하고 무용無用하게 들이댈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이니까. 수풀 너머 둥근 초록이 그런 불안감을 끌어당긴다. 선명한 초록으로 물기 없이 내려다보는 초록 원은 태양이라기보다 하늘에 뚫린 커다란 구멍 같다. 어디선가 이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다른 세계의 구멍. 어린 불안감을 잠재울 커다란 존재, 무한無限하고 무해無害한, 다른 세계로 건너감을 가능하게 만드는 통로는 아닐까.
<둥근 위로>, 2024, 53*41, 장지에 수묵 채색
맨질맨질한 풍경과 대칭되는 질감의 거친 표면이 오랜 취미로 모인 오래된 자연, 수석壽石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파스텔 색조의 차분하고 비현실적인 색감은 잘 마무리된 실내처럼 반듯하고 깔끔하다. 이질적인 감촉, 대비되는 색상, 가까이 들여다본다. 세계를 자르고 보이는 풍경의 이면인가. <가려진 것들_그리고 마중>의 초록 반원이 다른 세계를 향한 구멍이라면, <둥근 위로>의 폐곡선은 이 세계를 향한 구멍, 안팎이 바뀌는 시선의 반전을 보여준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진경眞景, 그 속으로 여기의 풍경이 펼쳐진다. 작가는 구멍처럼 보이는 풍경의 외곽이 서로 기대고 있는 새의 실루엣이라고 말했다. 서로의 품을 파고들며 온기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있는 두 마리의 새. 새들은 얇게 포개져 여린 온기를 서로에게 전한다. 자연이 되지 못한 우리에게 풍경이 내미는 손, 자연이 건네는 모나지 않은 손길, 둥근 위로慰勞다.
<나의 하늘_고요한 안녕>, 2024, 86*64, 장지에 수묵 채색
작가를 찾아가는 발아래 바람의 융단을 깔고, 바람을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펄럭거리며 날아올랐다. 20여 년 전의 거친 붓질이 고요한 분가루의 사려 깊은 조화로움이 되기까지 작가는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앉은 자리에 투덜거리지 않고, 옆 사람에게 괜한 시비를 걸며 지분거리지도 않았다. 기억에 없지만, 오래전부터 제 자리에서 자라고 있던, 눈길 바깥의 당당한 풀대처럼, 모든 말들이 자신에게 수렴되는, 곧은 심지를 내보였다. 질문의 시작점과 답변의 끝점이 둥글게 말렸다. 위로慰勞는 둥글었고圓, 작가가 내미는 자연風景은 위로up 솟구쳐 다시금 펼쳐진 자연園이 되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텄다. 한낮의 수분기 없는 풍경, 녹진하게 익어가는 수북한 수풀 더미의 냄새, 뽀얀 색감으로 감싼 다른 세계의 원들, 그리고 나뉜 세상과 맞닿은 세상 그 경계의 미묘한 엿보기. 둥글고 둥글게 세계가 겹치고 세계가 나뉜다. 교집합과 공집합 속에 우리와 자연이 공존한다. 작가의 위로慰勞가 공처럼 둥글게 위로up 떠올라 하늘에 구멍으로 남았다. 얼쑤- 까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