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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바라보기, 초월적 정신에 물성 더하기 | ARTLECTURE

옆에서 바라보기, 초월적 정신에 물성 더하기

-<아니쉬 카푸어>, 국제갤러리, 2023.8.30.-10.22-

/Insight/
by 박수현
옆에서 바라보기, 초월적 정신에 물성 더하기
-<아니쉬 카푸어>, 국제갤러리, 2023.8.3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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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아니쉬 카푸어는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느낌,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이러한 효과를 오브제 표면이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시키도록 하는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이 작은 작업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이렇게 밝은 조명 아래에서 아무리 봐도 보지 못한다니. 신기술을 사용한 신기한 착시효과쯤으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이 단편이야말로 명상적인 서정성과 원초적인 폭력성을 오가는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세계, 고양된 이상과 추악한 욕망을 오가는 인간본성에 대한 은유로 보였다. “네가 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 작품이 질문한다.

 

아니쉬 카푸어의 <-정형 블랙(Non-Object Black)>은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물질이라고 알려진 반타 블랙을 사용한 시리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것은 그 사물의 표면에 빛이 반사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반타 블랙을 칠한 오브제는 모든 빛을 거의 완벽하게 흡수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의 표면에서 칠흑 같은 검정색만을 볼 뿐 그 굴곡이나 질감은 느끼지 못한다. 주변과 구별되는 실루엣을 가진, 편평하거나 또는 아주 깊어보이는 검정색 면만을 볼 뿐이다. 정면에서 봤을 때는 흰 바탕에 그려진 검정색의 원이지만 옆에서 보면 원의 가운데가 높이 솟아있으며, 흰 바탕에 칠한 검정색 정사각형은 실제로는 마름모 형태로 튀어나와 있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평면처럼 보이는 오브제의 능청스러움, 아무리 보려고 노력해도 보지 못하는 눈의 무능함이 당황스럽다.




 

작품은 본다는 행위에 대해 질문한다. 시각은 신체의 감각이라기보다는 정신의 은유로서 지식, , 이해를 의미해왔다. 영어표현 ‘I see.’가 알겠다는 뜻이듯, 우리의 일상에서도 본다는 말은 대상을 지식적으로 이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작품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한다. 이 오브제를 보기 위해서는 옆에서 바라봐야 한다. 앞에서는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았던 높이내지는 두께는 다른 각도에서 봤을 때 비로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것은 아니쉬 카푸어 작품의 두가지 상반된 속성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쉬 카푸어는 비물질적이고 초월적인 느낌, 명상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세계에 알려졌다. 그는 이러한 효과를 오브제 표면이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시키도록 하는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노란색 벽 안쪽으로 끝없는 통로가 이어진 듯한 <노랑(Yellow)>, 스텐레스 반구 안쪽에 푸른 안료를 도포한 <무제(untitled)> 등에서 단색의 면은 빛을 흡수하면서 매끈하고 편평한, 또는 끝을 가늠할 수 없이 깊은 느낌을 준다. 작품에 사용된 원형, 사각형 등 기하학적 형태와 검정, 빨강, 노랑 등의 원색은 수학적이고 조형적인 원리, 완전하고 순수한 색상을 나타내는 비물질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보인다. 표면으로부터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한 작품은 마치 현실의 복잡함을 떠나 초월적인 세계에 속한 존재인 듯하다. 반면 <구름 문(Cloud Gate)>, <궤도(Orbit)>와 같은 스텐레스 작업에서 거울과 같은 매끄러운 표면은 모든 빛과 이미지를 반사시키고 왜곡시킨다. 작품은 현실의 장소와 우리의 모습을 담지만 이를 현실과는 매우 동떨어진 모습으로 변형시키면서 초현실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극단적인 빛의 흡수와 반사, 두 종류의 작업 모두 시적이고 명상적인 느낌을 주며 현실로부터 숨을 돌리는 휴식의 시간을 허락해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니쉬 카푸어는 물성과 신체, 원초적인 생명력을 표현하는 작업 또한 이어왔다. 그는 <나의 붉은 조국(My Red Homeland)>에서 바닥에 놓인 거대한 해머가 마치 시계바늘처럼 회전하며 거대한 붉은 왁스덩어리를 밀어내고 형태를 만드는 과정을 탐구하는 등 그가 생의 숭고한 격렬함이라고 부르는 주제를 표현해왔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었던 이러한 양상의 작품은 이번 국제갤러리의 전시에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림자(shadow)>, <섭취(Ingest)>와 같은 오브제 작품은 500킬로그램에 달하는 육중한 덩어리를 가지며, 그 표면은 마구 던져놓은 흙더미처럼, 파헤쳐진 살갗처럼,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거칠고 폭력적인 제스쳐와 물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In-between>, <Untitled> 등 캔버스 작업 역시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혀, 불에 탄 시체, 터져버린 내장기관을 연상시킨다. 재앙의 흔적이나 어두운 욕망을 나타내는 듯 깊고 끈적한 검정색, 피와 장기를 상징하는 듯 섬뜩하고 뜨거운 빨간색 등의 원색은 작품에 강렬하고 원초적인 느낌을 더한다.

 

그런데 이 두가지 이질적 양상의 작업은 원이나 큐브에 가까운 추상적 형태나 원색의 색감 등 매우 유사한 특징을 공유한다. 두 작품의 차이는 그 물성이 제거되었는가 아니면 물성을 강조하였는가에 달려있다. 이상적이고 정신적인 위치에 있던 작품은 물성이 더해지면서 아래로 끌어내려져 현실보다 더 낮은 곳에 위치하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 위에 벤타 블랙을 칠한다면 어떻게 될까? 벤타 블랙으로 그 내부의 굴곡과 질감을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린다면 이 저급한 형태는 다시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로 승화되지 않을까. 마치 반타 블랙 시리즈의 편평한 검은 원형을 정면과 옆면에서 바라보며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하듯, 이질적으로 보이는 카푸어 작품의 두가지 양상은 동일한 대상을 각각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과정, 또는 대상에 벤타 블랙을 칠했다가 다시 벗겨내서 그 안의 모습을 확인하는 과정과도 같지 않을까.


그러한 점에서 반타 블랙의 독점권을 둘러싼 카푸어의 논란은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봐도 너무나 세속적이고 배타적인 그의 욕망은 반타 블랙의 세계적 유명세에 힘입어 모든 이들에게 공공연하게 선포된다. 그러나 질문해본다. 그의 욕망이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욕망인가? 세상에는 욕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과 이를 가려 안 보이게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울퉁불퉁함을 다듬고 가리는 게 나은 건지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나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본질적으로는 큰 차이 없는 인간 본성을 앞에서 보느냐 옆에서 보느냐의 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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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수현_매일의 삶과 함께 하는 예술을 바라며, 글을 쓰고 기획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