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미술, 내 생각을 당신에게.
“모든 예술 작품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라고 말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당연한 소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작품을 대면한다면, 그 인과관계가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구상 회화는 그나마 수월하다. 형태를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언인지, 왜 그려졌는지 즉각적인 의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추상 회화의 경우에는 이러한 물음은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이어지는데, 이를테면, 색과 선, 도형과 같은 형태에 있다. 물음을 떠올리는 일련의 과정은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 다만, 이 과정은 작가가 붓을 들고 물감을 바르는 시간부터가 아니라, 구상하는 과정부터 내 앞에 지금 보여지기 까지의 과정을 의미한다.
즉,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캔버스와 물감으로 구성된 물질이나, 우리의 머리에 전달되는 것은 작가가 구상했던 생각, 즉, 정신적인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것을 Cosa Mentale라 하였는데,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현대미술이라 부르는 세기에 들어서서야 작가들에게 주목받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주제로써 표현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때가 19세기 말 즈음이라고 본다면, 그 이전까지는 사회적, 경제적 계층관계에 의해 예술가보다 기술자로, 장인으로 불려졌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이 전면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개념미술’의 과정과 닮아 있다. 정신과 정신의 소통, 다시 말해, 작가의 정신과 관객의 정신의 소통은 텔레파시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정신적인 것을 다시 아이디어(개념)이라는 말로 치환하면, 결국, 개념미술이란 생각의 시각화를 의미하여, 기술적인 표현이나, 색, 형태 등이 아닌 작가의 아이디어 그 자체에 대한 탐구과 매체의 모색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개념미술에서 아이디어 자체의 중요성은 외관적인 실현보다도 중요한데, 이 때문에 아이디어 설계도면 또는 증명서 만으로도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하는 것이다.
기호를 작품으로
아이디어를 시각화해야 하기 때문에, 형태와 매체는 퍼포먼스, 설치미술, 대지미술 등 아이디어의 수 만큼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람이 천 명이라면 천 명의 생각이 모두 같은 양상을 가질 수 는 없지 않겠는가. 퍼포먼스가 신체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직접적 언어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작가들이 있다. 조셉 코수스, 로렌스 위너, 그리고 온 카와라 등의 작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언어를 하나의 문자가 아닌 기호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언어가 가진 상호간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언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사물의 본질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사물, 현상, 문화까지 언어적 기호체계로 파악하고자 하였던 소쉬르의 기호론과도 연결된다.
기호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라 볼 수 있는데, 기표란 표현하는 수단, 즉, 문자, 음성, 이미지 등을 이야기하고, 기의는 의미하는 바, 본질 실제 등을 의미한다. 기호는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다가와 기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칼럼을 한국어를 전혀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여준다면 흰 바탕에 검은 외국어의 조합 그 이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지금 이 칼럼을 읽고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련의 개념미술 작품들을 떠올리는 과정까지 실현하게 해주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즉, 기호는 동일한 문화권과 일련의 교육수준 등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호를 통해 작품을 실현한 작가라면, 그 작가에게 있어 기호는 그의 아이디어를 가장 잘 내포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개념 그 자체가 된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1945-),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들(One and Three Chairs), 1965,
목제 접이식 의자, 의자사진, 의자의 사전적 정의 사진, 의자 82 x 37.8 x 53 cm, 사진 패널 91.5 x 61.1cm,
텍스트 패널 61 x 76.2cm, MoMA, 뉴욕, 미국. © 2023 Joseph Kosuth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Courtesy of the artist and Sean Kelly Gallery, New York.
조셉 코수스의 <하나 그리고 세계의 의자들(1965)>은 기호의 개념을 예술에서 어떻게 다루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시라 볼 수 있다. 작품의 단순한 외관적 구성은 관객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예술 작품의 패러다임을 뒤집어 놓는다. 익숙했던 패러다임이 전복되는 순간, 사람들은 현대예술에 난해함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작품의 구성은 단순하다. 시각적 형태(의자사진), 실제대상(실물의자), 언어의 형태(사전적 정의)로 ‘의자’라는 개념을 전달하고 있다. 코수스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의자’라 한다면 그 개념을 가장 잘 전달하는, 가장 본질에 가까운 형태는 무엇인가 ? 이 물음은 결국, 본질에 대한 탐구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코수스가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는 작품이다. 그에게 있어 작품의 기술적인 표현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시각적 즐거움은 전통예술로부터 부여된 예술의 한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볼 수 있는데, 첫번째로는 예술의 관조적 외관에서 벗어나 아이디어의 본질로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고, 두번째로는 예술 기관이 특정 유형의(전통적 매체) 작품만을 수용하고 장려하는 방식에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1945-), [아이디어이자 아이디어인 예술]로 명명된,
단어 "정의"(Titled [Art as Idea as Idea] The Word "Definition"), 1966-1968,
"정의"의 사전적 정의 를 사진으로 확대 탑재, 144.8 x 144.8cm, MoMA, 뉴욕, 미국.
© 2023 Joseph Kosuth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Gift of Seth Siegelaub and the Stichting Egress Foundation, Amsterdam.
이러한 두 가지 의도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작품인 <[아이디어이자 아이디어인 예술]로 명명된, 단어 "정의"(1966-1968)>이다. 해당 작품은 로스엔젤레스의 Gallery 669에서 열린 그의 첫번째 개인 갤러리 설치 작품의 일부로,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 대한 포토스탯을 포함하여 사진 이미지를 포함한 작품이 전시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재제작 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문서와 소유권 인증서가 함께 제공되었다. 즉, 많은 개념미술 작가들이 그렇듯 코수스에게 있어 그의 작품은 예술품의 영구적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이는 곧, 예술품인 작품을 소중하게 보관하는 미술관의 특권적인 위치를 훼손하는 행위라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예술의 ‘미의 기준’이 대상 자체나 아름다움이 아닌, 아이디어에 있음을 증명하는 행위이다.
예술의 대중화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 Venise), 성모자와 네 명의 성인과 기증자
(Madonna col Bambino, quattro santi e un donatore), 1507, 나무에 오일, 90x145cm, San Francesco della Vigna, 베니스, 이탈리아.
여기에서, 우리에게 현대예술의 난해함을 선사하는 이 작품이 전통예술과 비교해 정말로 난해한가를 묻고 싶다. 벨리니의 그림을 누가 보아도 그 형태를 인간이라 인식할 수 있고, 종교화 임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난해한 그림이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로 이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성경의 내용을 알아야하고,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이야기를 알아야 하며, 그림의 주문자가 누구인지 알아야만 비로소 해당 그림의 의도와 기능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현 시대의 우리라면, 몇 번의 검색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당대의 사람들, 어쩌면 그리 멀리까지 가지않아도 1960년의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 결국, 전통예술은 조셉 코수스와 같은 작가들에게 있어 문화적 혜택을 받은 특정 계층을 위한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가 행한 예술 패러다임의 전환은 벨리니와 같은 그림을 ‘미의 기준’으로 생각해오던 사람들에게 예술이 모두를 위한 기준, 그 본질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결국은 예술의 대중화까지 연결지점을 가진다. 즉, 우리가 난해하다 생각했던 그 현대예술은 사실상 우리가 예술을 접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해 예술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찰하였던 것이다.
오는 1월 28일까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로렌스 위너의 작품을 보면 이러한 의도를 더욱 잘 읽을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언어로 구성된 작품을 직접적으로 벽면에, 시설물에 부착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역시, 예술품의 보존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행동이라 볼 수 있으며, 작가의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방식과 관객들이 수용하는 그 과정을 매우 직접적으로 단순화 하였다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코수스와는 다른 의미를 한가지 더 말하였는데, “인간 존재에 필수적이지 않고, 예술적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유일한 목적 없이 생태계에 가해지는 모든 피해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 말한 것이다. 즉,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행위로 가장 본질적인 형태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최소한의 매체만을 활용하는 그의 작품 구성을 통해 전달된다.

로렌스 위너(Lawrence Weiner, 1942-2021), 보고 보여지기 위해(TO SEE AND BE SEEN), 1972, 벽화, 가변크기,
Solomon R. Guggenheim Museum, 뉴욕, 미국. © 2010 Lawrence Weiner/Artists Rights Society (ARS). Photo: David Heald
그는 주로 관용구, 격언, 명상, 물리적 행동에 대한 언어적 설명을 표현한다. 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관통하는 작품이라 볼 수 있는데, 눈 앞에 있는 것은 글자지만, 우리가 시각적으로 인식하고,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머리 속에서는 공간으로, 또는 시간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그는 미술관 전시 공간 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의 벽면에, 거리에, 또는 미술관의 복도와 같은 곳에 작품을 설치한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이라는 것은 결국 생각하는 행위라 볼 수 있다. 반드시 작품이 미술관에 설치되어야만 예술적 지위를 얻는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곧, 예술과 역사에 대한 특정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또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굳이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예술을 접할 수 있다는 예술의 대중화 개념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예술은, 타인의 신앙생활이나 부, 또는 지식과 교양의 결과물이나 사교행위, 탐미적 의식이 아닌, 세상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다음 글에서는 언어를 통해 인간의 실존을 탐구하는 작가, 온 카와라에 대해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