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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엔 모서리가 없다. | ARTLECTURE

그리움엔 모서리가 없다.

-에피메테우스의 스물아홉 번째 질문-

/Picture Essay/
by youwallsang
Tag : #관람, #미술관
그리움엔 모서리가 없다.
-에피메테우스의 스물아홉 번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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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급작스러운 봄기운이 몸의 수분까지 앗아간 듯 눈이 뻑뻑하다. 창문이 없는 미술관에서의 하루는 바스락거리는 건조함과 등을 맞댄 동거다. 시간 내내 손끝 하나 까딱 않는 작품 앞에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보면, 눈에 기름칠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2리터의 물이 목구멍은 씻어주지만, 모래알 날리듯 꺼끌거리는 눈가를 닦아주지는 못한다. 나의 사적인 시간은 친애하는 사람의 부재로 흔들리는데, 작품들이 헤집어 놓은 머리는 의지와 상관없이 아프기만 하다. ‘스탕달 신드롬’까지는 아니더라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작품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예술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 중에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어째서 자꾸 줄어드는 걸까. 세상에 똑똑한 그림만 남고, 저 잘났다고 으스대는 그림만 남는다면, 그제야 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꼬이고, 들고 있는 안내서를 뒤적이는 손가락은 바쁘다. 벽에 적힌 큐레이터의 목소리는 번역기가 필요한 외국어처럼 낯선데, 작품 옆의 캡션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위로받고 싶은데, 누가 나 좀 쓰다듬고 보듬어주기를 바라는데, 모서리가 반듯한 작품들이 뻔뻔하게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생각을 해. 생각을 하라고!’ 날카로운 수술용 도구로 잘라낸 듯 깔끔하고 정갈해진 감정. 맥락은 위선이 되고 은유는 선택장애자의 망설임으로 읽힌다. 모두 불친절하고, 자꾸 머리를 쓰라고 한다.

 


윤길영, <그리움>, 2006, 캔버스에 아크릴, 100X80.3,

2024 소장품주제기획전 <사유의 정원>, 2024.2.16.~12.22,

성남큐브미술관 상설전시장

 


눈이 머물지 않았다. 첨예하고 걍팍스런 그림 사이에서 수더분한 색채의 밋밋한 그림이라고 생각 짧게 지나쳤다. 뭐랄까, 뛰어난 기법이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고, 소재가 특출나서 다시 돌아볼 만하지도 않았다. 미술사에 발자국을 남길만한 특별함은 없어 보였고, 살짝- 지난 세대의 오래된 취향마저 풍기는, 앞 세대 풍의 그림이라 지레 생각했다. 띄엄띄엄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사물들, 출처가 쉽게 드러나는 것들의 평범함, 아직 긴 생각이 떠오르지 못한 일상의 것들이 순서 없이 서성이고 있었다. 몇몇 나이 지긋한 관람객이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볼 때면, 그제야 괜스레 한 번 눈이 갔다. 뭐 볼 게 있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패트릭 브링리, 웅진지식하우스, 2022

 


당장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날아가 경비 입사원서를 넣어야겠다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가족을 잃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삶에서 한발 물러나 있고 싶다는 패트릭 옆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함께 있어 주고 싶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사랑하는 명화들을 앞에 두고 애도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두 뺨이 눈물로 젖지 않아도 충분히 촉촉하게 젖은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로부터 딱 한 발자국 떨어져 그림 뒤로 숨고 싶었다. 더는 머리 아프게 생각하는 예술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잃고 아무렇지 않게 평정심을 지키고 있는 내가 무서워졌다. 모든 사람에겐 전체 용량도 다르고 매번 퍼 담는 양도 다른 감정의 저수조가 있다. 각자 적당한 순간에 넘침 없이, 부족함 없이 관리해야 하는데, 나의 저수조는 위험하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채우기만 해서, 말도 안 되는 일로 한순간에 붕괴될 지 모른다. 나는 지금 울고 싶다.

 


윤길영, <그리움> 부분, 2006, 캔버스에 아크릴, 100X80.3,

2024 소장품주제기획전 <사유의 정원>, 2024.2.16.~12.22,

성남큐브미술관 상설전시장

 



눈을 멈춰 세우니, 손이 먼저 다가간다. 만져보고 싶다. 오랜 흉터처럼, 꼬집어 숨겨둔 기억처럼, 오톨도톨 찝힌 두덩이 위로 손바닥을 쓸고 싶다. 집과 산과 나비와 새, 말라깽이 사람은 집에 들어앉아 커다란 꽃잎을 옆에 끼고, 시간이라는 더께를 덮고,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발굴을 기다리는 유물처럼 사물들이 하얗게 셌다. 그리움은 자꾸만 만지고 싶은 무엇이다. 이 하얀 그림이 유약을 바른 듯 반질거리는 것도, 꼬집힌 흉터처럼 튀어나와 가려운 듯 손을 부르는 것도 모두 그리움의 습성이다. 습기 어린 자국, 문지르면 손자국이 박히는 무른 바탕에 흔들린 마음이 무늬를 그리며 기억과 함께 부벼진다. 그래서 그리움의 모서리는 둥글다. 만지고 쓰다듬고 보듬어서 모서리가 닳았다. 오랜 생각에 잠길 때 하는 버릇처럼 한쪽으로 설풋 기울어 기억이 쏠린다. 눈 감아도 손끝에 느껴지는 그리움이 등을 기댄 벽에 그림자를 만든다. 마음이 기운다. 그리움은 머리가 하얗게 센 채 앉은 자리에서 굳어 하얀 뼈대만 남겼다. 그리움이 시간을 먹고, 시간을 덮고, 시간을 으깨서 색을 잃고 빛이 되어버렸다.

 


니콜로 디 피에트로 제리니, <무덤의 예수와 성모>, 1377년경,

패널에 템페라와 툴드 골드, 102.4X85.2

 


빛이 스며든 마른 패널에 오래된 두 사람이 있다. 자식을 잃은 패트릭의 어머니를 불러 세운 그림은 똑똑한 그림도, 잘난 그림도 아니었다. 다 컸지만 죽기엔 너무 이른 창백한 얼굴의 아들과, 핏기없는 얼굴로 그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 모자의 앞과 뒤를 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까지, 많은 이들의 입을 통해 들어 알고 있다. 종교화나 역사화가 윗길이었던 시대가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했던 때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사는 끊김 없이 흐르는 그 사이사이마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안고 같이 소용돌이쳤다. 울렁이는 마음은 같은 진동으로, 고통에 찌그러진 상처는 함께 지키고 버티는 힘으로 공명했다. 모든 것이 파편화되어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현실에서, 예술 또한 타자와 관계하기보다 독자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별적 표현을 강박적으로 들이대는 것이 사실이다. 예술에게 위로를 바라는 이들에게 서사를 잃은 그림은 묘사에만 치중하거나, 개인의 핍진한 주관적 감정을 강요하는, 낯선 타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는 예술에게 위로받고 싶다. 예술이 꼭 그래야만 하냐고 묻는다면, 굳이 그래야 한다고 답하겠다. 최종심급에서 모든 변별적 복잡성을 누르고 종결되는 하나가 나의 예술이다. 판단은 갈팡질팡하고 잣대는 들쑥날쑥해도 우리는 매 순간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찾고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예술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답을 하는 나를 정의해 가는 것이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1808~9,171.5X110, 캔버스에 유채,

독일 올드 내셔널 갤러리

 


나는 이 그림을 사랑한다. 이 그림 앞에서는 언제든 한없이 울 수 있다. 마치 잠가 놓은 수도꼭지처럼, 언제든 딸깍- 소리와 함께 켜지는 스위치처럼, 나의 감정은 요동칠 준비를 하고 있다. 작기만 한 나 자신과 결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 이것을 그저 숭고라는 단어 하나로 부를 수는 없다. 그보다 더 막막하고 참담한 어떤 감정. 아무리 잘난 척을 하고, 아무리 아는 척을 해도, 깃털 하나만큼의 무게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그러므로 나를, 생의 우발적 사건으로 돌려세우는 거대한 예술이, 나를 위로하는 예술의 마음이, 지금은 한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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