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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예술가, 망설이는 대답들 | ARTLECTURE

질문하는 예술가, 망설이는 대답들

-에피메테우스의 열일곱 번째 질문 [김홍석, <아이러니 & 아이디얼리즘 IRONY & IDEALISM> 展, 2017.9.28.~12.3, 경기도미술관]-

/Artist's Studio/
by youwallsang
질문하는 예술가, 망설이는 대답들
-에피메테우스의 열일곱 번째 질문 [김홍석, <아이러니 & 아이디얼리즘 IRONY & IDEALISM> 展, 2017.9.28.~12.3, 경기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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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LIGHT


한 이탈리아 예술가의 전시가 연일 떠들썩한 기사를 만든다. 대한민국의 품격 높은(?) 미술관은 작품을 ‘위해’ 바닥을 팠다고 너스레를 떨고, SNS의 갖은 인증샷과 전시 소식은 ‘나만 못 봤어, 이 전시’라는 개탄으로 화음을 넣는다. 예술이 능동적인 감상자를 사랑해서 언제나 발 빠른 수용만을 원한다면, 예술이 유행과 무엇이 다른가. 눈에 와 닿는 감각에만 열광한다면, 숱한 고민 속의 질문들에는 누가 대답해야 할까. 아름다움을 내주고 앎을 얻은 예술은 지금 어떤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까. 정교하게 만들어진 상황과 구별할 수 없는 대상들로 버무려진 작가 김홍석의 능청스러운 거짓말은 집요한 질문을 꺼내 놓는다.


<무제(큰 벽)>, 2017, 벽에 수성 페인트



말로는 예술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떠들지만, 우리 삶은 생각보다 예술에 곁을 주지 않는다. 삶은 어떤 단단한 것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술이 밀치고 들어 올 틈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예술은 예외의 공간에서나 즐기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기에 삶은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말한다고 해서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니고, 자유를 표현한다고 해서 자유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의를 그려봤자 벽에나 걸려 있을까, 일상에 정의가 예술처럼 등장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예술이 삶과 부대끼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예술이 돈을 밝힌다고(상업적), 너무 실용적이라고(디자인적), 사심이 들었다고(정치적) 손가락질한다. 그 말인즉 우리는, 예술이란 것이 돈을 밝히면 절대 안 되고, 매우 비실용적이어야 하며, 결코 누군가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과 삶에 교집합은 있을까.



 <침묵의 고독(한국에서)>, 2017, 학생


 

크레파스 자국처럼 울퉁불퉁 칠해진 벽 아래로 눈이 게슴츠레한 당나귀 탈을 쓴 사내가 두 손을 머리에 괸 채 미술관 바닥에 누워있다. 붉은 양탄자로는 찬 바닥의 냉기를 막을 수 없는, 잔뜩 움츠리고 있는 그는 미술관의 정적만큼이나 단단해 보인다. 탈에 가려진 얼굴은 오히려 천연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눈을 감은 채 아예 잠들었을지도. 얼굴이 가려진 탓에 그가 조금 더 뻔뻔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작가는 벽을 등지고 누워있는 당나귀 탈의 상황을 수줍은 글씨로 적었다.



 <침묵의 고독(한국에서)>, 2017, 학생



담담한 손글씨는 자신을 미대생이라 말한다. 미술가의 요청에 따라 제작비 일부를 수고비(?)로 받으며(수고비 액수는 공개를 거부했다) 전시 내내 미술관 바닥에 누워있기로 했다고 한다. 쑥덕임이 들쑤셔도 당나귀 탈을 쓴 그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파란 체크 소매 밑으로 드러난 맨손이 살짝 파리하게 보일 뿐 그는 떨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지나치게 큰 당나귀 탈 때문에 그의 목이 금세 지쳐버릴까 관람객의 걱정만 커진다. 가지런히 모은 두 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지 않을까, 한쪽으로 오래 누워있으면 몸이 저리지는 않을까, 보는 사람의 몸으로 고통이 옮겨온다. 미술 대학을 휴학한 대학생이라니 얼추 20대 중반쯤일까. 발치에 놓인 안내문을 읽는 관람객들의 눈이 빨라진다. 바닥이 차가울 텐데 손바닥만 한 양탄자로 냉기가 가실지, 도대체 언제까지 한 자세로 있어야 하는 건지, 밥은 어떻게 먹는지, 화장실은 때마다 갈 수 있는지... 질문이 하나씩 쌓여간다.

 


<침묵의 고독(한국에서)>, 2017, 운전사

 


대형화물차 운전사라는 강아지 탈의 남자는 벽에 기대어 앉아있다. 조금 사나워 보이는 눈매와 두툼한 그의 몸집은 알 수 없는 화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하루의 짜증이 겹겹이 뭉쳐서 몸무게를 늘리는데, 그의 몸은 마치 벽에 기대 둔 곡식 자루처럼 바닥으로 고르게 퍼져 안정감 있게 눌려있다. 온종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반려견을 떠올리면, 사내의 축 늘어진 귀와 어깨가 안쓰럽다. 하루 일곱 시간에 팔만사천 원을 받으며 자신이 원하면 미술관에 나오는 그는 지금 무직 상태다. 미술가의 요청에 따라 하루 일곱 시간을 나와 앉아있지만, 그는 이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이렇게 앉아있어야 하는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의 행위는 일곱 시간 팔만사천 원이 전부다. 관람객들은 그의 무관심이 불편하다. 의도를 가지고 찾아온 미술관에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예술 행위를 하고 있으니 불편할 수밖에. 그래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 와 앉아있는 그의 개인적 사정은 무엇인지, 그의 근무환경에 불법적인 것이 없는지, 하루 일곱 시간 팔만 사천 원의 돈은 적절한 정도인지... 살핀다. 그러다 누군가 한마디 한다.


돈이면 다 됩니까?

 

불편하다. 비록 동물 탈을 쓰기는 했지만, 관람객 앞에서 온종일 움직이지도 못하며 앉아서, 누워서, 노동을 하고 있는데 그걸 예술이라고 바라보는 여유로운 감상이라니. 불편한 죄책감(!)은 민망한 걸음이 되고 민망한 걸음은 불쾌한 경험이 되어 급기야 예술의 비인권적인(!) 면모에 화를 내게 만든다. 누군가의 노동을 멀뚱거리며 바라만 볼 수 없는 불편함. 감각이 혼란스러워지며 가치판단이 흔들린다. 고상한(!) 예술을 관조(!)하러 왔다가 거북스러운 눈앞의 상황에 적잖이 당황스럽다. 작가 김홍석은 그 지점에서 질문을 시작한다.

 


<침묵의 고독(한국에서), 2017, 무용수

 


예고 없이 닥친 급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 무용수의 예술적 표현이다. (협업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에 참여한 것이기에) 프로젝트에 대한 지적 재산 및 전시 참여 비용으로 두 무용수는 이백오십만 원을 받았다. 두 무용수의 예술적 표현은 앞서 본 미대생이나 운전사의 경우와 다르다. 미대생은 작가의 의도를 이해했지만, 메뉴얼에 복종했을 뿐이고 운전사는 아무런 이해 없이(그럴 의지도 없이) 복종만 했다. 자기 행위에 대한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 행위는 노동이 되기도 하고 예술이 되기도 한다. 어린아이의 무지한(!) 빨간 선과 예술가의 의도적인(!) 빨간 선. 시각적 결과물이 같다고 할 경우, 예술은 어느 쪽일까.

 


<침묵의 고독(한국에서)> 전경, 2017



작가 김홍석은 트릭스터Trickster. 뒤흔들고, 깨부수며, 결과를 예측하지 않고 일단 저지른다. 장난스럽고 재기발랄한 농담은 진담과의 구별이 모호하다. ‘이건 어때?’하며 진짜와 가짜를 섞고 위치를 바꾼다. 전시장의 모든 인물은 잘 만들어진 가짜다. 미대생도, 운전사도, 무용가도 모두 잘 짜인 연극무대 위의 광대에 불과하다. 관람객들은 이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간혹 동물 탈을 쓴 그들의 움직임을 봤다는 증언(!)도 있었다). 나의 시선이 타인의 노동을 한가롭게 바라보는 뻔뻔함을 가지지 않아도 돼서 안도했다(이건 정말 중요하다. 관람객의 평온한 미술관 나들이를 해치지 않았으니). 충분히 불편할 수 있었던 시선의 높이를 짓궂은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어서 안도했다(이 모두가 가짜라는 것을 아는 순간 관람객들의 말이 많아졌다). 모방도 재현도 아닌 현실로 제시된 연극적 상황을 통해 예술과 노동의 사회적 감각을 재발명하고자 한 작가 김홍석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교양있고 품격있는 미술관에서 타인의 노동을 직접 대면하게 하고, 예술이란 이름으로 현장에서 돈이 오고 가는 것을 목격하게 하고, 여유로운 나들이에서 타인의 노동으로 굳어진 몸을 적나라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 그 불편함의 감각을 섬세하게 나누는 작업, 그래서 감각의 변용으로 예술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 예술은 질문하는 것이다.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적확한 예술적 의지를 보이며 그저 그런 질문이 아닌 보다 위대한 질문을 뽑아내고자 더 깊고, 더 많은 질문을 만들어 내는, 예술은 끝없이 질문한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인생의 역사> / 신형철/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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